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매튜의 손에 들린 물건이 조명을 받아 번쩍하고 빛났다.
“저, 저것은?”
방청석에서 누군가의 경악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황가의 문양인 독수리가 새겨진 황금 패.
바로 사면패를 알아본 것이었다.
황제 역시 사면패를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폐하, 사면패로 청을 올립니다. 로웨나 케인의 혐의를 풀어 주시고 석방해 주십시오.”
매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청하자 황제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그 사면패는 누구의 것인가?”
“케인 영애의 것입니다.”
황제의 매서운 눈초리가 내게 향했다.
“짐은 케인 가문에 사면패를 내린 적이 없다. 설마 위조한 것은 아니겠지?”
아하, 사면패를 가짜로 몰고 가시려고?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참으로 비열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황태자 전하께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황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클로디안, 저 말이 사실이냐?”
“네, 제가 케인 영애에게 사면패를 주었습니다.”
클로디안이 당당하게 답하자 황제가 으득 이를 갈았다.
“무슨 연유로 사면패를 하사했단 말이냐!”
“영애가 무니스에서 저와 제 기사들을 마수로부터 구해주었습니다.”
클로디안이 내게 사면패를 건넨 건 무니스를 정화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고작 몇 가지 질문의 답에 대한 대가로 주었다고 하기엔 타당성이 떨어지니 무니스 일로 바꾸어 말한 모양이었다.
“아바마마께서 항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군주는 신하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며 그들의 충성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 한다고.”
“……정말로 영애가 널 구한 것이냐?”
황태자와 동행한 기사들이 수백인데 그들이 아닌 내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겠지.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건가?
“네. 영애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비단 저뿐만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하퍼 경도 영애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클로디안이 설명하라고 손짓하자 애런이 앞으로 나왔다.
“기사들 모두 마수를 처음 상대하다보니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영애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었습니다.”
애런은 내가 구해줬던 순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대신들은 물론이고 우리 가문 사람들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들이었다.
“역시 제가 모시는 분은 담력부터가 남다르십니다.”
매튜가 나를 툭 건드리며 속삭였다.
“담력뿐만 아니라 실력도 남다르죠. 마수도 내 앞에선 벌벌 떤다고요.”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매튜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네, 제 주군께선 평범하신 게 하나도 없지요. 제가 주군 하나는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드디어 매튜의 인정을 받다니.
가슴이 벅차오르는……뭐, 그 정도는 아니고 기뻤다. 정말로.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손을 들자 매튜가 하이파이브 하듯 손을 마주쳤다.
물론 황제가 보이지 않게 테이블 아래서.
‘자, 그럼 피날레를 장식해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폐하, 사면패가 진짜로 증명되었으니 저를 석방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또한 차후에 같은 죄목으로 단죄하지 않겠다고도 약조해 주십시오.”
“……영애의 혐의가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나 황태자를 구한 공로를 인정해 사면토록 하겠다. 또한 차후에도 같은 일로 죄를 묻지 아니하겠다.”
황제는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면서도 달리 막을 방법이 없는지 내 청을 들어주었다.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의 일그러진 얼굴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나붓이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를 필두로 한 우리 가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올리안 공, 대신들과 함께 바로 회의실로 오도록.”
황제는 싸늘하게 외치고는 다급한 걸음으로 법정을 빠져 나갔다. 대신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황태자는 내게 나중에 보자며 눈짓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물론 애런도 함께.
애런은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며 나를 돌아보았지만 끝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나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매튜가 가져온 자료들을 정리하며 말을 건넸다.
“고마워요. 매튜 덕분이에요.”
“아가씨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두신 덕분이지요. 사면패가 아니었다면 석방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게. 예상은 했지만 황제의 치졸함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아가.”
“아버지.”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아버지를 향해 달려가 안겼다.
“고생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네 잘못도 아닌 것을.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이틀 만에 재판이 열리도록 힘을 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건만.
그 고생을 하시고도 사과를 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찡해졌다.
따뜻한 품으로 파고들자 아버지가 다정하게 다독여주었다.
“어서 가자. 다들 널 기다리고 있단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돌아서는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벨라와 카밀라가 보였다.
“아버지, 잠시만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올게요.”
힐끗 뒤를 돌아본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내주었다.
“벨라, 카밀라!”
“아가씨!”
“로웨나!”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가자 카밀라가 먼저 내게 안겨들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로웨나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카밀라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마워요. 아까 증언해줘서.”
카밀라가 이전 회차들과 달리 대범한 선택들을 했다고는 하나 천성이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협박에도 나를 위해 나서주다니. 그것도 거짓 증언을!
겁 많은 토끼에게 언제 저런 용기가 생겼는지 내가 키운 것도 아닌데 뿌듯하고 대견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카밀라가 시무룩하게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큰 도움이 되었어요. 카밀라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범인으로 낙인찍히게 되었을 거예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에요.”
카밀라의 얼굴이 다시금 밝아졌다.
