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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105)화 (105/140)

105화

애런은 정말 자신이 왜 내 침실에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두통이 이는지 손으로 머리를 짚으려 했으나 묶인 탓에 여의치 않자 결국 몸부림치다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터라 꽤나 당황스러웠다.

그때 애런의 머리에서만 일렁이던 검은 아지랑이가 갑자기 몸집을 키우더니 그의 몸 전체를 둘러쌌다.

“조심하십시오.”

필립이 나를 제 뒤로 보내며 손에 신력을 일으켰다.

“팔찌, 팔찌를 가져가야 해.”

그때 애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왜 저러는 걸까요?”

“아가씨의 해머로 인해 잠시 세뇌술이 약해졌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세뇌술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모양입니다.”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요?”

이러다 애런의 정신이 붕괴될까 걱정이 되었다.

“최대한 빨리 세뇌술을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아이템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대공에게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잠시 대책을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애런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로나, 팔찌를 내게 줘.”

애런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고압적인 언사에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나를 향할 때면 온화해지는 눈빛은 서리가 낀 것처럼 냉랭하다 못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애런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눈빛 너머로 나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에 등골이 섬뜩했다.

“안 돼. 네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대답에 애런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와 함께 푸른빛의 오러가 강하게 뻗어 나왔다.

투둑.

필립이 만든 밧줄을 끊어내 버린 애런이 품에 숨기고 있던 단도를 꺼내들었다.

“피하십시오.”

필립이 발검하여 애런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는 그 틈에 얼른 인벤토리를 열어 ‘나이아스의 샘물’의 꺼냈다.

유리병 안에 든 투명한 물이 찰랑거렸다.

“필립 경, 애런을 묶어둘 수 있어요? 잠시면 돼요.”

애런과 공방을 주고받던 필립이 나를 힐끗 보고는 신력을 강하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불덩어리처럼 솟아오른 신력이 그대로 애런에게 쏘아졌다.

이전보다 더 굵게 만들어진 밧줄이 촘촘하게 애런을 옭아맸다.

순식간에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밧줄에 둘둘 말려진 애런이 발버둥을 치다 바닥에 엎어졌다.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고마워요.”

애런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내게 소리쳤다.

“풀어! 이거 당장 풀어. 로나, 왜 이러는 거야? 나 아파. 이것 좀 풀어줘.”

무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인격이 휙휙 변하는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시끄러워.”

내 일갈에 애런의 표정이 와락 구겨지더니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나는 애런의 턱을 강하게 붙잡고는 그대로 입을 벌려 샘물을 부어넣었다.

“컥.”

뱉어내려고 하는 걸 강제로 입을 다물게 했다.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로나!”

원망스러운 눈길로 쏘아보는 애런의 몸 주위로 오러와 섞인 검은 연기가 휘몰아쳤다.

필립이 만든 밧줄이 막 끊어지려던 찰나.

갑자기 검은 연기가 힘없이 스러지더니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던 오러도 잠잠해졌다.

풀썩.

사납게 소리쳐대던 애런이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해결이 된 건가요?”

더 이상 악취도 나지 않고 검은 연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네. 술법이 풀린 것 같습니다.”

필립이 얼떨떨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아, 다행이네요.”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애런이 이런 일로 나를 고생시킬 줄이야.

‘아니지. 원래 뒤통수치는 전문이셨지.’

제단에 바쳐 죽이려 했던 것에 비하면 팔찌를 훔치는 것 정도야 귀엽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 미안하지만 애런을 소파에 뉘어줄 수 있어요?”

“이대로 같이 계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네. 깨어나면 정신이 온전한지 확인해야 하고, 요수를 언제 만나게 된 건지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거라면 다른 방에 눕혀 두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요수가 애런을 이용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가까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고개를 돌려 필립을 마주보자 나를 향한 눈빛에서 걱정이 느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나름 가까워진 것인지 이제는 제법 그의 감정이 읽혔다.

“필립 경이 있으니 애런을 여기 둘 수 있는 거예요. 경이 절 지켜줄 테니까.”

나를 보고 있던 흑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이내 단단하게 변했다.

“이 자가 아가씨께 손끝 하나 대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주군께는 보고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먼과 관련된 일이라 이대로 덮을 수는 없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필립이 바로 신력으로 전령새를 만들어 밖으로 날려 보냈다.

잠시 후, 전령새가 가져올 답장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갑자기 나타난 이를 보고 당황했다.

“스승님?”

“데이먼이 접근했다고?”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며 나타난 대공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대공은 나를 이리저리 돌리며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내게 생채기 하나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하아.”

그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퀘스트를 수행하며 다치거나 위험했던 경우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동요한 대공은 처음 보았다.

‘당연히 늦게 알렸다고 질책하실 줄 알았는데.’

나는 조금 얼떨떨하게 대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찌르르 울리면서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풀어지려는 입가에 힘을 주었다.

“그자는 어디 있지?”

