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클로디안은 다시 한 번 찬찬히 눈앞의 사내를 살펴보았다.
문득 아버지의 침실에서 보았던 황가의 기록이 생각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엘페르 1세에게 대공을 굴복시킬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남자.
대공저에서 신수의 알을 훔쳐와 알에 걸린 가호를 해제시켰던 인물.
그 자와 외형이 비슷했다.
‘혹시 이 자도 인간이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살아있을 리 없지 않나. 그것도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무엇보다 판타시아 별궁을 만들었다면 평범한 이는 아닐 터.
아니나 다를까 대공과 비슷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다만 이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이상하게 질척하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함께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대공과 달리.
“제가 누구인지 더는 설명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이미 비사(祕史)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걸 어떻게……?”
클로디안의 녹안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황제 폐하의 침실에는 결계가 둘러져 있지요. 한 나라의 군주란 위협을 많이 받는 자리이지 않습니까?”
결계란 말에 클로디안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나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던 거지?”
“황태자이시니까요. 뭐, 폐하께 살의를 품고 계셨다면 전하라고 하더라도 들어가지 못하셨겠지만.”
데이먼이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클로디안은 어쩐지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나를 찾아온 목적이 뭔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이였다. 아버지께서도 언급은 물론 소개해 주려고도 하지 않으셨지.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인가? 그것도 막 비사(祕史)를 확인한 시점에.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요.”
사내가 천연덕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엇을?”
“저에 대해서? 계속 저를 쫓지 않으셨습니까?”
태연한 물음에 클로디안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나를 감시했던 건가?’
그동안 그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던 것인가?’
“아, 안심하십시오. 폐하께는 적당히 걸러서 말씀드렸으니.”
사내는 마치 클로디안의 생각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대꾸했다.
‘이 자는 위험하다.’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경계해야 할 건 대공이 아니라 이 자라고.
‘선조들은 왜 이런 자와 손을 잡은 것일까. 아버지께서는 이 자와 어디까지 얽혀 계신 거지?’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음, 뭐가 궁금하실까? 아, 제 이름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저는 데이먼이라고 합니다.”
“그대가 이곳에 온 걸 아바마마께서도 아시는가?”
“아니요. 제가 도움을 드리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폐하의 신하는 아니거든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선 오만함이 느껴졌다.
순간 클로디안은 생각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압도적인 힘으로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면 함부로 덤벼서는 안 될 상대였다.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그대로 잡아먹히게 될 테니.
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폴루티아도 그대가 창조한 것인가?”
“제 작품을 알아봐주시니 영광입니다.”
데이먼의 확답에 클로디안은 허물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가다듬었다.
‘황가가 폴루티아를 만든 원흉과 한배를 타고 있었다니.’
부디 이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바랐는데. 눈앞이 아찔했다.
도무지 신민들을 볼 낯이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겠다고 제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일에 동조하고 있는 황가라니. 군주로서 실격이었다.
“황가와 저는 협력관계이지요. 저는 판타시아를 제공하고 황가는 제 폴루티아를 보호해주고.”
“황궁에 노예들을 들인 것도 그대가 한 일인가?”
“아니요.”
데이먼이 곤란하다는 듯 살풋 얼굴을 찡그렸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판타시아 별궁이 어떻게 유지 되는지.”
클로디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버지의 침실에 숨겨져 있던 황가의 기록에는 저주를 피하는 방법도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저자의 술법과 인신제물.
그것으로 판타시아 별궁이 유지되고 있었다.
추모탑에서 봤던 그 많은 노예와 죄수들이 모두 아버지의 연인, 그 한 사람을 위해 바쳐지는 제물이라니.
이렇게 끔찍하고 충격적인 진실이 또 어디 있을까.
“저는 방법을 알려드릴 뿐 선택은 언제나 당대 황제 폐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황제의 선택이라.
‘나도 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걸까.’
역대 황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갑자기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만 같았다. 손에는 피가 질척하게 묻어 있는 환상이 보였다.
“우욱.”
순간 토기가 치밀어 얼른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겨우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있다니.
자신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고 역겨웠다.
“이런, 이런. 생각보다 심약하시군요.”
신선한 반응이라는 듯 데이먼의 흑안이 반짝거렸다.
조롱하는 것만 같은 그의 시선에 클로디안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인간의 목숨을 한낱 파리보다도 못하게 여기는 자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자가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수작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클로디안이 차갑게 머리를 식히며 허리를 바로 폈다.
“우리에게 선택권을 줬다? 아니, 그대는 우리가 판타시아를 선택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이용하도록 만들 사람이야. 아니 그런가.”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합니다만. 저는 어떤 경우에도 강요를 한 적이 없습니다.”
“폴루티아.”
클로디안이 던진 한마디에 데이먼의 흑안이 날카롭게 빛났다.
찰나이긴 했지만 클로디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매가 살짝 휘어졌다.