“벨라도 고마워요. 매튜에게서 이야기 들었어요.”
짧은 시간 내에 소문을 내야 했기에 벨라에게도 도움을 부탁했다고.
“뭘요. 오고 가며 말을 전한 것뿐인데요. 그보다 지금 밖이 난리도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요?”
벨라가 주위를 힐끗대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폴루티아의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황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어요. 귀족 회의도 아마 그 일 때문에 열리는 걸 거예요.”
귀족들의 반발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평민들 사이에서도 큰 반향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폴루티아가 심각한 문제이긴 하죠.”
“시위대가 폴루티아 문제에만 격분한 건 아니에요. 지금 영애를 석방하라고 난리도 아닌 걸요.”
“에?”
거기서 왜 내가 나와?
“지금 사람들이 아가씨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알아요?”
“구원자, 성녀, 마수 슬레이어, 용사 심지어 신의 사자라고까지 불리고 있어요.”
카밀라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곱아가며 자신이 들은 것들을 나열했다.
네? 성녀요? 아니, 마수 슬레이어는 뭐야? 드래곤 슬레이어도 아니고.
게다가 신의 사자라니.
나는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신의 사자가 저기 버젓이 있는데 사칭죄로 신벌이라도 내리면 어떡해!
“대공 전하 이야기는 없어요? 왜 나만 그런 별칭이 붙은 거예요?”
“아, 그게. 저희가 이야기를 퍼뜨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한 소문들이 슬쩍 끼어들지 뭐예요?”
“무슨 소문이요?”
설마 황제가 수작을 부린 건 아니겠지?
“대공 전하께서 폴루티아에 아가씨와 동행하는 이유가 아가씨가 신이 보내주신 정화자라서 그런다는 거예요.”
“전하께서 로웨나를 제자로 삼고 보호하시는 것도 그래서라고.”
벨라의 말에 이어 카밀라가 설명을 덧붙였다.
당황한 나는 눈만 깜박거렸다.
대공과 내가 폴루티아를 정화했다는 소문이 나면 당연히 사람들은 대공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할 줄 알았다.
‘어쩌다 내가 주인공이 된 거야?’
“그 소문이 나자마자 아가씨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이 일파만파로 퍼지지 뭐예요.”
‘카펜! 일 제대로 안 해?’
소문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의뢰했잖아!
“거기에 폴루티아 때문에 황제와 대공이 대립하고 있다는 소문이 기름을 부으면서 시위가 일어나게 된 거랍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하던 그림이 되긴 했는데 영 찜찜하단 말이지.’
제국을 구한 영웅처럼 추앙받는 건 부담스럽다고!
나는 그저 대공이 추앙을 받으면 옆에서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려 했단 말이야.
‘아, 근데 내가 정화자라는 건 누가 낸 소문이지?’
황실이 제 등에 스스로 칼을 꽂지는 않았을 테고.
“벨라, 혹시 그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요?”
“저도 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 않네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소문이라.”
벨라가 곤란한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카펜에 다시 의뢰해야 하나?’
이번에도 제대로 못하면 어떡하지?
업계 1위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이번 일로 금이 가 버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더 알아볼게요.”
내가 소문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벨라가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부탁해요. 나도 따로 알아볼게요.”
카펜만 믿고 있을 수는 없으니 여러 곳에 부탁해 두는 게 좋겠지.
그렇게 두 사람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대공에게로 향했다.
“네 계획대로 되었군.”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아도 돼.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않나.”
다른 이들에겐 무감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게는 금빛 눈동자에 담긴 미안함이 느껴졌다.
“에이, 스승님 때문만은 아니죠. 제가 친 사고가 몇 개인데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속삭이자 대공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야윈 것 같군.”
내게 뻗어진 길쭉한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 뺨을 스쳤다.
그 간질거리는 손길에 이상하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잘 먹고, 잘 잤는데.”
“좋아하는 음식이 있나?”
“네?”
“그러고 보니 네게 식사를 대접한 적이 없군.”
대공이 짐짓 당황스러워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 오면 같이 식사를 하지.”
“……아, 네.”
갑작스런 식사 초대에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로나!”
아버지가 얼른 오라며 손짓하는 게 보였다.
“스승님, 집에 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의논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알았다.”
짧게 대답한 대공이 어서 가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법정을 나와 집으로 돌아갔다.
* * *
벨라와 함께 법정을 나와 복도를 걸어가던 카밀라는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야.”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군요.”
휘청거리는 카밀라를 반사적으로 붙든 사내가 다급하게 사과했다.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아,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갈색 머리의 사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재판 시간에 늦어 서두르다 보니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저도 앞을 잘 살피지 못한 걸요. 마음 쓰지 마세요.”
“상냥한 분이시군요. 너그럽게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지나가시지요.”
사내가 공손하게 옆으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카밀라는 벨라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가는 카밀라의 뒷모습을 사내가 지그시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