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도대체 이 자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것인가.
클로디안은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케인 영애는 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로웨나가 말하길 자신이 가진 신력은 밀 한 톨 수준이라 그랬었다.
그 말은 진실이었고.
“물론 그 영애의 몸속에 내재된 신력의 양은 미미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는 다르죠.”
데이먼의 말에 클로디안은 무니스에서 봤던 로웨나의 해머를 떠올렸다.
마수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해머는 대공의 것과 비슷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력이 담긴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 그녀 자체가 신력을 지니고 있는 건 아니니 그대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지 않아.”
클로디안은 자신이 로웨나를 보호하려 한다는 걸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반박하기에 급급했다.
“신력이 담긴 무기가 그 영애에게 종속되어 있더군요. 그렇다면 조건에 부합하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데이먼이 클로디안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뒤로 단단한 벽이 버티고 있던 터라 더 이상 물러날 수가 없었다.
“황가의 저주, 풀고 싶지 않으십니까?”
상체를 기울인 데이먼이 은밀하게 속삭였다.
“로웨나 케인이 있으면 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도 꾸릴 수 있고 전하의 자녀도 평안해지겠지요.”
뱀의 꾐에 넘어간 하와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유혹적인 속삭임에 클로디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은 그가 눈을 똑바로 들어 데이먼을 응시했다.
“조건에 부합한 자가 처음 나타난 것이라며. 그러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지. 아니 그런가?”
너무나 완벽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라 도리어 의심이 들었다.
“판타시아를 만든 것도 처음이었으나 지금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 능력을 의심당한 게 불쾌한지 데이먼의 얼굴이 냉랭해졌다.
“증명되지 않은 능력을 신뢰하긴 어렵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맞붙었다. 그러나 데이먼이 부드럽게 눈을 접자 순식간에 긴장감이 날아갔다.
“전하께서 기회를 주셔야 능력을 증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신제물을 바치지 않고도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오게. 그러면 내 그대를 인정해 주지.”
언젠가는 사랑에 눈이 멀어 이 자에게 매달릴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가능하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다.
가만히 클로디안의 눈을 바라보던 데이먼이 흥미가 식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어리시군요. 뭐, 좋습니다. 전하의 결정을 존중해 드리지요.”
데이먼이 뒤로 물러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는 언제든 전하를 도와드릴 용의가 있으니 제가 필요하실 때 연락 주십시오.”
그가 클로디안에게 작은 조각상하나를 건네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조각상은 표범을 닮은 동물 모양이었으나 검은색 바탕에 흰 점무늬가 들어간 것이 독특했다.
“아, 그리고 혹시나 전하의 결정에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돌아서려던 데이먼이 뭔가를 떠올리고는 클로디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설령 제가 실패한다고 해도 전하께는 손해되는 일이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케인 영애가 가진 신력이면 한 사람의 생명은 충분히 살릴 수 있거든요.”
클로디안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리자 데이먼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케인 영애의 신력으로 전하의 연인이 천수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수천의 제물보다 한 명의 희생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데이먼이 두 손을 들어 저울질 하듯 위아래로 움직여 보였다.
“다시 한 번 신중히 검토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데이먼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이내 검은 연기에 가려 사라졌다.
클로디안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사람만 바치면 다른 희생은 하지 않아도 된다.
데이먼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오래전 죽은 대공의 반려를 부활시킨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보다 저 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도 사랑은 막지 못하더구나.”
언젠가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사랑 앞에서는 강철 같은 심장도, 뼈에 새긴 다짐도 무력해지는 법이라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게 사랑이니 준비도 할 수 없다고.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거라.”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씁쓸하게 읊조리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고단해 보였었다.
‘나도 그렇게 운명에 굴복하게 되는 것인가.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클로디안이 피식, 자조를 흘렸다.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아서.
한 명과 수천 명.
고민해 보지 않아도 당연히 한 명을 선택하지 않겠는가.
정녕 그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는 저주를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인가.
얼굴을 묻은 두 손 사이로 마른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황태자를 만나고 돌아온 데이먼이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죽은 신수의 부활이라니.
자신이 말해놓고도 웃음이 났다.
“부활이 가능했으면 카이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도했겠지.”
생명체의 부활은 신의 영역.
아무리 신의 권능을 받은 신수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신에게 버림받은 자신이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굳이 거짓말까지 하며 황태자를 현혹한 것은 그에게서 얻어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로웨나 케인. 아주 재미있는 게 굴러들어왔어.’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신력이 깃든 물건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게다가 예상보다 더 카이스의 사랑을 받고 있지 뭔가.
데이먼이 낄낄거리며 웃어대자 하이에나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비댔다.
