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우리 가문 기사들도 황실 기사단을 향해 검을 들었다.
“백작님, 진정 황명을 어길 생각이십니까?”
몰타 경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난 내 딸이 더 중요하네.”
“후회하실 겁니다.”
“내 가문을 얕보지 말게.”
아버지와 몰타 경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섰다.
‘이대로 두면 아버지는 물론 가문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일촉즉발의 상황에 얼른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다.
“아버지, 저를 보내주세요.”
순간 아버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금세 당혹감을 지운 아버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아버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제게 사면패가 있어요.”
흠칫 놀란 아버지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거예요. 조이에게 맡겨 두었어요.”
그러니 절 보내주세요. 아버지와 가문이 건재해야 절 구해주실 수 있어요.
미처 전하지 못한 말까지 알아챈 아버지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걸 사용할 거라면 저들을 따라가지 않아도…….”
“저로 인해 가문이 위태로워지는 건 원치 않아요.”
내가 가지 않으면 황명 불복종이 된다. 황제는 그 책임을 아버지께 물으려 하겠지.
그럼, 사면패 하나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흔들릴 가문이 아니다. 그러니 너만 생각해.”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아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은회색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아비가 곧 데리러 가마. 조금만 버티고 있거라.”
아버지가 나를 꼭 안으며 침통하게 속삭였다.
“모두 검을 거두게.”
“주군.”
백작가 기사단장, 노르만이 당황한 기색으로 우릴 돌아보았다.
“노르만, 일단 검을 거두게.”
기사단장이 할 수 없이 검을 내리자 다른 기사들도 그를 따랐다.
“자네들은 계속 그러고 있을 텐가.”
아버지의 물음에 몰타 경이 황실 기사들에게 손짓하자 다들 검을 집어넣었다.
“생각을 바꾸신 겁니까?”
“우리 가문 기사들도 동행한다면 딸아이를 보내도록 하지.”
“압송의 책임은 전적으로 저의 황실 기사단에게 있습니다만.”
“내 딸을 죄인 취급하는 자네들을 뭘 믿고 맡길 수 있겠나.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 걸세.”
우리 가문 기사들이 다시 검을 들려하자 몰타 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도록 하지요. 단, 백작가 기사단은 동행만 하는 겁니다. 허튼 짓을 하려 한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겁니다.”
그의 협박에도 아버지와 우리 기사들 모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노르만, 로나와 함께 갈 인원을 선별하게.”
“알겠습니다.”
노르만이 내 전담 호위인 슐레만 경을 포함하여 정예병을 선발했다.
그때 문밖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앞으로 나왔다.
“백작님, 저도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매튜?”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그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아가씨께서 부당한 대우를 당하시진 않는지 감시하고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매튜가 나설 줄은 몰랐는데.
목구멍에서 뜨거운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까칠하고 얄미운 행동으로 매번 내 주먹을 울게 만들더니 오늘은 내 마음을 울릴 모양인가 보다.
고마운 마음에 그를 향해 미소 짓자 매끈한 눈썹이 비딱하게 올라갔다.
“왜 갑자기 못생겨지셨습니까?”
“뭐?”
벅차게 밀려오던 감동이 한순간에 파사삭 식어 버렸다.
어이가 없어 눈을 치켜뜨자 매튜가 내게 살짝 몸을 숙였다.
“제가 법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웃었다.
여느 때 같으면 또 잘난 척을 한다고 타박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얄밉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자 매튜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그러나 황실 기사단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 언제 웃었느냐는 듯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멜카누스 대제께서 집대성하신 법전 제137조 1항에 따르면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귀족이 가진 모든 지위와 권리가 유지되며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가 딱딱한 어조로 황실 기사단을 향해 말했다.
“그러니 감옥으로 이동시 저희 백작가에서 준비한 마차를 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감옥에 도착해서는 귀족 전용 구역으로 배치 부탁드립니다.”
귀족 전용 구역이란 죄수들 중에서 중죄인이 아닌 귀족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족쇄도 차지 않기에 구금보다는 연금에 가까운 형태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특혜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몰타 경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건 특혜가 아닙니다. 법에 나와 있는 귀족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매튜는 이를 어길 시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백작가에서 어떤 소송을 할 수 있는지 등을 줄줄이 읊었다.
“그만. 알겠습니다.”
몰타 경이 진저리를 치며 손을 들어올렸다.
“우선 마차는 허가하겠습니다. 감옥 문제는 차후 소장과 다시 이야기해 보시지요.”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출발 준비를 하겠습니다.”
무감하게 감사 인사를 건넨 매튜가 필요한 문서를 챙기겠다며 잠시 방을 나갔다.
그사이 나는 조이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아가씨,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감옥은 춥다던데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떡해요.”
조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애원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금방 돌아올 거야. 그동안 아버지를 부탁해. 그리고 내가 맡긴 거 잊지 않았지?”
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만 믿는다.”