“그대에겐 폴루티아가 필요하고 그곳을 보호하기 위해선 황실의 협조가 있어야 하지. 그러니 황실을 통제할 목줄로 판타시아를 이용한 게 아닌가.”
첫인상에 알아봤다. 뱀처럼 간교하고 교활한 자라는 걸.
그런 이가 아무 이유 없이 도움을 베풀 리가. 그것도 기약 없는 일을.
“황실에서 폴루티아에 토벌팀을 보낸다고 해서 제가 막지 못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막을 수는 있지만 타격이 있겠지.”
정곡을 찌른 것인지 데이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황실은 폴루티아를 정화시킬 능력이 없습니다.”
“버몬트 대공도 엄연히 황실의 일원일세.”
대공을 언급하자 데이먼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대공과 저자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대공의 반려를 노릴 리가 없지 않은가.
과거의 정황을 떠올려보면 저자는 교묘하게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면서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황실만 이용당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적선하듯 판타시아를 만들어 주고 은인인 체 하다니. 지금도 이용하고 있는 주제에.
괘씸하다 못해 분노가 끓어올랐다.
클로디안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데이먼을 응시했다. 그에게 굽힐 이유가 하등 없었으므로.
데이먼이 그런 클로디안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미있네요. 대공이 황실의 일원이라니.”
너희가 대공에게 한 일을 모르느냐는 눈빛에 클로디안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령 대공이 폴루티아를 모두 정화한다고 해도 저는 황실을 도울 겁니다.”
진정 대공이 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저런 어수룩한 거짓말에 속을 애송이로 보이는 거겠지.
클로디안이 새어나오려는 조소를 애써 삼켰다.
“혹 대공이 황가의 저주를 풀어줄 거라 기대하시는 겁니까?”
클로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난 후 남은 기대마저 모두 무너졌으므로.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데이먼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조만간 제 도움이 필요하시겠군요.”
클로디안은 ‘네 도움 따윈 필요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니.
아버지처럼 사랑에 빠져 비인도적인 일을 자행할 날이 올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나는 절대 그런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떼어내 갔으면 좋겠다. 사랑을 할 수 없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괴물보다는 감정이 없는 괴물이 더 낫지 않을까.
클로디안이 괴로운 듯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지그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데이먼이 한 발 가까이 다가와 몸을 숙였다.
“인신제물이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뱀의 속삭임처럼 낮고 은밀한 음성에 클로디안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제가 전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있다마다요.”
클로디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데이먼이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황가의 기록과 함께 있던 알껍데기를 보셨지요?”
클로디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껍데기가 무엇인지는 기록을 보고난 후에 알게 된 터였다.
“신수의 알껍데기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신력이 남아 있지요.”
“너무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나.”
“껍데기가 보관되어 있던 공간은 제 술법으로 보호되고 있으니 시간은 상관없답니다.”
“신력이 남아 있다 한들 주인은 이미 죽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신력으로 대공의 반려를 부활시킬 수도 있으니 아주 소중한 신력이지요.”
클로디안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가 이내 사납게 변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나를 기만하려는 건가.”
“믿지 않으시면 할 수 없지요.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기에는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로운 태도에 클로디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대가 신도 아닌데 어떻게 죽은 이를 부활시킨다는 말인가.”
정말 허황된 말이었다. 분명 그러한데 왜 자꾸 귀가 기울여지는 것인지.
스스로의 모순된 행동에 클로디안이 자조를 흘렸다.
“말씀하신대로 제가 어찌 감히 신의 권능을 흉내 낼 수 있을까요? 다만 신의 힘, 신력이 그걸 가능케 해준답니다.”
신력은 대공이 가진 힘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공도 제 반려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건가? 그런데 왜 부활시키지 않았지?
클로디안의 의문을 알아챈 데이먼이 빙긋 웃었다.
“대공은 신벌을 받지 않았습니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클로디안을 보며 데이먼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클로디안에게 죽은 신수를 부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차근히 설명했다.
알껍데기에 있는 신력으로 죽은 신수의 영혼을 불러온 뒤,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에게 안착시키면 된다는 것.
신의 축복을 받게 되면 신력이 생기게 되니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신력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힘. 근원이 같으니 각자 가진 신력이 서로를 끌어당기게 되고 하나로 융합될 수 있는 것이지요.”
데이먼이 가벼운 어조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아바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는 건가?”
“아니요.”
바로 떨어지는 대답에 클로디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바마마께는 왜 말씀드리지 않은 거지?”
“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 없었으니까요.”
“뭐?”
“황실에 저주가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력을 가진 인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조언을 드린들 희망고문밖에 더 되었겠습니까?”
“그럼 어째서 내게는……?”
“나타났으니까요. 죽은 신수를 살릴 수 있는 인간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클로디안이 뒤늦게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의 녹안이 충격과 경악으로 잘게 흔들렸다.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겨우 표정을 가다듬은 클로디안이 모른 척 대꾸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로웨나 케인.”
당신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눈빛에 클로디안이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