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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07)화 (107/140)

107화

날이 밝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대공은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어제 또 제단 꿈을 꾼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몸이 가뿐했다.

원래 제단 꿈을 꾼 날은 식은땀에 절여 깨거나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픈데 말이다.

‘뭐지?’

어리둥절하게 몸을 살피는데 문득 손이 무척 따뜻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고성능 핫팩을 쥐고 있었던 것처럼.

‘설마 스승님께서?’

에이, 아니겠지. 자고 있는 사람의 손을 잡을 일이 뭐가 있겠어?

그렇게 부인을 해보았지만 손 안에 감도는 열감이 빼도 박도 못하게 스승님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리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해도 보통 사람이라면 손을 떼자마자 금세 온기가 사라졌을 테니까.

‘왜 손을 잡으신 거지?’

아……, 맞다. 악몽을 꿨지.

자면서 또 몸부림을 친 모양이네.

못 볼꼴을 보여드린 건 아닌지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몽글몽글거렸다.

비록 꿈일지라도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 대공이 옆에 있어주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오래 계셨나 보네.’

아직까지 손에 열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내가 잠들고서도 한참 동안 곁을 지켜준 것 같았다.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지며 싱거운 미소가 새어나왔다.

나는 힘차게 일어나 아침을 시작했다.

식사까지 마친 후 슐레만 경을 불러서 확인했는데 역시나 그는 신년제 때 애런을 만난 적이 없었다.

‘애런이 실패했으니 다른 이들을 또 이용할지도 몰라.’

그럼, 내게 신경 쓸 여유가 없도록 만들어 주면 되지.

띠링!

때마침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퀘스트> ‘베어둘스의 횡포를 막아라.’

 앨럼 지역의 무법자 베어둘스를 처리하고 그 지역을 정화하십시오.

목표 1 : 베어둘스 600마리

목표 2 : 앨럼 지역 정화

보상 : 스킬 뽑기권 1장

페널티 : 3일간 해머의 신력 봉인 』

퀘스트가 반가울 때도 있다니.

‘좋았어.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지.’

바로 전령새를 불러 대공에게 퀘스트 내용을 전했다. 그리고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 * *

곰을 닮은 베어둘스는 덩치도 크고 머리도 두 개나 달려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레벨을 74까지 올리고 보상으로 치유 스킬을 얻었다.

시스템은 마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그 이후에도 퀘스트를 여러 개 내려주었다.

덕분에 레벨을 86까지 올릴 수 있었다.

내가 계속 폴루티아를 정화하고 다녀서인지 한동안 애런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가 내게 칼을 겨누었다.

연이은 퀘스트를 수행하고 카밀라의 찻집에서 성공적으로 티파티까지 끝냈을 때.

은빛 갑옷을 입은 황실 기사단이 우리 저택에 들이닥쳤다.

깔끔하게 닦인 로비의 대리석 위로 묵직한 군홧발 소리가 내려앉았다.

바쁘게 오가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도 긴장한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집사 팬튼이 당황을 감추며 맨 앞에 선 기사에게 물었다.

“황명을 받고 왔습니다. 로웨나 케인을 황궁 감옥으로 압송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감옥이라니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팬튼이 정색하며 반박했다.

“케인 영애는 황궁 비밀서고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황실의 귀중한 보물을 훔쳐간 용의자입니다.”

“네? 저희 아가씨께서 그런 일을 하셨을 리 없습니다.”

“그거야 조사해 보면 알겠지요. 케인 영애는 어디 있습니까?”

고압적인 어조로 내뱉은 기사가 2층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부라렸다.

“케인 영애, 직접 내려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저희가 모시러 갈까요?”

“아가씨, 어떡해요?”

함께 있던 조이가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렸다.

‘어쩐지 조용하더라니. 그럼,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나는 비뚜름하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힘주어 내렸다.

다행히 아버지께서 저택에 계시긴 하지만 아버지도 황명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반의 대비를 해 놓고 가야겠지.

“조이, 내 책상 맨 아래 서랍에 있는 검은 상자를 꺼내서 가지고 있어.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아버지께 전해드려.”

나는 조이에게 서랍 열쇠를 건네주며 속삭였다.

“아, 네. 알겠어요.”

잠시 어리둥절해 하던 조이가 이내 다부진 표정으로 달려갔다.

“너는 아버지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

근처에 있던 하녀에게 말하자 하녀가 허둥지둥 아버지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집무실은 내가 서 있는 2층에 있으니 아버지께서도 곧 나오실 것이다.

나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았다.

어디선가 필립 경이 지켜보고 있을 테니 대공에게도 곧바로 소식이 전해지겠지.

‘겁낼 필요 없어. 이번 싸움의 승자는 내가 될 테니.’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여유로운 척 미소 지었다.

“경들에게 수고를 끼칠 수 있나요. 제가 직접 내려가도록 하지요.”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갔다.

나를 바라보는 황실 기사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맨 앞에 서 있는 자는 제2기사단 단장인 몰타 경이었다.

‘근위대를 보내지 않은 걸 보니 클로디안과 애런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모양이군.’

그렇다는 건 이번 일은 클로디안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제가 아까 잘 듣지 못해서 그런데 제가 어떤 혐의를 받고 있는 건가요?”

“황궁 비밀서고 무단침입과 황실 보물을 훔쳐간 혐의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아직 죄가 확정된 건 아니니 제 지위에 합당한 대우를 부탁드려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레이디로서 정중하게 대우해 드리도록 하지요.”

뭔가 뼈가 있는 말에 조금 불안해졌다.

“로나!”

