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애런, 내 얘기 잘 들어.”
나는 충격과 혼란으로 괴로워하는 애런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너는 술법에 걸려 세뇌 당했었어. 그래서 딴 사람처럼 행동했던 거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애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세뇌라고?”
“응. 네가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해 조종당하고 있었어.”
나는 며칠 전 애런이 백작저에 찾아왔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이상한 점들을 말해 주었다.
“모두 평소의 너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지. 오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행동들을 되짚어 본 애런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지금도 내게 술법이 걸려 있는 거야?”
“아니, 지금은 다 풀렸어.”
애런의 시선이 잠시 대공에게 닿았지만 나나 대공이나 굳이 그의 오해를 풀어주진 않았다.
애런에게 걸린 술법을 풀어준 사람이 대공이 아니라 나라는 걸 알려주면 나만 더 위험해질 테니.
“제가 다시 조종당할 수도 있는 겁니까?”
대공에게 묻는 애런의 음성이 갈라져 있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술법은 완전히 깨졌으니.”
그제야 바짝 굳어 있던 애런의 어깨가 느슨하게 풀렸다.
“신년제 날, 나를 만난 이후에 누구를 만났는지 자세히 말해 봐.”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한 애런이 차근차근 기억을 되짚으며 내게 말해주었다.
이전에 그가 말해줬던 대로 모르는 사람을 만난 일은 없었다.
“술사가 환영술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환영술이요?”
“상대에게 다른 사람으로 보이도록 하는 술법이지.”
“그러니까 아는 사람의 모습을 가장해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거예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짜가 있었단 말씀입니까?”
“그래. 세뇌는 직접 만나야 걸 수 있으니까.”
“그날 특별히 이상하게 행동한 사람들은 없었어?”
내 물음에 애런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환영술 때문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단서는 그들과 나눈 대화들뿐.
요수는 애런을 통해 내 팔찌를 얻고자 했다. 그 부분에 주목한다면 용의자들을 추려낼 수 있지 않을까.
요수가 해머에 관해 알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무니스에서부터 대놓고 해머를 사용한 탓에 나에 대해 조사하면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팔찌는 아니었다.
‘팔찌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스승님과 애런 그리고 슐레만 경과 네이선 경뿐이야.’
최근에 아버지께도 말씀드렸으니 아버지도 고려해야겠지.
아버지께서 무니스에서 있었던 일과 해머에 대해 아시고는 얼마나 놀라셨는지 모른다.
‘하마터면 졸도하실 뻔해서 백작저가 난리가 났었지.’
해머에 대해선 어렵게 납득하셨지만 위험한 곳에 다니는 건 결사반대를 외치셨다.
다행히 기나긴 설득 끝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대공과 반드시 동행하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어쨌든 내 팔찌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극소수이고 이들은 요수와 관련이 없었다.
그 말은 곧 애런이 대화 도중 팔찌에 관해 말을 흘렸다는 뜻이었다.
‘해머를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떠벌렸을 리는 없어.’
애런이 신뢰하는 사람 중에 해머에 대해 알고 나와도 가까운 사람이 누가 있을까.
“혹시 슐레만 경과 대화를 나눌 때 팔찌에 대해 이야기했어?”
“어?”
“신년제 날 정원에서 슐레만 경을 만났다며.”
“아, 응.”
“그때 네가 팔찌에 대해 이야기 했었느냐고.”
잠시 기억을 더듬던 애런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네 걱정을 하면서 팔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 슐레만 경은 다 알고 있으니까 편하게 이야기했지.”
애런이 말을 하면서도 불안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아니. 널 세뇌시킨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서 물어본 거야.”
“그놈이 네 호위의 모습을 가장한 모양이군.”
내가 누굴 의심하는지 알아챈 대공이 말했다.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슐레만 경이 가짜였다고?”
내가 추론한 바를 애런에게 설명해 주자 그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그럼,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 지게 된 거야?”
애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나왔다.
“너 때문이 아니야. 네게 술법을 사용한 놈이 나쁜 놈이지.”
“아…….”
애런이 탄식을 내뱉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자책하지 마. 그자는 오래 전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고 네가 나와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한 거였으니까.”
“오래 전부터 너를 노리고 있었다니?”
자책과 후회로 몸부림치던 애런이 번쩍 고개를 들고는 내게 물었다.
내가 대공에게 말해도 되느냐고 눈짓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세뇌를 했던 자가 무니스에 산불을 냈던 사람이야. 폴루티아도 그자가 한 짓이지.”
애런의 벽안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조사했던 내용들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는 모양이었다.
“혹시 그자가 황실과도 연관되어 있는 거야?”
한참 만에 입을 연 애런이 내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주자 그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황망하게 중얼거린 애런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로나. 내가 널 위험에 빠뜨렸어.”
그가 죄책감에 짓눌린 얼굴로 내게 매달렸다.
건드리면 톡하고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흐려진 푸른 눈동자를 보며 든 생각은 하나였다.
1회차 때의 애런이 지금처럼 내게 사죄한다면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만약 그때의 애런 또한 자의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일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그시 눈을 감자 애런이 내 손등에 얼굴을 묻으며 더욱 매달려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부진 턱선을 따라 툭하고 무언가가 떨어지며 검은색 바지 위에 동그랗게 흔적을 남겼다.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오늘 일이 온전히 네 잘못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그걸 빌미로 혼자서만 삼켜왔던 원망과 울분을 쏟아낼 수 있었을 텐데.
