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나는 분수대에 세워진 백마 조각상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백마의 눈에 박혀 있던 새파랗게 빛나던 보석은 어디 가고 그 자리에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검은 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요?”
“환영으로 가려져 있어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꽤나 공을 들였군. 폴루티아를 늘리기도 바빴을 텐데.
그만큼 나에 대한 분노가 크다는 건가?
‘그런데 어쩌나.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생겼으니. 배 좀 아프겠네.’
나는 주저 없이 해머를 휘둘렀다.
파사삭!
손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검은 돌이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이후부터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참 많이도 설치해 놨네.’
술법의 매개체는 각 건물을 빙 둘러 설치되어 있었고 정원을 비롯한 부속 시설에도 꼼꼼히 배치되어 있었다.
해머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부수다 보니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술법은 모두 깨진 것 같습니다.”
필립의 말에 나는 해머를 내려놓으며 이마를 훔쳤다.
저택이 넓은 데다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을 피해 작업하다 보니 제법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탓에 나중에는 필립도 손을 태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내 인사에 필립이 묵례로 답했다.
나는 가만히 저택을 바라보았다.
감시를 강화한다고 해도 데이먼이 능력을 사용해 수작을 부린다면 제때에 대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백작저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문득 언젠가 퀘스트 보상으로 받았던 정화석이 떠올랐다.
각종 술법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아이템으로 그를 이용해 방어진을 짜면 그 안에 있는 생명체를 보호할 수 있다고 했었다.
나는 힐끗 필립을 쳐다보았다.
인벤토리에서 정화석을 꺼내는 걸 보일 순 없으니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야겠지?
“점심 즈음 스승님을 뵈러 가려고 하는 미리 전해 주실 수 있으세요?”
“주군께 전령새를 보내겠습니다.”
“고마워요.”
필립이 전령새를 만들어 전언을 전달할 동안 나는 재빠르게 인벤토리에서 정화석을 꺼냈다.
정화석은 총 여섯 개.
아이템 설명을 열어 예시로 제시된 방어진의 종류를 눈으로 훑었다.
‘좋았어.’
때마침 필립도 작업을 마친 터라 그에게 정화석을 보여주었다.
판타시아 궁에 관련된 계시를 완수했을 때 퓨릭서처럼 팔찌에 생긴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다행히 필립은 정화석을 보고 감탄하긴 했지만 별다른 의문은 가지지 않았다.
저택을 빙 둘러 정화석을 심자 각각의 정화석에서 푸른빛이 나며 서로를 잇는 선이 그어졌다.
육망성이 완성되는 순간,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저택 전체를 둘러싸는 결계가 생성되었다.
“이건……대공저 결계만큼이나 강력한 것입니다.”
결계를 살펴보던 필립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스템이 준 거니 허접한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당황스럽긴 했지만 아버지와 백작저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을 거란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뿌듯하게 결계를 바라보았다.
* * *
“스승님!”
나는 정문으로 마중 나온 대공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데이먼이 수작을 부렸다고 들었다.”
“네. 제가 없는 동안 제 사람들에게 술법을 걸었더라고요.”
나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내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으면 내 사람들을 가지고 협박을 했겠어.
“네가 풀려날 때를 대비해 벌인 일이겠지. 어쩌면 백작가를 손에 넣으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내게 누명을 씌운 걸까? 내가 없는 사이 백작가 전체를 손에 쥐고 흔들려고?
이 계획이 요수와 황제 중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목적이 나 하나만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황제도, 요수도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어요.”
요수의 일을 방해하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내심이 바닥났다.
“일단 식사부터 하지. 지금 네 상태로는 해머도 들기 힘들어 보이니.”
길쭉한 손가락이 내 얼굴선을 덧그리듯 뺨과 턱을 스쳐지나갔다.
대공의 체온이 나보다 높은 탓일까.
솜털처럼 가벼운 손짓임에도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홧홧해졌다.
“그 정도는 아닌데.”
그 바람에 내 중얼거림은 공기 중에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차마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순식간에 전경이 바뀌었다.
“여기는…….”
이곳은 대공저에서도 깊숙이 자리 잡은 후원으로 온전히 나를 위해 만들어준 특별한 곳이었다.
왼편에는 다채로운 꽃이 만발한 봄이, 오른편에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겨울이 내려앉은 화원.
마치 누군가가 두 개의 이질적인 공간을 잘라내 이어붙인 것처럼 신비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화원을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처음 이곳을 봤을 때 어찌나 가슴이 설레던지.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선물은 처음이었다.
‘이러니 내가 흔들릴 수밖에.’
나는 슬쩍 대공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눈매에 깃든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처음부터 그랬다.
나를 위협하던 순간에도 태양처럼 타오르는 눈빛만큼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빨려들 것처럼 매혹적이어서 두려웠다.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까 봐.
회귀의 비밀을 밝히고 제단을 부수던 날, 어느새 대공에게 젖어든 마음을 발견한 뒤로는 전심으로 부딪쳐 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래서일까. 빗장 풀린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가고 있었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실내는 답답해할 것 같아서.”
고작 이틀 동안 감옥에 있었던 것뿐인데.
무심한 듯 배려해 주는 모습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리로.”
대공은 언제든 눈을 구경하라며 만들어준 퍼걸러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의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서 앉아.”
