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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09)화 (109/140)

109화

감방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지난했다.

황제는 작정하고 분풀이를 하려는 듯 나를 일반 구역에 가두라는 명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매튜와 감옥 소장과의 논쟁이 상당히 오랜 시간 이어졌다.

매튜는 법 지식은 물론이고 우리 가문의 인맥과 권력, 심지어 고든 가문의 힘까지 모두 동원해 소장을 압박했다.

결국 매튜의 집요함과 끈질김에 백기를 든 소장이 황제에게 사정을 알렸고 황제가 한 발 물러섰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비난 받는 건 황제니까.’

반역죄를 짓지 않은 이상 귀족을 일반 구역에 가두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정받은 감방은 사용인들의 방처럼 크기가 작고 가구라고는 1인용 침대가 전부인 곳이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긴 했지만 귀족 저택에 있는 것에 비해 형편없이 비좁았다.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하마터면 창살로 된 감옥에 갇힐 뻔 했으니.’

이만하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겠다 생각한 나와 달리 매튜는 감방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귀족 구역에 배치되었다고 해도 감옥은 감옥이었으니까.

“아가씨,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버텨주십시오.”

매튜는 이곳에 올 때보다도 더 살벌한 눈빛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으로 방문한 이는 애런이었다.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는지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은 애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모르고 계시던 일이었어. 뒤늦게 아시고 날 보내신 거야.”

“이래서 대공 전하와 거리를 두라고 했던 건데.”

“걱정하지 마. 반드시 널 꺼내줄게. 황태자 전하께서도 도와주신다고 하셨어.”

걱정을 쏟아내던 애런은 이내 나를 구해주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클로디안의 도움으로 나를 면회할 수는 있었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기에 애런은 금방 돌아갔다.

“아, 피곤하다.”

나는 침대에 털퍼덕 누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만 한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야.’

사실 여길 탈출하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아버지와 가문 때문에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띠링!

『명성이 –20 되었습니다.

현재 명성 : 430』

“아악!”

내가 어떻게 해서 올려놓은 명성인데!

나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오늘 나를 본 사람들이 몇 명 되지 않아서 이 정도지.

조만간 내가 감옥에 갇혔다는 게 알려지면 명성이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테다!”

황제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이 사실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으실 거야.’

문제는 황제인데.

자칫하면 자신들의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을 퍼트릴까.

요수가 나를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케인 백작가도 버릴 생각을 했던 황제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맞불은 준비되어 있으니 그사이 내 명성이 떨어지지 않게 최대한 방어를 해야 했다.

“저기, 필립 경. 어디 계신가요?”

나는 문가에 서서 필립을 불러보았다.

어디든 나를 따라올 수 있다고 했으니 문 근처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그는 감방 안에서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던 잿빛 벽면이 일렁이더니 필립이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헉, 내가 발악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순간 얼굴에 열이 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불 속으로 숨고 싶었지만 내가 불러놓고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아니, 집에 있을 땐 밤에 잘 때만 방 안에서 호위했잖아.’

아직 잠잘 시간도 아닌데 왜 안에 있는 거냐고.

“찾으셨습니까?”

민망함에 시선도 맞추지 못하는 나와 달리 필립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 반응에 안심이 되면서도 혼자만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다시금 얼굴에 열이 올랐다.

“큼큼, 저 서신을 전할 방법이 없을까요?”

아무리 귀족 대우를 해준다고 해도 이곳은 감옥이었다.

필기구가 있을 리가. 거울도 없는 곳인데.

필립 역시 가지고 있지 않은지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게 서신 내용을 말씀해 주시면 다른 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요?”

필립 경이 아는 사람도 있어요?

“아, 저 말고도 주군을 모시는 이가 또 있습니다.”

“혹시 그 분도 신수이신가요?”

“네.”

허, 지난 회차에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신수를 이번에는 세 명이나 만나게 생겼네.

“그런데 저는 왜 한 번도 못 뵈었죠?”

대공저에서 다른 사람을 본 적은 없는데.

“그 친구는 외부에서 일하고 있거든요.”

“외부요?”

“네. 그 친구에게 말을 전하면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곳에 서신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다른 신수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필립이 말을 아끼는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나중에 스승님께 여쭤봐야지.’

“그럼,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피니티아 화원’으로 서신을 보내주시면 돼요.”

“……피니티아 화원,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왠지 모르게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감옥에 갇힌 마당에 화원에 서신을 보내달라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겠지.

“네, 카펜에 의뢰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대공에게 회귀한 것까지 털어놓은 마당에 카펜 의뢰 방법쯤이야 이야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아, 카펜이요.”

필립이 녹슨 양철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말했다.

카펜을 모르는 건가?

카펜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필립이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내용으로 서신을 보내면 될까요?”