‘답답해.’
갈 곳 잃은 감정들로 속이 터질 것 같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맑고 따스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호흡이 편안해졌다.
눈을 뜨자 짙게 가라앉은 금안과 마주쳤다.
괜찮은지 묻는 것만 같은 눈빛에 엉망으로 뒤엉키던 속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단단한 팔이 풀어졌다.
어쩐지 허전한 기분에 괜히 어깨를 매만졌다.
“자책은 집에 돌아가서 하는 게 좋겠군. 내 제자도 이제 쉬어야 하니.”
대공이 애런의 뒷덜미를 잡아 내게서 떼어놓았다.
애런의 체격이 큰 편임에도 대공은 가볍게 그를 일으켰다.
당황한 애런이 대공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애런,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로나.”
애런이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오늘 일, 네 의지가 아니었다는 거 알아. 그러니 널 원망하지 않아.”
이건 진심이었다.
그에 대한 해묵은 감정 때문에 괴로운 것이지 오늘 일로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위를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일개 인간이 요수의 술법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하니까.
내 말에 안도한 것인지 어두웠던 애런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퇴근 후에 다시 들릴게.”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애런이 대공에게 향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지요.”
“난 누구처럼 몰래 들어온 것이 아니라 급히 나가야 할 이유가 없군.”
은근한 비난이 담긴 대공의 말에 애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나를 향해 휙 고개를 돌린 애런이 대공을 이대로 둘 거냐며 눈으로 물었다.
“너 먼저 가. 스승님께는 드릴 말씀이 있어.”
내 대답에 애런의 눈빛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는 가기 싫은 걸음을 억지로 떼어내듯 한참을 미적거리더니 결국 창문 밖으로 나갔다.
애런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못마땅하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애런이 떠나자 몸을 숨기고 있던 필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와주셔서 감사해요.”
대공은 별말 없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필립 경도 고마워요. 지켜주셔서.”
묵례로 내 인사에 답한 필립이 대공 뒤로 물러났다.
“스승님 말씀대로 요수는 제 팔찌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또 다른 수작을 부리겠죠.”
그러니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려는데 대공이 대뜸 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그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는 이불을 젖혔다.
“이야기는 다음에. 지금은 일단 자.”
“아니, 지금 잠을 잘 때가 아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공이 부드럽게 나를 밀어 침대에 눕혔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내게 덮어준 그가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잠들 때까지 있을 테니 안심하고 자도록 해.”
“스승님, 요수가…….”
대공은 내가 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려버렸다.
맞닿은 손으로 따스한 기운이 전해지자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날이 밝으면 스승님 댁으로 갈게요.”
“그래.”
“……정말 안 가실 거죠?”
“그래.”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공의 나직한 대답에 안도가 이는 걸 보면.
이내 긴장이 풀어지며 몸이 노곤해졌다. 나는 그대로 편안히 잠에 들었다.
* * *
카이스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진 로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령새를 통해 데이먼이 애런을 이용해 로웨나에게 접근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애런의 이름은 지워지고 데이먼이 로웨나를 찾아갔다라고 변환되어 있었다.
그 뒤로는 무슨 정신으로 이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남은 보고도 듣지 않고 다급하게 텔레포트를 시전해 백작저로 왔을 때.
무사한 로웨나를 보는 순간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로웨나를 향한 감정이 단순히 폴루티아의 정화자를 지키기 위한 책임감도, 사제지간의 정도 아니란 것을.
‘다시는 누군가를 마음에 담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그러리라 다짐했건만.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내어준 모양이었다.
‘언제 이렇게 스며든 것인지.’
포리지 한 그릇의 온기가, 자신의 품을 적셨던 눈물이 얼어붙어 있던 심장을 녹인 걸지도.
어쩌면 이 지독한 고독감에서 누군가가 꺼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들일 수 없다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서도 실은 외로웠던 게지.
‘내가 이렇게 나약했던가.’
카이스가 소리 없이 자조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로웨나에게서 떠날 줄 몰랐다.
사실 그도 제 변화를 어렴풋이 인지하고는 있었다.
그럼에도 그 감정을 잘라내고 외면했다. 에이바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으니까.
또한 제 반려도 지키지 못했으면서 누군가를 또 마음에 들이는 건 안 될 일이었으니.
‘그런데도 이렇게 되다니.’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편안히 자고 있던 로웨나가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뒤척였다.
“……싫…어. 살려……줘.”
고통스러운 듯 잔뜩 얼굴을 찌푸린 그녀는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는 듯 버둥거렸다.
카이스의 반듯한 미간이 좁혀졌다. 로웨나가 어떤 악몽을 꾸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숨을 위협받았는데 어찌 괜찮을 수 있으랴.
카이스가 허우적대는 손을 붙잡자 필사적으로 맞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절대 자신을 놓지 말라고. 이 공포 속에서 살려달라고.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아 이 손을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마디 굵은 손이 여린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이내 맞잡은 손을 통해 붉은 신력이 전해지자 로웨나가 점차 평온을 찾아갔다.
그녀를 바라보는 카이스의 금안이 짙게 일렁거렸다.
‘에이바, 나를 용서해 주길.’
인간의 수명은 길지 않으니 조금만 봐줘. 남은 생은 전부 네게 속죄하며 살 테니.
속으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카이스의 머리 위로 호감도 80%가 깜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