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이로써 케인 영애의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보신 이는 다른 사람인가 봅니다.”
매튜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알리바이가 있다고 해도 처소에서 도난당한 물품이 나온 건 어찌 설명할 텐가.”
“그 또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는 바 영애가 훔친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매튜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황제를 곧게 응시했다.
“애초에 황족이 아닌 영애가 비밀 서고에 출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 이건 누군가의 음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케인 영애가 억울한 누명을 쓰기라도 했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라 생각합니다.”
“영애에게 공범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나?”
황제의 시선이 대공에게 향하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공이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설령 제가 비밀 서고의 위치를 안다고 해도 폐하께서 인정한 후계자도 아닌데 어찌 출입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알리바이도 있습니다만.”
“대공, 자네는…….”
황제가 버럭 소리를 치려다 멈칫했다.
신수니, 술법이니 말해봤자 득 될 게 없단 판단이 든 모양이었다.
대공은 마치 이를 노렸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황태자 전하 한 분뿐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황태자가 무슨 연유로 황가의 기록서를 빼돌려 영애의 처소에 숨겨 두었겠나?”
황제가 판사석을 세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비밀 서고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아, 설마 폐하께서 자작극을 벌이신 건 아니시겠지요?”
“감히 짐을 모욕하는 건가?”
황제가 사나운 눈초리로 대공을 노려보았다.
“저는 그저 남은 가능성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대공이 별 일 아니라는 투로 가볍게 대꾸하자 황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짐과 황태자가 기록서를 빼돌릴 이유가 무엇이 있겠나? 어차피 황가의 재산인 것을.”
“그렇다면 더는 재판을 이어가는 게 무의미하겠군요.”
“무의미하다니.”
“폐하께서 공범을 언급하셨다는 건 영애 혼자서는 비밀 서고에 출입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신 게 아닙니까?”
대공을 엮으려다 반대로 허를 찔리게 된 황제가 팔걸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여기 공범이 될 만한 자들은 폐하와 황태자 전하밖에 없으니 재판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혹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 이가 또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요수를 두고 한 말임을 알아챈 황제가 움찔했다.
요수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황실이었다.
그러니 부인하는 게 최선일 터.
“또 모르지. 영애가 술법을 사용했을지도.”
그러나 황제는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질 모양이었다.
“대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제 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여기 이렇게 잡혀 있었겠습니까?”
참다못한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아, 백작은 아직 모르는가? 영애가 요상한 해머를 사용해 마수들을 처리했다던데?”
“알고 있습니다. 하나 그건 여기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과 같은 평범한 무기입니다.”
“그거야 짐이 직접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지. 그 무기에 술법이 걸려 있어 서고 문을 열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아버지는 차마 황제에게 욕을 퍼부을 수 없어 애써 분을 참았다.
꽉 쥔 주먹에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져 나왔다.
한편 대신들은 무기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탄성이 낮게 울렸다.
“아, 대공 전하와 케인 영애가 무니스에서 마수들을 처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과장된 이야기가 아닐는지.”
“대공 전하는 그렇다 쳐도 저 영애가 마수를 처리했다는 게 영 믿기지가 않구먼.”
“허허,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목격자가 수십일세. 그것도 다 기사들이고.”
“허면 대공 전하께서 산불을 진화하셨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입니까?”
“그래, 이 사람아. 황실 기사들이 거짓말을 하겠나.”
대신들이 당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그 소문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겠네요.”
그때 대신들 중 제일 젊은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소문 말인가?”
용케도 그 말을 알아들은 이가 묻자 순식간에 대신들의 관심이 젊은 대신에게 쏠렸다.
“그, 대공 전하와 케인 영애가 함께 폴루티아를 정화하고 다니신다는…….”
“……폴루티아가 정화가 되는 곳이었단 말인가?”
“그게 소문에 언급된 지역들이 실제로 정화되었다며 증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젊은 대신의 말에 다들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러면 폴루티아가 왜 발생되었는지 그 이야기도 모르시는 겁니까?”
“폴루티아의 발생원인은 학자들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대신은 내가 매튜에게 알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읊기 시작했다.
황제가 폴루티아 일로 대공과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도.
대신들 근처에 앉아 있던 우리 가문 사람들 사이에 갑자기 동요가 일었다.
아마 저들의 대화가 들린 모양이었다.
그 중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만 담담했다.
“조용! 지금 재판 중임을 잊었는가?”
황제가 판사봉을 탕! 탕! 두드리며 호통을 치자 흠칫 놀란 대신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대화 내용이 들리진 않았을 텐데.’
나야 레벨이 높은 탓에 저들의 말소리가 잘 들리지만 황제는 평범하지 않나.
멀리 있어도 자기 욕하는 건 안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황제의 표정이 불쾌하게 변한 걸 보니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긴 한 것 같았다.
‘매튜가 일을 잘한 모양이네.’
이틀 사이에 대신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면 엄청나게 인력을 풀었다는 뜻이었다.
당장 칭찬을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앞에 황제가 있어서 참았다.
“마수를 처리할 수 있는 무기라 하여 비밀 서고 출입을 의심하신다면 여기 있는 황실 기사들의 검 또한 모두 검사해야 할 것입니다.”
매튜의 반박에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영애의 무기는 검이 아니지 않나.”
“해머나 검이나 다 무기의 한 종류들이지요. 다를 바 없습니다.”
“평범한 무기라면 여기서 직접 보여줘도 되지 않겠나.”
