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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11)화 (111/140)

111화

사람들의 시선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붉은 장발을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대공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는 황제보다 늦게 입장했으면서도 사죄의 말 한 마디 없이 방청석 맨 앞자리로 향했다.

황실 기사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대공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만 꽂혀 있었다.

나를 샅샅이 살피는 눈길이 느긋한 걸음과 달리 제법 분주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흔들고 싶었으나 뒤통수에 박히는 황제의 따가운 시선에 애써 참았다.

대공은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황제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공이 들어올 때부터 날이 서 있던 황제의 눈빛이 한겨울의 삭풍처럼 매서워졌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립에 사위가 얼어붙었다.

황실 기사들은 물론이고 참석자들 대부분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치를 보고 있을 때.

황태자의 미성이 무거운 적막을 갈랐다.

“아바마마, 이만 재판을 시작하시지요.”

힐끗 황태자를 쳐다본 황제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혀를 찼다.

“모두 참석한 것 같으니 재판을 진행하도록 하지.”

유독 ‘모두’에 강세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지만 나나 대공이나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신년제 무도회가 있던 날, 황실 비밀 서고에 있던 귀중한 역사 기록과 보물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틀 전 로웨나 케인의 처소에서 도난당한 기록서를 찾았지.”

황제가 내 방에서 찾았다는 기록서를 들어보였다. 그에 방청석이 한차례 술렁거렸다.

“확실한 증거가 나왔으니 바로 처벌을 해야겠지만 내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변호할 기회를 주려 한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지.

가짜 증거를 심어 놓고 자비를 운운하는 황제나 진짜 범인임에도 억울하다 열을 내고 있는 나나 둘 다 코미디였다.

“로웨나 케인, 네 죄를 인정하는가.”

“아니요. 저는 황실 비밀 서고의 위치도 모르고 보물을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황제는 대공이 범인이라고 믿고 있으니 괜히 움츠러들 필요가 없었다.

“네 처소에서 이렇게 증거가 나왔는데도 발뺌할 생각인가?”

“폐하, 영애의 처소에서 도난품이 나왔다고는 하나 그게 영애가 훔쳤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매튜가 나 대신 나서서 반박했다.

“영애의 방에서 도난품이 나오는 걸 목격한 자들이 많다. 그런데 증거가 되지 못한다니. 그 무슨 억지인가.”

“누군가 그 물건을 몰래 숨겨놓았을 수도 있지요.”

“지금 황실 기사단을 의심하는 건가?”

“저는 황실 기사단이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라고 말씀드렸지요.”

황제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매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영애의 처소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이 놓고 간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애런이 움찔하는 게 보였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래서 그 도둑을 잡았나?”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도 의심할 수밖에요.”

“입증할 수도 없는 도둑 건으로 혐의를 무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백작저에 도둑이 들었다는 건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매튜가 기다렸다는 듯 슐레만 경과 조이를 증인으로 세웠다.

내가 매튜에게 알려준 건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과 그 날짜 그리고 대공 전하가 붙여준 비밀 호위가 나를 보호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침입자가 애런이었다는 것과 그가 무엇을 노렸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증인으로 나왔다는 건 매튜와 사전에 입을 맞추었다는 뜻이었다.

“모두 백작가에 소속된 이들이 아닌가. 이들의 증언을 어찌 믿을 수 있겠나?”

“그건 황실 기사들의 증언도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잠시 황제와 매튜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매튜 고든, 그대 가문의 충정을 생각해 이번은 넘어가지만 더는 선을 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황제의 으름장에 매튜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폐하께서 어떤 근거로 체포령을 내리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는 증거품도 나오지 않았잖습니까.”

“케인 영애가 황실 비밀 서고에 들어가는 걸 본 목격자가 있다.”

도서관이든 황제의 침실이든 나와 대공을 목격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누굴 증인으로 세우려는 거지?’

비밀 서고의 위치를 공개하지 않고는 어려울 텐데.

“누구입니까? 이 자리에서 증언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매튜의 물음에 황제가 느긋하게 손을 올려 자신의 오른편을 가리켰다.

“황태자가 그 목격자이네. 클로디안, 네가 본 것을 말해보거라.”

클로디안이 언급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하고 돌아갔다.

‘설마 그날 날 본 것인가.’

찰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야. 평범한 인간이 시스템의 스킬을 간파할 리 없어.’

만약 나를 알아봤다면 그렇게 가진 않았겠지. 그날 클로디안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었다.

나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표정을 관리했다.

클로디안과 내 시선이 잠시 허공에 맞물렸다.

그를 알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던 건지 어렵지 않게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사면패가 있으니 자신이 나서도 문제없을 거라는 뜻인가.’

그렇다고 해도 거짓 증언이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신년제 무도회가 열리던 도중 잠시 비밀 서고에 들렸는데 근처에서 케인 영애를 보았다네.”

“황태자 전하, 송구하지만 정확히 어디에서 보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매튜가 예리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면 비밀 서고의 위치도 유추할 수 있지 않겠나?”

클로디안이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유추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비밀 장치로 숨겨져 있을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부분을 짚어보도록 하지요. 분명 전하께서는 케인 영애를 비밀 서고 근처에서 보셨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네.”

“그 사실만으로는 영애가 비밀 서고에 침입했다는 걸 입증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클로디안이 빙긋 웃었다.

“영애를 본 구체적인 장소를 말해줄 순 없지만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영애를 본 것은 내궁이었어.”

내가 내궁에 있었다는 사실에 내 혐의를 믿지 않았던 대신들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물론이고 나도 영애의 출입을 허가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궁에 있었던 걸까.”