“제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최대한 알려지지 않게 손을 써 달라고요. 비용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제 평판에 흠집이 나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필립은 곧바로 신력으로 만든 노란색 전령새에게 내가 한 말을 전하고는 날려 보냈다.

방에 난 창이라고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난 손바닥만 한 창문이 전부였다.

게다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기에 전령새가 나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와 필립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신력으로 만들어진 전령새는 어느 곳이나 통과할 수 있었으니.

유유히 날아 벽에 스며들 듯 사라진 새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창문이나 천막을 통과하는 건 자주 봤지만 이렇게 두꺼운 돌벽은 처음이었다.

‘정말 신기한 존재라니까.’

해머의 신력으로 나도 전령새를 만들 순 없을까.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필립에게 눈짓하자 그가 얼른 몸을 숨겼다.

나는 기감을 예리하게 세우며 문을 주시했다.

‘누구지?’

경비병들은 구역이 나뉘는 입구에만 있기 때문에 면회나 식사 시간 외에는 복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그런데 꽤나 여러 명의 움직임이 읽혔다.

‘발소리를 죽인 걸 보니 정상적인 방문은 아니겠군.’

철컥.

이내 잠금장치가 풀리며 무거운 철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을 보고 반사적으로 해머를 소환하려던 나는 그들 뒤로 나타난 누군가를 보고 멈칫했다.

여유롭게 걸어 들어온 자는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들어오자 복면인들이 출입문을 닫고 그 앞에 섰다.

나는 긴장한 채 눈앞의 사내를 살폈다.

‘요수는 아니야.’

악취도 나지 않았고 체격도 달랐다.

복면인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나타날 정도면 권력자라는 뜻일 터.

체격은 무사처럼 좋고 기세도 강한 편이었으나 함께 있는 복면인들에 비하면 세월에 무뎌진 칼날 같았다.

힐끗 복면인들을 훑어보니 그들 중 몇몇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비스듬히 입매를 올리며 모른 척 물었다.

“누구십니까?”

“두려워하지 않는군.”

후드를 쓴 이에게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은 죄가 없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역시나 맹랑하군.”

그가 후드를 벗자 예상했던 얼굴이 나타났다.

“아카르트의 태양을 뵙습니다.”

예법에 따라 인사하자 황제가 삐뚜름하게 미소 지었다.

“짐인 줄 알고 있었던가.”

“목소리를 듣고 폐하이신 줄 알았습니다.”

매서운 눈초리에도 담담하게 황제를 올려다보자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이 상황에서도 당당한 걸 보니 믿는 구석이 있나보군. 대공이 구해줄 거라 생각하는가.”

“대공 전하가 저를 많이 아끼시지만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많이 변했다더니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군.”

아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그런 말씀을 하시나.

요즘 내 평판이 얼마나 좋은데.

나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폐하를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친히 찾아와 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왜? 짐에게 살려달라고 빌기라도 하려고?”

하, 괘씸죄로 단단히 찍혔나 보네.

대공을 어찌할 수 없으니 내게 분풀이를 하는 거겠지.

어쩌면 요수가 일련의 사건들에 나도 연루되어 있다고 말해 줬을지도 모른다.

요수라면 판타시아와 추모탑에 남아 있던 신력의 흔적과 내 해머를 연관 지을 수 있었을 테니.

“아니요. 오해를 풀어드리고 싶어서요.”

“오해?”

황제가 고소를 머금었다.

“저는 황실의 비밀 서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곳에 있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짐짓 억울한 표정을 꾸며냈다.

“짐이 그걸 몰라서 자네를 잡아온 줄 아나?”

“하오시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묻자 황제가 하찮은 미물을 보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인질이지. 도둑을 잡기 위한.”

나는 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애써 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대공이 황실의 중요한 물건을 훔쳐갔다네. 그걸 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고.”

내가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군.

입가에 새어나오는 조소를 애써 감추었다.

“대공이 영애를 많이 아낀다지? 그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리게. 안 그러면 그대는 물론이고 그대 가문 또한 살아남지 못할 테니.”

내가 겁먹기를 바랐던 것인지 황제가 대놓고 살기를 쏘았다.

일부러 두려운 척 몸을 떨자 황제가 만족스러워하며 기운을 거두었다.

“아, 짐의 인내심이 깊지 않다는 건 알고 있겠지?”

경고 조로 말한 그가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폐하, 제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황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말해 보라.”

“도난당한 물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게 왜 궁금하지?”

순간 황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야 전하에게 사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나를 가만히 살폈다.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말간 표정으로 응수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네. 말하지 않아도 대공이 잘 알고 있을 테니.”

황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복면인들이 따랐다.

그런데 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나가지 않고 가만히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저러지?’

의아하게 보고 있는데 모두 나간 걸 확인한 복면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순간 훅 끼쳐 오는 악취에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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