고개를 든 대공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저기 있습니다. 지금은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필립이 소파를 가리키자 대공이 성큼성큼 걸어가 애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주위로 일렁이는 붉은 신력이 당장이라도 애런을 집어 삼킬 듯 사납게 일렁거렸다.

‘황제를 만났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정말로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가만히 애런을 노려보던 대공이 손을 내젓자 붉은빛의 신력이 애런의 몸을 감쌌다.

“데이먼의 술법은 다 풀렸군.”

그제야 그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세뇌술 말고 다른 술법이 걸려 있었던 건 아니겠죠?”

혹시나 요수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물은 것이었다.

“그 외의 것은 없었던 듯하군.”

잠시 애런에게서 요력의 흔적을 되짚어 본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데이먼의 최종 목표는 해머가 아니라 너일 테니까.”

나를 바라보는 금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우리에게는 잘된 일이라 생각해요. 요수가 더는 숨어 있지 않을 테니까요.”

대공이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커다란 손을 내 머리에 얹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네 안위가 먼저야.”

“저도 요수에게 죽을 생각 없어요.”

나도 내 목숨이 중요하다고.

이번 회차가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내가 요수에게 죽고 싶겠나.

“제게는 스승님이 계시잖아요. 우리는 반드시 이길 거예요.”

“……너를 어쩌면 좋을까.”

한숨처럼 내뱉은 대공이 내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이런 식의 접촉은 처음이라 순간 움찔했다.

그를 느낀 것인지 대공이 내게서 손을 물렸다. 따뜻한 기운이 멀어지니 어쩐지 아쉽게 느껴졌다.

“술법은 어떻게 파훼한 거지?”

“지난번 계시를 수행했더니 사술을 파훼할 수 있는 약물이 생겼거든요. 그걸 먹였어요.”

“이번에도 여분은 없겠지?”

“네.”

대공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먼이 이 자에게 다시 술법을 걸지 못하도록 조치해 두는 게 좋겠군.”

애런의 몸을 훑어 내린 붉은 신력이 그의 머리에 모여들며 마법진처럼 술법 문양을 만들어냈다.

선명하게 빛을 내던 문양은 애런의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이내 사라졌다.

“저, 스승님. 부탁이 한 가지 있는데요.”

말해보라며 대공이 눈짓했다.

“저희 아버지께도 보호술을 걸어주실 수 있으세요?”

요수가 애런을 이용한 것을 보면 내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도 손댈 가능성이 컸다.

사실 그들 모두 보호해 주고 싶지만 여건상 어려운 일이니 아버지만이라도 지켜드리고 싶었다.

“백작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손을 써 놨으니.”

나는 멍하니 대공을 바라보았다.

언제 아버지까지 살필 생각을 했던 걸까.

분명 자상한 남자는 아닌데 이렇게 한 번씩 훅 치고 들어올 때면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처럼 속절없이 마음을 내주게 된다.

“네 유일한 가족이지 않나.”

내 시선을 의문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대공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감사드려요.”

왠지 먹먹하게 목이 잠기는 것 같아 작게 헛기침을 하자 대공이 살짝 몸을 숙였다.

“어디 불편한가?”

괜찮다고 고개를 젓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눈가를 쓸었다.

“걱정하지 마라. 네 가족을 잃는 일은 없을 테니.”

내가 불안해한다고 여긴 건가.

그 이유로 목소리가 잠겼던 건 아니었지만 온기가 스민 음성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부스럭.

그때 소파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 필립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제야 정신이 드는 것인지 애런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

두통이 이는 듯 그가 이마를 짚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애런, 정신이 좀 들어?”

“어? 로나. 네가 왜 여기……?”

나를 보고 놀란 애런이 내 옆에 서 있는 대공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대공 전하께서 제 침실에 어인 일이십니까?”

애런이 정색하며 물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대공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자 협탁에 놓여 있는 촛대에 불이 켜지며 방안이 환해졌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린 애런이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곧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내가 왜 로나, 네 침실에 와 있는 거야?”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저녁 훈련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린 것인지 애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내, 내가 너를…….”

그가 머리를 감싸 쥐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로웨나를 칼로 위협했지. 팔찌를 훔쳐가기 위해서.”

대공이 판사가 판결을 선고하듯 죄목을 짚어주자 애런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내, 내가 그럴 리 없어. 내가 어떻게 널 해칠 수가 있어. 말도 안 돼.”

그가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로나, 이상해. 내가 널 위협할 리 없는데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기억이 생생해. 아니지? 내가 한 거 아니지? 이건 꿈이지? 그렇지?”

애런이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손은 내게 닿지 못했다. 대공이 나를 그의 뒤로 보내며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홀로 남겨진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애런, 네가 야밤에 몰래 내 침실에 들어온 것도, 나를 단검으로 위협한 것도 모두 사실이야.”

테이블에 놓여 있던 단검을 확인한 애런이 잘게 눈을 떨었다.

검집에 새겨진 쌍검문양.

그건 하퍼 공작가의 문장으로 애런이 자신의 검에 항상 새겨 넣는 표식이었다.

자신의 복장까지 확인한 애런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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