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시위가 일어났다는 건 알고 있나?”
대공이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아, 맞아요. 안 그래도 여쭤보려고 했어요.”
“네 석방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환호했다더군. 제국의 구원자라며 칭송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어.”
“저도 왜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진짜 구원자를 앞에 두고 그런 말을 들으니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누군가 여론 몰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의도하지 않은 소문들이 교묘하게 퍼져 나가고 있거든요.”
전부 나와 대공에게 유리한 소문이라 이상하긴 했지만 누구인지 모르니 경계심이 들었다.
“어떤 소문들을 말하는 거지?”
“제가 정화자라는 소문이요. 그리고 제가 구금된 사실이 빠르게 퍼져 나간 것도 의심스러워요. 분명 카펜에 소문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는데.”
뒷말은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자 대공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그 소문들이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았나?”
대공이 평소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제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은 경계해야죠. 더구나 그들의 의도도 모르잖아요.”
이번에는 우리를 도와주었다고는 하나 다음에는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손가락으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던 대공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배후가 누구인지 알면 안심이 되겠나?”
“스승님께서는 누구인지 알고 계신 거예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요? 저도 아는 사람이에요?”
“소개시켜 주지.”
대공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잠시 후 백금색 머리를 짧게 묶은 귀여운 인상의 미남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키는 필립만큼 컸는데 동그란 얼굴을 보면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군! 부르셨어요? 지금 한창 바쁜데.”
그는 등장하자마자 대공에게 투덜거렸다.
낯선 사람의 등장도 등장이지만 대공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어? 케인 영애? 맞죠? 케인 영애시죠?”
갑자기 나타난 미남자는 뒤늦게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어떻게 알지?’
물론 내가 유명 인사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였다.
‘귀족도 아닌 것 같은데.’
3회차 플레이를 거치면서 웬만한 귀족들은 다 꿰고 있던지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께 주군이라고 했지.’
문득 얼마 전 필립에게 들었던 그의 동료가 떠올랐다.
혹시 그 사람인가?
나와 눈을 마주친 그가 들뜬 어조로 말했다.
“주군, 드디어 영애를 소개시켜주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아니, 그러면 미리 말씀해주셨어야죠. 제대로 차려입고 오는 건데.”
해리가 제 옷차림을 살피며 입을 비죽였다.
그는 하얀색 셔츠 위에 갈색 조끼 그리고 그에 맞춘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차림이었으나 미모가 남다른 탓에 그마저도 멋들어지게 보였다.
대공은 그의 불평을 대충 흘려듣고는 무심하게 소개했다.
“여기는 필립과 같은 내 가디언. 외부 일을 전담하고 있어.”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해리라고 합니다. 좀 더 멋진 모습으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네요. 뭐, 저희 주군이 소개해 주신 것만 해도 천지가 개벽할 일이지만.”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해리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두 뺨에 보조개가 폭 패자 진중하게 보이던 인상이 단숨에 개구쟁이 소년처럼 변했다.
귀여운 인상과 스스럼없는 태도에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만나서 반가워요. 로웨나 케인이에요. 지난번 제 서한을 대신 전해주신 분이지요?”
“알아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번거로운 일이었을 텐데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드려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카펜이 의뢰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서한을 보내준 건 고마운 일이니까.
“전혀 번거롭지 않았습니다. 서한을 보낼 필요가 없었거든요.”
“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해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공의 눈치를 보았다.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단번에 밝아진 해리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쭉 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카펜의 수장, 해리 카티어라고 합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하하하,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늘 먼발치에서만 뵈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제대로 인사드리니 속이 다 후련하네요.”
해리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후원에 퍼져 나갔다.
나는 뭔가로 머리를 거하게 맞은 기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카펜의 수장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을 줄이야. 그것도 대공의 측근이라니.
한 차례 충격이 가시자 그 다음에는 옅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뭔가 되게 카리스마 있고 흑막 같이 음침한 분위기가 흐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해리는 내가 상상해 왔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혹 제게 실망하신 겁니까?”
해리가 갑자기 동글동글한 눈매를 늘어뜨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앗, 얼굴에 드러났나?’
얼른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워낙 동안이어서 그런가.
축 처진 모습이 부모에게 상처 받은 아이 같아서 내가 꼭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 아니요. 스승님과 카펜이 연관되어 있을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해서 당황한 것뿐이에요.”
나는 다급하게 변명을 내뱉었다.
“사실 카펜의 수장이 누구일지 내내 궁금했어요. 카지노를 정보 수집의 장으로 이용하다니. 정말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평소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해리를 추켜세웠다.
“큼큼, 그러셨어요?”
고개를 살짝 돌린 해리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나는 다 봤다고. 웃음을 참는 듯 씰룩거리는 입가를.
“네. 카펜이 왜 업계 1위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세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바탕이 되어서겠죠. 그래서 카펜의 수장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는데. 오늘 소원을 이루었네요.”
아이돌을 만난 팬처럼 흥분한 척 하자 언제 상처 받았냐는 듯 해리의 광대가 승천했다.
“제 능력을 인정해주시는 분을 뵙게 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우리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칭찬하고 있자니 옆에서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해리.”
뿌듯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던 해리가 대공의 냉랭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얼굴을 굳혔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인사가 끝났으면 가 보도록.”
대공이 가볍게 손을 흔들려 하자 해리가 우다다 달려가 그의 손을 붙들었다.
“너무하세요! 아가씨와 인사밖에 나누지 못했다고요. 제 활약상은 아직 말도 못 꺼냈는데! 이런 기회는 또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해리.”