대공은 나를 먼저 앉힌 뒤 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뚜껑이 덮여 있던 몇몇 음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갓 요리한 음식처럼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승님, 혹시 요리사를 초빙하셨어요?”
하루 출장을 온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많은 음식이 여기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초빙한 건 아니고. 음식을 공수해 왔다. 황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라니 먹을 만할 거야.”
그가 어서 먹어보라며 눈짓으로 재촉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포크를 들었다.
냄새만으로도 식욕을 돋우는 요리들은 모양도 예쁘게 만들어져 있었다.
꼭 고급 레스토랑에 온 기분이었다.
찬찬히 요리들을 살펴보던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테이블을 꽉 채운 요리들이 하나 같이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서.
로웨나 케인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내가 먹지는 않고 음식들을 쳐다보고만 있자 대공이 요리 중 하나를 내 앞으로 옮겨 주었다.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 음식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니까.
한 입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크기의 살아 있는 게에 달걀물을 부어 잠시 기다린 뒤 밀가루만 솔솔 뿌려 높은 온도에서 튀겨내는 요리.
바로 게 튀김이었다.
‘어떻게 아신 거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물으셨을 때 대답도 못했었는데.’
진짜 로웨나는 살이 찌는 음식이라며 튀김을 먹지 않았다. 게다가 갑각류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하여 나는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티를 내지 못했다.
그뿐인가. 매콤한 음식도 좋아하나 그 또한 로웨나와는 달랐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난 회차들에서는 계기를 만들어 하나씩 내 식성에 맞추어 갔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먹는 즐거움이라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겠나.
아직은 3회차로 회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도 내 식성이 바뀐 걸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대공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음식이 식겠군.”
대공은 내 의문을 알아챘음에도 그에 관한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대신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것이라며 접시를 더욱 가까이 밀어주었다.
‘필립 경이 보고한 걸까?’
호위가 목적인 필립이 내 식성에 관심을 두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게 없으니까.
“……잘 먹겠습니다.”
게를 집어 입 안에 넣고 깨물자 파사삭하는 소리와 함께 내장의 진한 고소함과 갑각류의 감칠맛이 밀려들었다.
“입맛에 맞나 보군.”
왠지 모르게 긴장되어 있던 대공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진짜 맛있어요.”
이 세계에서 와서 여러 튀김을 맛보았지만 오늘 먹은 것이 제일 맛있었다.
내가 엄지를 척하고 치켜들자 대공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스승님도 드셔 보세요.”
“괜찮다. 잘 먹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니.”
“저 혼자 먹기에는 많아요.”
게를 하나 집어 대공의 입가에 가져대자 그가 마지못해 받아먹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파사삭 거리는 소리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어때요? 맛있죠?”
“이런 걸 좋아하는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여기 있는 요리 중에 제가 좋아하지 않는 건 없지만요.”
“다행이군.”
대공은 그 뒤로도 내 앞으로 음식들을 옮겨주며 식사를 이어갔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식사할 수 있었다.
“와아, 진짜 배부르다.”
정신없이 먹었는데도 음식이 워낙 많았던 탓에 결국 남기고 말았다.
대공은 내가 포크를 내려놓자 손짓 한 번으로 테이블을 정리해 버렸다.
“저만 많이 먹은 것 같아요.”
대공도 식사를 하긴 했지만 나에 비하면 적게 먹은 편이었다.
혹시나 대공은 좋아하지 않는 음식들이었나 싶어 괜히 마음이 쓰였다.
“나도 즐겁게 식사했다.”
옅은 미소와 함께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85%가 깜빡거렸다.
덕분에 불편하던 마음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감사드려요.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이제야 봐 줄만 하군.”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던 대공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이 어땠기에 그러지?’
잘 먹고 잘 지냈는데.
얼굴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공이 마뜩잖은 어조로 말했다.
“감옥에 있을 때는 시든 풀처럼 생기가 없더니 오늘은 시체가 걸어오는 줄 알았다.”
요 며칠 관리를 못해서 피부가 거칠어지긴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닌데요.
불퉁하게 대공을 쳐다보자 그가 내 눈가를 살며시 쓸었다.
“눈 밑이 까매져서는. 너구리가 친구하겠더군.”
“그건 어제 밤을 새서. 그래도 아침에 충분히 자고 왔는데.”
주절주절 변명하자 대공이 작게 혀를 차며 내 손을 잡고 신력을 전해주었다.
몇 시간 잠을 자긴 했지만 그럼에도 무거웠던 몸이 금세 가벼워졌다.
‘스승님 신력에 중독될 것 같아.’
붉은 신력이 몸을 감쌀 때면 폭신한 이불에 파묻힌 기분이라 헤어 나오기가 싫었다.
‘조금만 더.’를 외쳐댔지만 아쉽게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은 금방 사라졌다.
더불어 단단히 나를 붙잡고 있던 온기도 멀어졌다.
허전한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슬그머니 대공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러자 그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스승님 손이 따뜻해서요. 감옥이 꽤 추웠거든요.”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불쌍한 척을 하자 삐딱하게 올라갔던 눈썹이 누그러졌다.
혹시라도 손을 뿌리칠까 힘을 준 게 무색하게도 그는 순순히 내게 손을 맡겼다.
손에 꽉 차는 온기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 대공의 머리 위로 호감도 89%가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