소설리스트

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17)화 (117/140)

117화

재판이 끝나고 긴급 귀족 회의에 참석한 황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의 치부가 고스란히 까발려 졌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황실에 내려진 저주가 알려지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폐하, 폴루티아가 정말 신벌 때문에 생긴 겁니까?”

“황실에서 이 사실을 은폐하고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동안 폴루티아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신 이유가 황실이 저지른 과오 때문입니까?”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폴루티아를 이대로 두실 작정이십니까?”

폴루티아는 운명에 맡겨야 한다며 체념하고 있던 귀족들이 배신감에 분노했다.

모든 정황을 파악한 올리안 공과 다른 대신들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황제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변명뿐이었다.

황궁 앞을 점령한 시위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입막음을 하기에는 늦어버렸으므로.

클로디안은 대공의 이름을 짓씹듯 내뱉으며 분노하는 황제를 멍하니 응시했다.

‘이 일을 어찌 수습해야 할까.’

흥분하여 항의하는 귀족들의 말소리가 한데 뭉쳐져 귓가에 윙윙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목이 졸리는 것만 같았다.

답답함에 크라바트를 풀었지만 그럼에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어.’

당장이라도 이 아수라장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황태자로서 회의 도중 뛰쳐나갈 수는 없었다.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충동을 억누르는데 문득 데이먼이라는 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로웨나 케인만 있으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신의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황가의 저주가 풀리고 대공의 용서도 받을 수 있겠지.

그렇다면 데이먼의 도움도 필요 없게 되니 폴루티아를 방관할 이유가 없어진다.

어쩌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면 폴루티아도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로웨나 케인, 그 한 사람만 희생한다면.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던 클로디안이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굳혔다.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한 것인지.

그런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린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데이먼이라는 자가 저주받은 자도 살릴 만큼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제국민 전체의 눈을 가릴 순 없는 것 아닌가.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만큼의 인신제물이 필요하겠지.’

판타시아 궁을 유지하는 수준 가지고는 턱도 없을 것이다.

“수천의 제물보다 한 명의 희생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또 다시 데이먼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꺼져. 사라지란 말이야.’

데이먼이 제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릿속에 계속 그의 목소리가 들릴 리 없지 않나.

클로디안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뒤에 서 있던 근위대장이 걱정스럽게 클로디안의 안색을 살폈다.

함께 호위하고 있던 애런 또한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클로디안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에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카이스 님을 찾아가보자.’

진실을 알게 되면 찾아오라 했으니 어떻게든 매달려보자.

로웨나 케인에게 사면패를 준 걸 알게 되었으니 외면치는 않으리라.

가까스로 회의가 끝날 때까지 버틴 클로디안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을 벗어나 자신의 궁으로 가던 그는 궁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카밀라와 마주쳤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카밀라가 치맛자락을 살포시 올리며 인사했다.

“아직 돌아가지 않았나?”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라 평소와 달리 냉랭한 어투가 흘러나왔다.

반갑게 그를 맞이하던 카밀라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황태자궁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과 근처에 있던 시종들도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제야 클로디안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지어졌던 미소가 지금은 입꼬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재판이 끝나고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을 텐데. 여태 나를 기다린 건가?”

다행히 목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금 전까지 벨라와 함께 있어서 오래 기다리진 않았어요.”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도록 하지.”

클로디안이 카밀라를 에스코트하여 응접실로 향했다.

카밀라와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이전까지 맡지 못했던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향수를 바꾼 건가?’

평소 그녀에게서 나던 상큼한 향이 아니라 달큰하고 그윽한 향이 났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팠던 지라 농도 짙은 향이 거북했다.

‘향수를 진하게 사용하지 않던데 오늘은 무슨 일이지?’

의아하긴 했지만 향수가 진하다 하여 질책할 수는 없는지라 애써 불쾌함을 참았다.

카밀라에게서 나던 향은 응접실로 들어오자 더욱 진해졌다.

“창문을 열고 환기 좀 시켜.”

뒤따라온 시종에게 지시하자 아치형으로 된 커다란 창문들이 차례로 열렸다.

그제야 두통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회의가 순조롭지 않았나 보네요.”

클로디안의 기분을 살피던 카밀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 제국 전역에 황실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어. 알고 있지?”

“시위대 때문에 회의가 열린 거군요.”

“시위대도 문제지만 귀족들도 폴루티아 때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야.”

클로디안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자 카밀라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시종들이 다과를 가지고 왔다. 향긋한 차향이 퍼지자 클로디안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허브차로 준비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두통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그대가 직접 준비한 건가?”

“전하께 드리려고 찻잎을 몇 가지 준비해 왔거든요.”

클로디안은 뒤늦게 카밀라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그곳도 잘 되고 있다지.’

케인 영애가 그곳에서 티파티를 연 후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소심하고 유약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자신을 놀라게 할 때가 많았다.

영민하고 의외로 강단도 있었다.

‘케인 영애를 만나면서부터인가. 카밀라가 달라진 것이.’

