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는 재빠르게 표정을 풀었다.
‘들켜선 안 돼.’
내가 반응을 보이면 요수의 귀에도 들어갈 터.
요수의 허점을 찌를 수 있는 패를 내보일 순 없지.
복면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돌멩이를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꽤나 단단해 보였던 돌멩이는 과자처럼 쉽게 부서지더니 이내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동시에 검은 결계가 감방을 둘러쌌다.
‘하,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데 어쩌나. 이 결계는 내게 아무런 힘도 못 쓸 텐데.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복면인은 문을 닫고 사라졌다.
나는 불청객이 완전히 떠난 걸 확인하고는 침대에 털썩 앉았다.
‘황제가 원하는 게 알껍데기일까? 아니면 황가의 기록일까?’
기록은 치부를 감추기 위해 필요하다 쳐도 알껍데기는 왜?
이미 대공이 알게 된 이상 다시 되찾아 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뭐가 됐든 황제는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나를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
나는 느긋하게 침대 헤드에 기댔다.
그때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며 허공에서 대공이 나타났다.
“스승님!”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자 대공이 가만히 나를 살폈다.
“괜찮은가?”
“다친 곳은 없는지 물으신다면 괜찮아요. 기분은 불쾌하지만.”
세세하게 나를 살피던 대공은 내가 정말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굳은 표정을 풀었다.
“황제가 왔다던데. 벌써 간 건가?”
“들으셨어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이 은신한 채 곁에 있었으니 바로 보고를 한 모양이었다.
“무력을 쓰진 않았어요. 협박은 했지만. 아, 선물도 주고 갔어요. 이거요.”
내가 방에 둘러진 결계를 가리키자 대공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가볍게 손을 한 번 내젓자 순식간에 결계가 사라졌다.
“와, 살 것 같다. 악취 때문에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요.”
정말로 코가 썩어 들어가는 줄 알았다.
“왜 바로 처리하지 않고? 네 해머로 충분히 가능할 텐데.”
“확실하지 않아서요. 시도해 본 적이 없거든요.”
레벨이 오르며 해머의 등급도 A가 되어 위력이 강해졌지만 쉬이 도전할 수가 없었다.
해머로 요수의 결계를 처리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퀘스트로도 시도해 본 적이 없지 않나.
“네 해머의 신력이 강해졌으니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럼, 다음엔 시도해 볼게요.”
대공이 가능하다니 문제는 없겠지.
다만, 요수가 내 해머의 위력을 낱낱이 알게 되는 게 꺼려지긴 했다.
‘뭐, 그건 상황에 따라 판단하면 되겠지.’
“이만 가자.”
대공이 갑자기 내 손을 붙들며 신력을 일으켰다.
“자, 잠깐만요. 어디로 가시려고요?”
“내 저택으로.”
“거긴 왜요?”
“백작저로 가면 황제가 또 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대공을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여기 더 있을 필요 없다. 황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어떻게 처리하시려고요?”
“경고를 했음에도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대공의 금안이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혹시 판타시아를 처리하실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눈빛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나쁜 놈인 건 맞지만 거기 있는 여인은 무슨 죄란 말인가.
게다가 만약에라도 그 여인이 죽기라도 한다면 황제의 눈이 뒤집힐 텐데 그 뒷감당은 어찌하려고.
대공은 건드리지 못한다 해도 우리 가문은 아니란 말이다.
“스승님, 신벌을 왜 받으셨는지 잊으셨어요? 지금도 살의를 드러내면 고통을 받으신다면서요?”
“내가 직접 죽이는 게 아니지 않나. 판타시아는 금기로 만들어진 것이니 아기오 님께서도 개입하지 않으실 거다.”
“그렇지만 황제는 못 죽이시잖아요. 황제가 그 분풀이를 저와 제 가문에게 할 텐데 그건 어떻게 막으시려고요?”
“죽이지 않고도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염려하지 말라며 대공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스승님, 이번에는 제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황제가 이리 대담하게 나온 걸 보면 대공이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공의 협박이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연인을 살리겠다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자가 아닌가.
그런 자가 요수를 버리고 대공의 편에 서겠는가.
‘거기다 황태자도 변수야.’
아무리 황태자가 정의로운 편이라고 해도 혈육의 고통 앞에서도 이성적일 수 있을까.
그가 대공을 등지고 요수와 손을 잡는다면 그 또한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요수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황가를 상대할 때 신중해야 해.’
“황제는 내 경고에도 너를 체포했지. 논리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황태자 전하가 제게 사면패를 주었어요. 그걸 제시하면 황제도 저를 붙잡아 둘 수 없을 거예요.”
“황태자가? 무슨 이유로?”
나는 판타시아 사건 이후 황태자를 만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간교한 것이 역시 아카르트의 핏줄답군.”
대공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입매를 비틀었다.
“스승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사면패를 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클로디안이 어떤 심정으로 내게 사면패를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황태자도 믿으면 안 된다. 아카르트 황족들은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족속들이니.”
“아직 스승님께 찾아오지 않았나요?”
대공은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냉소를 지었다.