조이를 안아주자 그녀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조이를 달래주고 저택 밖으로 나가자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빨리 데리러 가도록 하마.”
아버지가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꾹꾹 눌러 담은 음성에 미처 감추지 못한 분노와 함께 걱정이 배여 있었다.
“아버지, 대공 전하께서 도와주실 거예요. 그러니 전하와 꼭 의논하세요.”
“그리하마.”
대공의 존재가 힘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인지 아버지의 굳은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차에 올라타자 매튜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덜거덕거리며 마차가 움직이자 황실 기사단과 우리 가문 기사들이 마차를 호위하듯 둘러쌌다.
나는 마차 창문들이 잘 닫혀져 있는지 확인하고는 매튜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사면패가 있어요.”
순간 매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시니 그걸로 날 빼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요.”
“사면패는 또 언제 준비해 두신 겁니까?”
“황태자 전하께 도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받은 거예요.”
“요즘 들어 아가씨께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건은 정말 놀랐습니다.”
매튜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면패가 있다면 바로 나오실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매튜에게 황제의 목적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요수나 황가의 저주에 관해선 말할 수 없으니 각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와 대공이 대립 관계이고 황제가 나를 이용해 대공을 처리하려는 속셈이다. 뭐, 이런 식으로.
“이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군요.”
매튜는 복잡하게 되었다며 미간을 좁혔다.
“황태자 전하께서 사면패를 주긴 하셨지만 그분 또한 온전히 믿을 순 없어요.”
그가 저주의 진실을 알게 된 이상 어느 편에 설지 확신할 수 없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대공 전하를 찾아가도록 해요. 아버지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놓았어요.”
“알겠습니다.”
“잠깐만 뒤돌아 있어 봐요.”
매튜가 무슨 엉뚱한 일을 하려고 그러느냐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전해줄게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 빨리 뒤돌아 봐요.”
비딱하게 눈썹을 올린 매튜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나는 빠르게 치마를 올려 허벅지에 묶어둔 종이 뭉치를 꺼냈다.
“다 됐어요.”
“설마 그걸 치마 안에 숨기고 오신 겁니까?”
그가 내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네. 달리 숨길 곳이 없잖아요.”
이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 있어?
그런 뜻으로 쳐다보자 매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에, 잘 하셨습니다. 그보다 거기에 뭐가 적혀 있는 겁니까?”
“황실의 비밀.”
순간 매튜의 안광이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번뜩였다.
여기에 적힌 건 황가의 비사(祕史) 중 몇 가지만 뽑아서 간추려 놓은 버전이었다.
엘페르 1세가 제국을 수호하는 신수를 배반하여 그의 반려를 죽였고 그로 인해 신벌이 내려졌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황가의 저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신벌로 인해 폴루티아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각색해 놓았다.
대공이 건국신화의 신수라는 점 그리고 신벌로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100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대공의 존재가 지워졌던 것도, 그가 깨어났음에도 제국을 수호했던 신수라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신벌로 인한 것이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밝힌다고 해서 사람들이 깨닫게 될지 알 수 없단 말이지.’
불확실한 것에 투자할 시간은 없기에 폴루티아를 타깃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이자 걱정거리니까.
“읽어 보면 황실이 폴루티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설마 폴루티아가 황실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맞아요. 대공은 폴루티아를 정화할 능력이 있어요. 실제로 나와 함께 여러 곳을 정화했고요.”
“네?”
지금껏 한 번도 당황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매튜가 경악했다.
“여기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나중에 확인해 봐요.”
나는 매튜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며 말했다.
이 문서에는 폴루티아 발생 원인과 함께 나와 대공이 함께 정화한 지역들도 열거되어 있었다.
무니스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의 활약을 봤기 때문에 황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황제와 대공이 대립하는 거예요. 더불어 나도 노리는 것이고.”
내가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자 매튜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사고를 치셨군요.”
“사고라니요. 제국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에게.”
불만스럽게 눈을 흘기자 매튜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 부분도 있고, 궁금한 점도 많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일단 넘어가지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처리하길 원하십니까?”
“제국 전역에 뿌려줘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매튜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준 종이들을 가방에 넣었다.
황실의 비밀을 밝히는 일은 혹시 몰라 준비한 대비책이었다.
나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황제라면 사면패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더불어 내 명성을 지키고자 함이기도 했다.
사면패를 사용해 풀려나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테니 누명이라는 걸 알려야 했다.
‘내가 명성을 올리기 위해 어떤 고생을 했는데 황제 때문에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순 없지.’
“감옥에 계시더라도 최대한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쓸 수 있는 패는 다 사용할 생각입니다.”
고든 가문의 인맥까지 모두 동원하겠다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모시는 분의 안위를 책임지는 건 보좌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든든함에 그나마 남아 있던 불안감마저 깨끗이 사라졌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내리시죠.”
매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자 회색빛의 투박한 건물이 나를 압박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