계약 약혼을 제안할 때도 놀라긴 했었다.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막다른 길에 몰려 있는 상황이니 카밀라라고 해도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는 건 약혼 이후의 행동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긴장하고 별거 아닌 스킨십에도 종종 굳어 버렸으니까.

그런데 케인 영애를 만나 사업을 시작하면서 점차 변해가는 게 보였다.

늘 움츠려 있던 어깨가 펴지고 그늘졌던 얼굴은 밝아졌다.

제 생각을 또박또박 말하게 되었으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미운 오리에서 우아한 백조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제법 흥미로웠다.

클로디안이 다소곳하게 차를 내리고 있는 카밀라를 응시했다.

누구의 애정도 받지 못해 메말랐던 이가 언제 이렇게 싱그럽게 만개한 것인지.

햇빛이 내리쬐는 것도 아닌데 눈이 부셨다.

순간 장미 정원에 서 있는 것처럼 몽롱할 정도로 꽃향기가 밀려왔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역겹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달큼한 향이 매혹적이었다.

클로디안이 향기에 취해 있는 사이 창을 넘어온 바람이 카밀라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살랑였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디안이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아…….”

갑작스러운 접촉에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카밀라가 멈칫했다.

사람들이 있을 때야 보여주기 위해 스킨십을 하지만 둘만 있을 때에는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왜……?

클로디안이 혼란스럽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클로디안은 애써 태연하게 손을 거두며 변명을 내뱉었다. 카밀라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왜인지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카밀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고 그녀의 사려 깊음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오늘처럼 세심하게 배려해 줄 때는 고마웠다.

그러나 그 모든 건 파트너로서의 호감과 신의일 뿐 이성적인 애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린단 말인가.

클로디안이 가슴에 손을 대며 미간을 좁혔다.

“전하, 어디 불편하세요?”

나긋한 음성조차 감미롭게 들려왔다.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클로디안이 조급한 손길로 찻잔을 들었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마음을 조금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찻물을 머금자 상큼한 뒷맛이 머리를 맑게 일깨워 주었다.

“라벤더에 무엇을 블렌딩한 건가?”

“레몬밤이요. 혹 입맛에 맞지 않으세요?”

“아니. 두통이 가라앉는 것 같아서 좋아.”

“다행이에요.”

살포시 미소 짓는 모습에 클로디안은 또 다시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니, 처음이 아닌가?

무니스에서 로웨나가 해머를 들고 마수를 향해 달려갔을 때.

그녀에게서 빛이 났었다. 태양처럼 찬란한 빛이.

그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걸 느꼈었다.

머리에 새겨질 정도로 강렬하게.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54%가 떠올랐지만 갑자기 숫자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더불어 로웨나에 대한 기억도 점차 진한 꽃향기에 잠식되어 흐려졌다.

클로디안이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은 다시금 카밀라의 연회색 눈동자로 향했다.

“오늘 로웨나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새하얀 목덜미가 언뜻 비친 순간.

이상하게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느껴졌다. 찻물로 목을 축였음에도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제대로 돕지도 못했는걸. 오히려 내가 증인으로 나서는 바람에 케인 영애가 곤란하게 됐지.”

클로디안은 애써 태연하게 대꾸했다.

“로웨나가 사면패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으니 나서신 거잖아요. 그마저도 전하의 뜻이 아니신 걸 알아요.”

마음 같아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로웨나를 석방시켜 주고 싶었지만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황태자라는 지위 탓에 명분 없이 누군가를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었고.

법정에서 한 행동과 말들은 오랜 고심 끝에 체스를 하듯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놓은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고민이었는데 그 마음을 알아주니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렸다.

“서운하진 않았나? 며칠 전 그대가 로웨나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왔을 때 사면패에 대해 알리지 않았잖나.”

“서운하진 않았어요. 황궁에는 듣는 귀가 많고, 또 제가 연기는 잘 못하잖아요.”

카밀라는 미리 알고 있었으면 표정 관리를 못했을 거라며 오히려 클로디안을 두둔했다.

“전하께서 로웨나를 살리신 거예요. 정말 감사해요. 로웨나는 제게 가장 소중한 친구거든요.”

기쁘게 웃는 카밀라를 보며 클로디안이 가슴께를 매만졌다.

깃털이 스쳐지나간 것처럼 가슴이 간지러웠다.

칭송과 감사는 지겹도록 들어온 말인데 그녀가 한 말은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까.

그는 생경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감사 인사도 전하고 곧 일어날 재해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클로디안의 녹안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 * *

탁.

카밀라 뒤로 응접실 문이 닫히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가 다가왔다.

“마차까지 모시겠습니다.”

단정한 음성과 함께 자신을 뒤덮은 커다란 그림자에 카밀라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가 애런이라는 걸 확인한 카밀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감사해요.”

그녀는 익숙하게 애런의 팔에 손을 올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에 따라 애런이 속도를 맞추었다.

황태자보다 몇 번 만나지 않은 애런의 에스코트가 더 편하다는 건 입 밖에 낼 수 없는 카밀라만의 비밀이었다.

그녀가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떠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