황가의 저주를 풀고 싶어 대공에게 잘 보이려 애썼으면서 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니.
물론 절망적인 현실에 충격을 받고 모든 걸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렇게 대공에게 매달렸을 정도면 적어도 사죄는 하러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는 황태자가 널 봐주었다만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언제 어떻게 돌아설지 모른다.”
“잘 알고 있어요. 제가 이미 경험해 봤잖아요.”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를.
씁쓸하게 말하자 대공의 미간이 좁혀졌다.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는 눈길에 걱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스승님께 털어놓은 후부터 한결 편해졌어요.”
그저 과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악몽을 꾸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에 내 고통을 이해해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끔찍했던 과거를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도 당신 때문에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새삼 대공이 내 안에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참지 마라. 괜찮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지 마.”
대공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체온보다 뜨거운 손이 닿자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말해도 돼. 그놈들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줄 테니.”
“그러다 또 아프시려고요.”
“네가 아픈 것보단 내가 아픈 게 낫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 내 가슴에 콕 박혀 들었다.
뜨거운 코코아에 넣은 마시멜로처럼 마음이 녹진하게 녹아내렸다.
“저도 스승님이 아프신 건 싫어요. 그러니 이번엔 제 계획대로 해 봐요.”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대공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라.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는 씨익 웃으며 내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 * *
그 후로 이틀이 지난 오늘.
드디어 내 재판이 열렸다.
보통 구속되고 재판이 열리기까지 최소 한 달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법정으로 들어가자 각부 대신들과 우리 가문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벨라와 카밀라도 보였다.
그 외의 방청객은 없는 걸 보니 출입을 제한한 모양이었다.
“로웨나.”
카밀라가 울먹이는 얼굴로 내게 다가오려다 기사들에게 제지당했다.
벨라는 놀란 카밀라를 다독이며 입 모양으로 내게 말을 전했다.
‘잘될 거예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로나!”
카밀라를 막았던 황실 기사들은 내게 달려오는 아버지만큼은 매몰차게 막지 못했다.
“괜찮으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저는 잘 지냈어요.”
시스템도 눈치가 있는지 퀘스트도 내려오지 않아서 정말 푹 쉬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괜찮아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며칠 사이에 야위었구나. 설마 저들이 널 굶긴 건 아니겠지?”
아버지가 나를 데려온 기사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택에 있을 때에 비해 식사가 부실하긴 했지만 꼬박꼬박 거르지 않고 잘 먹었던 나로선 조금 민망했다.
“저는 잘 먹고, 잘 잤어요. 저보단 아버지 얼굴이 더 안 좋아 보이시는데요? 잠은 제대로 주무신 거예요?”
아버지 눈 밑에 자리한 짙은 그늘이 마음에 쓰였다.
“나는 괜찮으니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백작님, 이만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재판을 곧 시작해야 합니다.”
나를 데리고 온 황실 기사가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아가, 걱정하지 말 거라. 다 잘될 거다.”
아버지는 나를 다독이고는 마지못해 자리로 돌아갔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매튜는 조용히 나를 따라왔다. 그가 내 변호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법정 중앙에 마련된 피고인석으로 향하자 누군가의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법정 왼편, 황족 전용 좌석에 앉아 있는 황태자가 보였다.
그의 호위를 맡은 애런은 그 뒤에 서 있었다.
애런은 임무를 수행 중인 탓에 내게 올 수 없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황태자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황태자를 향해 예를 갖추어 인사하자 그가 묵례로 화답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여기 서 있으면 됩니다.”
황실 기사가 피고인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하자 기사들 중 두 명만 남고 나머지는 벽면으로 물러났다.
“아가씨, 만반의 준비를 해 왔으니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매튜가 내 옆에 서며 가져온 자료들을 꺼냈다.
“내가 부탁한 물건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해줘요.”
그냥 사면패를 던져주고 여길 나가고 싶지만 가문에 불어 닥칠 후폭풍을 생각하며 참았다.
“그걸 쓰지 않고도 해결된다면 좋겠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에게선 일말의 기대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 방청석을 살폈다. 아직 대공은 보이지 않았다.
“후우.”
땀이 찬 손을 옷에 문지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고는 하나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카르트의 태양, 황제 페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이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황제는 판사석에 올라가 장내를 죽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자 딱딱한 입매가 살짝 비틀어졌다.
“짐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게로군.”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나와 황제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똑똑히 들렸다.
‘내가 왜 당신 조언을 들어?’
애초에 남의 물건을 훔친 도둑은 당신들이잖아.
나는 속으로 열심히 욕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송구하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다들 착석하도록.”
황제가 먼저 자리에 앉자 다른 이들도 순차적으로 앉았다.
“로웨나 케인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오늘 재판은 황실 보물과 관련된 바 짐이 직접 재판을 진행하겠네.”
황실 보물은 핑계고 그냥 나를 제 마음대로 처리하고 싶어서겠지.
황제의 시커먼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 비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스승님은 언제 오시는 거지?’
분명 재판에 참석하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초조하게 문을 주시하고 있는데 벌컥 하고 법정 출입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