대공의 톤이 한층 더 낮아지자 해리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절대 대공의 손을 놓지 않았다.
“싫어요. 안 해요. 보내시면 또 올 거예요. 몇 번을 해 보세요. 계속 올 테니까. 아니면 주군 몰래 아가씨를 찾아갈 거예요. 제가 못 할 것 같으세요?”
대공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마치 장난감 코너에서 사고 싶은 걸 사주지 않는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 같았다.
다 큰 어른이 떼를 쓰면 우스꽝스러울 텐데 귀여운 미소년 같은 외모 때문인지 묘하게 어울렸다.
당장이라도 불호령을 내릴 것 같던 대공은 불만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고만 있었다.
‘의외네. 바로 화내며 질책할 것 같았는데.’
그만큼 두 사람의 관계가 돈독하다는 뜻이겠지.
그건 필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에게 절대 곁을 내주지 않는 그가 필립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보이니까.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던 해리의 투정은 대공의 한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로웨나가 네게 궁금한 것이 있다고 하더군.”
네가 원하는 대로 활약상을 자랑하라는 뜻에 해리가 냉큼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폭 들어간 볼우물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에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애써 붙들었다.
“제게 무엇이 궁금하셨나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해리가 자신이 대답하지 못할 질문은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동안 궁금하던 카펜의 수장을 만난 것도, 그가 신수인 것도 모두 놀랍고 신기하지만!
내 의뢰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지. 난 호갱님이 될 생각은 없다고.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카펜에서는 의뢰받은 일을 실패하면 의뢰인에게 어떻게 보상을 하나요?”
“……네?”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 잔뜩 기대하고 있던 해리의 얼굴이 순간 얼빠지게 변했다.
“며칠 전, 제가 구금된 사실이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고 의뢰를 했는데 지금 어떻게 되었죠?”
“아, 그건.”
해리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의뢰를 실패했으니 의뢰비를 드릴 필요는 없겠네요. 그렇죠?”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해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우선 아가씨의 의뢰를 수행하지 못한 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여 그에 관한 의뢰비는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흠, 역시 대공의 백이 좋긴 좋군.
만약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면 절대 이렇게 순순하게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펜의 수장이 의뢰비에 관해선 친구에게도 얄짤없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왜 제 의뢰대로 하지 않은 건가요?”
대공은 분명 내가 내지 않은 소문들의 배후를 알려주겠다며 해리를 불렀다.
그건 카펜에서 내 소문을 퍼뜨렸다는 뜻이었다.
“절대 아가씨께 해를 입히고자 한 일은 아닙니다. 믿어 주십시오. 주군께도 허락을 받고 한 일이에요.”
대공을 힐끗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가 네 의뢰를 받자마자 나를 찾아왔었다. 숨기는 것보다는 알리는 게 네 석방을 앞당길 수 있을 거라고.”
“아가씨께서 카펜에 의뢰하신 이유는 아가씨의 명성과 가문의 평판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우해서였지요?”
“맞아요.”
“그래서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아가씨의 명성을 올림과 동시에 황제를 압박할 방법을.”
짧은 시간 내에 가장 큰 성과를 내기 위해선 그만큼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나를 정화자로 알린 것이라고.
폴루티아의 원인이 황실이라는 걸 알릴 계획이라면 폴루티아로 인한 멸망으로부터 구해줄 영웅만큼 사람들을 흥분시킬 존재는 없으니.
“어차피 황실의 비밀을 밝힐 거라면 판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해리의 설명에 대공이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데이먼을 잡을 동안 황제를 묶어 둘 카드가 될 것 같아서.”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잖아요.
“재판까지 시간이 촉박해서 말해줄 여유가 없었어. 우리가 불을 지피긴 했지만 그 결과가 늦게 나타날 수도 있었고.”
“아가씨를 위해 한 일이긴 하지만 의뢰를 제멋대로 변경하여 진행한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저희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의뢰 성공률이 높은 곳이라 해도 고객의 의뢰를 제멋대로 변형해서 수행한다면 어느 누가 믿고 맡길 수 있으랴.
설령 결과가 만족스럽다고 해도 말이다.
“솔직히 카펜에 대해 실망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제게 도움이 되었다고는 해도 제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으니까요.”
“송구합니다.”
“경의 생각이 틀렸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의뢰한 일이니 저와 먼저 의논한 후에 계획을 변경하셨어야 해요.”
“앞으로는 아가씨께 먼저 의논드리겠습니다.”
“약속하셨어요.”
“제 신력을 걸고 맹세합니다.”
해리가 제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 잘 지내 봐요.”
내가 손을 내밀자 해리가 수줍게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제게 전할 말씀이 있으시면 이 아이에게 하시면 됩니다.”
해리가 휘파람을 부르자 어디선가 흰 부엉이가 날아왔다.
새끼처럼 몸집이 작은 부엉이는 해리의 손에 얌전히 앉아 나를 쳐다보았다.
제법 매서운 눈빛에 움찔했지만 해리가 뭐라고 속삭이자 내게 살며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내 손길이 마음에 드는지 흰 부엉이가 가만히 눈을 감고 내게 제 몸을 맡겼다.
“카이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녀석이에요.”
“카이.”
내가 부르자 제 이름을 알아들은 것처럼 부엉이가 작게 울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데이먼이 백작저까지 건드렸다는 건 네게 선전포고를 한 것과 다름없다.”
대공의 걱정 어린 말에 카이에게서 손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저도 제 사람들을 건드린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내일부터 무척 바빠질 예정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