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로나, 너 안색이 안 좋아.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애런이 나를 부축하듯 붙들어 소파로 데려갔다.
“괜찮아. 아픈 거 아니야.”
나는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럼에도 애런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평소와 달리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로 인해 그의 기운이 더욱 잘 느껴졌다.
묵직하고 맑은 기운에 이물질처럼 섞여 들어 있는 질척하고 음습한 기운이 낯설지 않았다.
‘판타시아 궁에 있던 매개체와 같은 느낌이야.’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애런을 바라보았다.
“로나, 왜 그래?”
“너, 신년제가 있던 날부터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 처음 보는 사람은 없었어?”
“어?”
애런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낯선 사람이나 물건을 본 적이 있냐고.”
신년제에서 만났을 때 악취가 나지 않았던 걸 보면 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음, 그런 일은 없었는데.”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애런이 고개를 저었다.
“너 요즘 황태자 전하의 명령으로 이곳저곳 조사하러 다닌다며. 그런데도 없었어?”
“신년제 이후로는 외부 임무가 없었거든.”
말간 눈빛을 보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혹시 모르는 사이에 당한 건가?
“애런,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들 다 꺼내 봐.”
“응?”
“어서, 빨리.”
어리둥절해하던 애런은 내 재촉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가 지니고 있던 물건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손수건, 회중시계, 연고, 장갑 그리고 약간의 돈.
‘없어.’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 어디에서도 악취가 나거나 검은 아지랑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겉옷에 달린 단추와 벨트, 구두까지 다 확인해 봤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검은 아지랑이는 애런의 머리 주위에서만 일렁거렸고, 악취도 그에게서만 났다.
‘원인이 뭘까?’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데 애런이 내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말해주면 내가 찾아줄게.”
그가 내 손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생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애런이 뭐라고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뿌리쳤을 손도 그에게 맡겨둔 채 계속 악취의 원인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목에서 찌릿하고 정전기 같은 게 일어났다.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자 애런도 멈칫했다.
‘애런도 느낀 건가?’
그런데 왜 나를 보고 당황하는 거지?
갈피를 잃은 눈동자가 꼭 엉뚱한 곳에 볼 일을 보다가 주인에게 들킨 강아지 같았다.
‘뭐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애런의 마디 굵은 손가락에 걸려 있는 팔찌가 보였다.
“손을 잡고 있다 보니 눈에 띄어서.”
팔찌를 놓고 스르륵 미끄러지는 손이 어딘가 어색했다.
“저번에 네가 말해 주긴 했지만 자세히 보진 못해서.”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주절주절 변명하는 모습에 절로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수상한데?’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게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애런은 거짓말할 때 손에 쥔 물건을 조몰락거리는 버릇이 있으니까.
나는 가만히 내 팔찌를 응시했다.
이건 내 신체의 일부와 같아서 평범한 장신구처럼 간단히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팔찌를 빼고 싶다면 시스템창을 열어 해머 장착을 해제하거나 변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
‘아까 그 정전기, 애런이 팔찌에 손을 대서 일어난 건가?’
다른 사람들이 손을 대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왜 애런만 다른 거지?
그 순간 그의 머리에서 일렁이는 검은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 요력!
아마도 해머에 담긴 신력이 요력에 거부반응을 보인 모양이었다.
일단은 태연하게 반응했다. 애런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음, 내가 안 보여줬었나?”
“사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그때 네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
애런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자꾸 내 팔찌로 향했다.
“보여주는 게 뭐 어렵다고. 봐!”
나는 애런에게 팔찌를 찬 손목을 내밀었다.
“……어, 고마워.”
힐끔 내 눈치를 본 애런이 조심스럽게 팔찌를 살펴보았다.
“그냥 보기엔 평범한 팔찌 같아. 물론 예쁘긴 하지만.”
“그치? 예쁘지? 그래서 눈에 딱 띄었다니까.”
“이것만 아니었으면 네가 위험할 일도 없었을 텐데.”
애런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처진 눈매가 더욱 힘없이 늘어졌다.
“이제 다 봤지? 나 팔 아파.”
나는 못 들은 척 엄살을 부렸다. 그러자 애런이 얼른 내 팔을 붙들어 주었다.
“그럼, 팔찌를 빼서 내게 주면 어때? 너 팔도 아프니까.”
“팔찌를 빼달라고?”
“응. 고대 유물은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해서 좀 자세히 살펴보고 싶거든.”
“미안, 팔찌는 빼줄 수 없어. 그냥 이렇게 보면 안 될까?”
“조심해서 다룰게. 흠집 하나 내지 않고 돌려줄 자신 있어.”
음, 정말 이상하네.
애런은 내가 싫다고 하면 더는 말하지 않는데.
물론 내 안전에 관련된 일은 예외지만 그 외에는 조르는 경우가 없었다.
역시, 저 검은 아지랑이 때문인 걸까?
“미안해. 이게 고대 유물이라 망가지면 고칠 방법이 없거든. 그래서 조심하게 되네.”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 애런은 여전히 팔찌에 미련이 남는지 계속 힐끗거렸다.
‘역시 수상해.’
지난번 팔찌에 대해 설명했을 땐 한 번 보고 말더니 오늘은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거지?
일단 좀 더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그냥. 신년제 때 심각한 얘기만 나누다가 헤어진 것 같아서.”