“내궁 경비병들이 있는데 어떻게 영애가 들어갈 수 있었단 말입니까?”

매튜가 말도 안 된다며 반박했다.

“나도 그게 이상해. 경비병들은 영애를 보지 못했다고 하거든. 나는 분명히 봤는데.”

“잘못 보신 건 아닙니까?”

“아니야. 분홍색 머리가 어디 흔한가.”

“설사 전하께서 제대로 보신 거라고 해도 영애가 내궁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는 영애에게 주어진 혐의가 입증되지 않습니다.”

“그래, 본 것만으로는 입증이 되지 않겠지.”

클로디안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의 표정이 굳었다.

반면 아버지와 우리 가문 사람들의 얼굴엔 희망이 어렸다. 그러나 이어진 클로디안의 말에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말이야. 내가 서고에 들어갔을 때는 이상이 없었거든? 그런데 영애를 보고 혹시나 싶어 다시 서고로 갔더니 보물이 사라져 있지 뭔가. 그러니 영애를 의심할 수밖에.”

“그날 내궁에 드나든 이들이 또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서고를 오간 사이에 내궁에 출입한 자들은 없었어. 자, 확인해 보게.”

클로디안이 내궁 출입 기록을 매튜에게 건네었다.

“전하의 말씀대로군요.”

빠르게 기록을 확인한 매튜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알겠나? 왜 케인 영애의 처소를 수색하고 영애를 체포하라고 했는지?”

네. 억지로 끼어 맞추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 각본을 쓴 사람에게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전하의 말씀에는 몇 가지 모순점이 있습니다.”

매튜가 예리한 눈초리로 클로디안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인가?”

“첫 번째는 황족만 아는 비밀 서고의 위치를 케인 영애가 어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건 알려준 사람이 있겠지. 나와 아바마마 외에도 비밀 서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또 있으니.”

클로디안은 말을 하면서 대공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에 사람들의 시선도 대공에게 향했다.

대공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사 영애가 서고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황족만 출입 가능한 곳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닌지.”

“특별한 물품을 사용했을지도.”

매튜의 의문에 방청석에 있던 대신들이 저마다의 추측을 내놓았다.

황제와 황태자 외에는 비밀 서고의 구조를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대공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자기들끼리 수군대던 대신들이 대공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말이 되어야 맞장구를 치지. 이건 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지 않는군.”

대공의 비아냥에 황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황제는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비밀 서고의 설계자가 대공인데.

“저어, 대공 전하.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요?”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던 대신들 중 하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실의 비밀 서고는 제국의 수호자가 초대 황제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신이 주신 권능으로 결계를 만들고 황제와 황제가 인정한 후계자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해 두었지.”

“수호자라면, 건국신화에 나오는 그 신수를 말씀하시는 건가?”

“그 분은 아기오 신께서 직접 세상에 보내주신 신의 사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분이 만든 곳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열 수 없을 텐데, 어찌 어린 영애가…….”

대신들이 놀란 얼굴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일별한 대공이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일개 귀족 영애가 침입했다? 대마법사도 뚫지 못하는 곳을?”

대공이 우습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이 사건의 범인을 케인 영애라 주장하시는 것인지요?”

“짐도 그 점이 의문이 들긴 하네만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나. 황태자의 증언도 있고.”

황제가 화를 억누른 음성으로 대꾸했다.

“황태자 전하, 케인 영애를 본 시각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매튜의 물음에 클로디안이 즉각 대답했다.

“대략 9시쯤 되었던 것 같네.”

“그 시각에 케인 영애는 나와 함께 있었다.”

불쑥 끼어든 대공의 말에 방청석이 한차례 술렁거렸다.

“그럼, 대공 전하께 여쭙겠습니다. 그 시각, 영애와 함께 어디에 계셨습니까?”

“휴게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두 분만 계셨던 겁니까?”

“그래. 아, 잠시 우리가 있던 휴게실에 들렀던 이가 있는데.”

“저, 저요. 제가 두 분과 함께 있었어요.”

방청석에 앉아 있던 카밀라가 손을 들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밀라가 왜……?’

퀘스트를 완료한 뒤 바로 대공저로 갔기 때문에 카밀라와 만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왜 증인으로 나서는 것일까.

매튜에게 어찌된 일이냐고 눈짓하자 그가 눈을 찡긋거렸다.

사전에 약속된 일이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서로 짜고 거짓 증언을 하는 거라는 말이었다.

‘내겐 알리바이가 생겨 좋지만 카밀라는 위험 부담이 클 텐데.’

내 걱정을 알아챈 것인지 매튜가 염려하지 말라며 빙긋 웃었다.

평소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매튜라면 빈틈없이 방비해 놓았겠지만 불안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다.

“공녀, 지금 케인 영애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황제의 날 선 시선에 카밀라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펴며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네. 황태자 전하와 함께 휴게실에 갔는데 전하께서 잠시 볼 일이 있으시다고 나가셨어요. 혼자 기다리기 지루해서 복도에 나갔다가 케인 영애와 대공 전하를 뵈었지요.”

그리고 우리의 초대를 받아 잠시 휴게실에 같이 있다가 돌아왔다고 설명했다.

“그때가 9시쯤이었던 것 같아요.”

“체임버 공녀, 법정에서 거짓을 고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겠지?”

황제의 엄포에 카밀라의 연회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두 손을 꼭 맞잡은 그녀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직 진실만을 말했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걸 수 있어요.”

카밀라가 맹세하듯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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