“영애는 지난 며칠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무기를 소지할 수 없다는 건 폐하께서 더 잘 알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며 매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영애는 무기를 따로 들고 다니지 않아도 소환이 가능하다던데.”
저건 어디서 들은 것일까.
내가 해머를 소환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이는 몇 명 되지 않는데.
무니스에서는 해머를 소환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까.
‘요수가 말해줬나 보군.’
아직 내 해머에 대한 관심을 접지 않은 모양이네.
용을 써봐라. 그런다고 가질 수 있을 줄 아나.
“증거가 있습니까?”
매튜의 물음에 황제가 비웃듯 입매를 휘었다.
“무니스에서 목격한 기사들이 있네. 증언을 들어볼 텐가?”
매튜가 어떻게 된 일이냐며 내게 눈짓으로 물었다.
나는 조작된 것이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매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반박하려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대공이 신검을 소환했다.
“헉!”
여기저기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신들은 물론이고 무니스에 가지 않았던 황실 기사들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저, 저건 오러인가?”
“아니, 오러와는 다른 기운인 것 같네.”
오러 유저인 군부대신이 금세 대공의 신력을 분별해 냈다.
“그럼 저게 뭐란 말인가?”
“글쎄…….”
말끝을 흐린 군부대신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대공의 신검을 살폈다.
“그 목격자들 말입니다. 제 검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닐지.”
대공이 더욱 보란 듯이 붉은 신검을 들어올렸다.
황실 기사들이 홀린 것처럼 신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공이 신력을 사용하는 걸 처음 본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가 금세 표정을 추슬렀다.
그의 녹안이 흔들리는 걸 보니 대공이 어떤 존재인지 이제 조금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폐하의 말씀대로라면 제가 이걸로 서고를 열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
대공이 황제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지금 다 같이 가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대공.”
황제가 화를 참듯 억눌린 음성으로 대공을 불렀다.
“고작 이런 무기로 파훼될 결계라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닙니까? 명색이 아기오 신이 직접 내려 보낸 신의 사자가 만든 것인데 말입니다.”
여기서 황제가 계속 제 주장을 고집한다면 이는 신을 모욕하는 것이고 신의 수호를 받고 있다던 황실의 권위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기오 신이 직접 내려 보낸 신의 사자가 버몬트 대공이라는 것도 알리게 될지 몰랐다.
황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공만 노려보자 대신들이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비밀 서고의 결계는 황제와 황태자의 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황제가 바뀌면 그에 따라 출입 가능한 대상이 바뀌지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까? 폐하.”
결계를 만든 당사자 앞에서 부인해 보라는 말에 황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대공의 말이 맞아. 나도 그렇게 알고 있네.”
클로디안의 나지막한 음성이 어색한 침묵을 갈랐다.
황제의 매서운 눈초리에 클로디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바마마, 저는 그저 객관적인 사실만 확인해 준 것뿐입니다.”
“황태자는 짐이 허락할 때까지 발언하지 말도록.”
클로디안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며 황제 몰래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나름 열심히 노력했으니 잘 봐달란 뜻이었다.
그것 좀 나섰다고 생색은. 제대로 마무리도 못했으면서.
심드렁하게 반응하자 그가 곤란한 척 웃음을 흘렸다.
‘자기 일 아니라고 여유로운 거 봐.’
아무리 내게 사면패를 줬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한 거 아니니?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판사석 근처에 있는 출입문이 열렸다.
그곳은 방청객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다급하게 들어온 시종이 시종장에게 귓속말을 전하자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다들 긴장한 채 정면을 주시했다.
시종장이 빠르게 걸어가 황제에게 소식을 전하자 황제가 얼굴을 찌푸렸다.
“귀족들이 무슨 일로?”
또다시 시종장이 뭐라 말하자 황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올리안 공, 지금 긴급 귀족 회의가 소집되었다는데 자네도 알고 있던 일인가.”
올리안 공작가는 개국 공신 가문으로 공작은 재상을 맡고 있었다.
“저도 금시초문입니다.”
올리안 공작이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재판을 빨리 마무리 짓도록 하지. 대신들은 재판이 끝나는 즉시 바로 짐을 따르도록.”
“알겠습니다.”
올리안 공작을 필두로 한 대신들이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대신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고 애썼지만 명확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짐작되는 것이 있는지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자,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이 정도면 내 무죄를 충분히 피력했으니 사면패를 쓴다 해도 명성이 크게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와 매튜는 서로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폐하, 지금까지 케인 영애의 처소에서 도난품이 나온 것 외에는 영애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애의 무죄를 입증할 증언들이 나왔지요. 하여 영애의 석방을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도난품이 처소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영애의 혐의를 입증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나?”
매튜의 요청에 황제가 바로 반박했다.
“앞서 논의된 것처럼 도난품이 처소에서 발견된 일에는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있습니다. 이미 영애의 알리바이가 입증된 상황에서 그 일은 증거 능력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으니 영애에 대한 혐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니 영애가 도난품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감옥에 구금할 것을 명령한다.”
“폐하! 구금이라니요? 제 딸의 알리바이가 이미 밝혀졌고 비밀 서고에 출입할 수 없음도 확인되지 않았습니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버지가 황제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케인 백작,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곳은 신성한 법정이다. 자중하게.”
황제의 질책에 아버지가 방청석의 의자를 부서질 듯 쥐었다.
당장이라도 황제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기세가 살벌했다.
이러다간 무슨 사단이 일어날 것 같아 얼른 매튜에게 눈짓했다.
그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