“조만간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손에 넣게 생겼군.”
데이먼이 입맛을 다시듯 붉은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신수나 가질 법한 순수한 신력을 가진 인간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굴러 들어왔다.
그 인간 한 명이면 수천 명의 인신제물로도 얻을 수 없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과거의 힘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거란 상상에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카이스, 네 안목 하난 인정해주지.”
어디서 그렇게 귀한 것을 찾아냈는지.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질투가 일었다. 언제나 최상의 것만 가지는 그에게.
신의 사랑도, 반려도, 심지어 귀한 인간까지. 왜 항상 그에게만 모든 것이 주어지는지.
배가 뒤틀리는 기분에 환하게 웃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네게 아끼는 것이 생겼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이번에도 갈가리 찢어서 다시는 못 쓰게 만들어 주지.
양쪽으로 미끼를 던져두었으니 곧 신호가 올 터.
또다시 절망하며 울부짖는 카이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아껴줘.”
그래야 네 절망이 더 깊어질 테니.
“이번엔 특별히 네 눈앞에서 선보여 줄게. 기대하고 있어, 카이스.”
데이먼이 환희에 젖은 낯으로 중얼거렸다.
* * *
띠링!
『명성이 올랐습니다.
현재 명성 : 450』
엘렌 후작부인을 이용한 다이아몬드 홍보 전략이 먹힌 모양이었다.
‘아니면 신년제에서 대공과 춤을 춘 게 영향이 컸던 걸까?’
처음으로 공식 행사에 나타난 대공과 춤을 춘 것도 모자라 황태자와도 춤을 춘 탓에 주목을 많이 받긴 했지.
‘명성이 오른 건 좋은데. 귀찮긴 하네.’
나는 테이블 위에 한가득 놓여 있는 초대장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로벨라의 꾸준한 매출 성장을 위해서 적당한 사교 활동은 필요하지만.
“이건 다 스승님과의 사이가 궁금해서 보내온 것들이잖아.”
초대장의 발신인이 대부분 젊은 영애들인 걸 보면 의도가 뻔했다.
신년제에서 대공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 영애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어딜 감히.’
스승님은 내 거란 말이지. 눈독 들이지 말라고.
나는 초대장들을 옆으로 밀어 놓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지난번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나이아스의 샘물
종류 : 정화제
샘의 님프, 나이아스가 만든 정화제로 사술을 파훼하거나, 독을 정화할 수 있다.』
“오, 유용한 아이템인데?”
샘물이라고 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완전 득템했네.
황제도 모자라 요수까지 상대해야 하는 내겐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분명 황가의 비사와 에이바의 알껍데기가 사라진 걸 황제도 알게 되었을 텐데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물론 밖으로 알릴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너무 조용하지 않은가.
‘원래 조용한 게 더 무서운 법이랬어.’
태풍이 오기 전에 고요한 것처럼.
“흠, 도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발을 까딱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저 조이예요.”
“들어와.”
“하퍼 공자님이 찾아오셨는데 응접실로 모실까요?”
애런이? 며칠 전에 봤는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일단 고개를 끄덕이자 조이가 함께 온 시녀에게 애런의 안내와 다과를 부탁했다.
“공자님이 방문하신 건 오랜만인 것 같아요.”
치장을 위해 다시 들어온 조이가 내 머리를 빗어주며 말했다.
“근위대 일로 바빴다고 하더라고.”
“너무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주방장님께 보신에 좋은 음식을 부탁드려야 할까 봐요.”
당연하다는 듯 애런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에 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어릴 적부터 왕래가 잦은 데다 아버지께서 항상 애런의 식사를 챙긴 탓에 다들 애런이 오면 당연히 식사를 하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여기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봐야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자, 다 됐어요.”
격식을 차려야 되는 자리는 아니기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옷만 갈아입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애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나, 잘 지냈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앉자 더욱 온화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는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순간 악취가 코를 찔러왔으니까.
‘왜 여기서 요력의 악취가 나는 거지?’
나는 찡그려지려는 얼굴을 애써 펴며 주위를 살폈다.
이 응접실은 내 방과 연결된 곳이라 오늘만 해도 몇 번을 지나다녔지만 악취가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애런에게 향했다.
‘왜 갑자기 애런에게서 악취가 나는 거지?’
갖가지 의심과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로나, 왜 그래? 혹시 몸이 안 좋은 거야?”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 애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심해지는 악취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는데 애런에게서 이상한 것이 보였다.
그의 머리 위로 검은색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애런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어딘가 이상했다.
‘잠깐, 기운이 느껴진다고?’
레벨이 많이 오른 덕에 인기척을 잘 느낄 수 있게 됐지만 상대의 기운을 읽어내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기운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