“잘 왔어. 안 그래도 너 오랜만에 왔다고 다들 반가워하더라. 점심 식사 기대해도 좋을 거야.”
어딘가 초조해 보이던 얼굴에 순박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평소의 애런처럼 보였다.
‘저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애런에게 차를 권하며 그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검은 아지랑이를 살폈다.
애런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고, 이것 참.
더구나 그는 요수에 대해선 전혀 모르지 않나.
차를 마시며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하는데 자꾸만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애런이 계속 팔찌를 힐끗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점심 식사를 할 때도, 이후 정원을 산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내게 집중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던 평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애런은 그렇게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주방장님 눈빛 보셨어요? 공자님께서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며 어찌나 흐뭇해하던지. 누가 보면 친아들인 줄 알겠더라니까요.”
조이가 내 옷을 갈아입혀 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조잘거렸다.
“너도 흐뭇하게 쳐다보던데 뭘.”
“제가요?”
“식사 때마다 날 보고 웃으시는 아버지랑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걸?”
“아니, 뭐. 공자님을 어릴 적부터 뵈어서 그런지 잘 드시는 걸 보니 제 배가 다 부르더라고요.”
조이가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변명했다.
“거 봐.”
“뭐 저만 그런가요? 백작저에 근무하는 사람들 다 그럴걸요?”
조이가 내 옷의 단추를 채워주며 씩 웃었다.
“아, 그런데요. 오늘 공자님이 조금 이상하셨어요.”
“어디가?”
“그, 원래 장신구나 옷 이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으시잖아요. 아마 아가씨께서 매번 똑같은 옷을 입고 나가셔도 모르실걸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이 되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가씨의 팔찌에 대해서 계속 물어보시더라고요.”
“뭐라고 물어봤는데?”
“팔찌를 빼 놓으실 때는 없는지, 어디에 보관하는지. 뭐, 그런 걸 물어보시더라고요. 이 팔찌가 되게 인상 깊으셨나 봐요.”
조이가 내 팔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께서 보석 사업을 시작하셔서 장신구에 관심이 생기신 걸까요? 왜 저번에도 아가씨 가게의 목걸이를 선물하셨잖아요.”
나는 조이가 하는 얘기를 대충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애런이 노리는 게 내 팔찌라는 것이.
그리고 그 이유는 검은 아지랑이 때문이겠지.
‘요수가 내 팔찌를 노리고 있는 건가.’
딱딱 들어맞는 정황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언제 애런에게 접근한 거지?
낯선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 걸 보면 애런은 전혀 자각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한 터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우선 스승님께 이 상황을 알려야겠어.’
나는 조이가 나간 뒤 전령새를 불러 애런의 상태를 간략하게 적어 보냈다.
전령새는 오래지 않아 답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대공이 보낸 답장을 보고 털썩 의자에 앉았다.
세뇌술.
애런이 당한 술법의 종류였다.
“하, 내 주변 사람들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는데.”
나를 위협하는 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나 백작저 식구들을 건드린다면?
이번엔 세뇌였지만 다음엔 목숨을 노릴지 누가 아는가.
갑자기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루빨리 요수를 처리해야 해.’
내 해머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앞으로도 계속 나를 주시할 터.
‘제대로 놀아줘야겠군.’
폴루티아든 황궁이든, 그가 공들여 놓은 곳은 어디든 쫓아가서 정화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열이 받아서라도 모습을 드러내겠지.
이번에 만나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우선 애런부터 해결해야 해.’
대공이라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건 최후의 보루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대공이 눈치챈 걸 요수가 알기라도 하면 애런을 어찌할지 알 수 없으니까.
일단 내게 방법이 있으니 그것부터 써볼 생각이었다.
‘언제 찾아가는 게 좋을까.’
그러나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애런과의 재회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가 다녀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선잠에 들었던 나는 방 안에 들어선 인기척을 감지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밤에 창문을 넘어오는 자라면 한 부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숨을 고르게 내쉬며 침입자가 방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인기척이 가까워졌을 때 벌떡 일어나며 해머를 소환했다.
붕.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커다란 체격의 침입자가 시원하게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윽.”
침입자의 신음과 함께 후두둑하고 돌가루들이 떨어졌다.
“이런. 건물 보수비도 청구해야겠네.”
금이 간 벽을 보며 혀를 차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가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여상하게 대답하자 필립이 안도했다.
그는 내가 대공에게 애런의 이야기를 전한 이후로 24시간 밀착 호위 중이었다.
침입자가 오면 1차적으로 내게 맡겨달라고 부탁했기에 그가 나서지 않았던 것이었다.
방을 중심으로 방음결계를 설치한 필립이 침입자를 향해 신력을 사용했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노란빛 신력이 밧줄로 변해 침입자를 꽁꽁 묶었다.
“으윽.”
침입자가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침입자에게 뚜벅뚜벅 걸어간 필립이 그가 쓰고 있던 복면을 휙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아주 친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애런.”
청명한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 로나. 저기, 그게.”
횡설수설하는 그의 손에는 내 팔찌와 비슷한 모양의 팔찌가 들려있었다.
“설마 가짜를 만들어 와서 바꿔치기하려던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던 그가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어리둥절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로나? 네가 왜 여기에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