그때 2층에서 아버지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버지.”

“괜찮은 게냐?”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오셨는지 항상 단정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달리다시피 계단을 내려오신 아버지가 나를 보호하듯 내 앞에 섰다.

“내 딸의 죄가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기사들을 우르르 끌고 저택 안으로 들어오다니.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송구합니다. 하오나 황실 보물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라 용의자의 도주를 우려하여 긴급히 처리하라는 황명이 있었습니다.”

도주 우려라니.

나를 범인이라고 확정 짓고 있는 행태에 헛웃음만 나왔다.

“마치 내 딸이 범인인 것처럼 말하는 군.”

아버지가 불쾌하다는 듯 싸늘하게 말했다.

“저는 그저 황제 폐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몰타 경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물러섰다.

“명령서는 어디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몰타 경이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건네었다. 명령서를 확인한 아버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기 수색 명령서도 있습니다. 영애의 방은 물론이고 백작저 전체를 조사하게 해주십시오.”

백작저 전체를 조사하겠다고? 이건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뿐만 아니라 이번 일을 나 한 사람으로 끝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황제의 협박이 담겨 있는 조치였다.

아버지도 그 뜻을 알아채시곤 냉랭하게 몰타 경을 쳐다보셨다.

“딸아이의 방 이외에는 수색을 허가해 줄 수 없네.”

“하오나 폐하께서.”

“여기 명령서에 내 딸이 범인이라고 확정되어 있는가?”

“그건 아니지만.”

“귀족 가문의 저택은 반역죄가 아닌 이상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고 해도 가주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수색할 수 없다는 건 자네도 알겠지?”

몰타 경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가 확정된 것이 아님에도 딸아이의 방을 허락해 주는 건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을 따르고자하는 충정 때문일세.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들은 내 저택에 한 발짝도 들이지 못했을 것이야.”

아버지의 서늘한 기세에 기사들이 곤란한 기색을 보였다.

“백작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영애의 방만 수색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지.”

아버지와 내가 앞장서자 몰타 경을 비롯한 기사들 대부분이 뒤를 따랐다.

“팬튼, 남은 손님들은 자네가 잘 살펴 드리도록 하게.”

아버지는 남아 있는 기사들을 일별하며 집사 팬튼에게 지시했다.

한 마디로 남은 기사들이 딴 짓 하지 못하게 감시하란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말뜻을 알아들은 팬튼이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기사들과 함께 3층에 있는 내 방에 다다르자 몰타 경이 앞으로 나섰다.

“샅샅이 수색하도록.”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뒤따르던 기사들이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3층은 아버지와 나만 사용하는 공간으로 각각의 방은 침실과 서재, 응접실이 연결되어 있고 드레스룸과 욕실도 갖추어져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방은 기사들의 무자비한 손길에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도둑이 들어도 이 정도는 아니겠네.’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엉망으로 변해가는 내 방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힘이 들어간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자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 화내지 마시라고 단단한 손을 도닥이자 날카롭게 솟았던 눈썹이 축 늘어졌다.

“아무 일도 없을 거다. 걱정하지 말거라.”

아버지는 내가 불안해할까 봐 걱정이 되셨는지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너른 품에 안겨 있으니 어떤 일이 닥쳐도 안전할 것만 같은 기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그 안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단장님, 여기 도난당한 물건을 찾았습니다.”

내 책상을 뒤지고 있던 기사 한 명이 무언가를 들고 뛰어왔다.

‘저건……!’

기사가 몰타 경에게 건넨 물건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급 가죽 표지, 각 모서리에 입혀진 금박.

역대 황제 중 한 명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책은 황제들이 일기처럼 남긴 기록이었다.

‘비밀서고에 있어야 할 책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황궁 비밀서고에서는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기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책을 찾아낸 기사와 몰타 경이 주고받는 눈짓을 보고는 어찌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 이렇게 나오시겠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황제가 일을 벌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 당하고 보니 상당히 기분이 더러웠다.

비열하고 비겁한 게 엘페르 1세의 후손답군.

“그게 무엇인가?”

아버지가 나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몰타 경에게 물었다.

“증거이지요. 케인 영애가 황궁 비밀서고에 침입했다는 증거. 이로써 영애는 이제 용의자가 아니라 범인이 되었네요.”

몰타 경이 들고 있는 책을 힐끗 쳐다본 아버지가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물건이 정말 여기서 나왔다고 확신할 수 있나?”

“지금 수색 중에 나온 걸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 기사가 가지고 있다가 수색 중에 나온 것처럼 꾸밀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지금 저희 황실 기사단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몰타 경이 정색하며 반박했다.

“그럼, 오로지 황족만 아는 비밀서고를 어린 귀족 영애가 알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대공 전하께서 알려주셨을 수도 있지요. 두 분이 사제지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아하, 왜 하필 비밀서고를 선택했나 했더니 대공까지 같이 엮으려 했던 거야?

이걸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대공 전하께서 공범이 되시겠군. 그럼,  대공 전하부터 조사한 뒤 다시 오도록 하게.”

단호한 음성에 나를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 순간 아버지의 널따란 등이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다.

“이 증거가 아니더라도 이미 케인 영애를 감옥으로 압송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비켜주시지요.”

“내 딸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할 것이다. 노르만!”

아버지가 우리 가문 기사단장을 부르자 언제 와 있던 것인지 가문 소속 기사들이 나와 아버지를 보호하듯 둘러쌌다.

“우리에게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황명 불복종으로 처벌할 것이다!”

몰타 경의 외침과 함께 황실 기사들이 검을 꺼내들어 우리에게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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