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로웨나가 휴게실을 나간 뒤에도 애런은 한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정말 발이 아프도록 뛰어다녔었다.
황태자의 명령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노예와 폴루티아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다녔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왜 노예들을 황궁에 가둬두신 걸까? 그 제단은 도대체 무엇이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명쾌한 해답이 나오기는커녕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애런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시어스와 샤밀란 백작가 그리고 황제는 무슨 이유로 노예들을 황궁에 들인 것일까.
‘그 제단이 단서일 것 같은데.’
겉으로는 아무런 표식도 보이지 않아서 좀처럼 용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답답해.’
애런이 셔츠의 단추를 풀며 고개를 젖혔다.
황제는 대공을 경계한다. 대공은 황제를 경멸한다.
그건 서로를 향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황제는 노예를 풀어준 이가 대공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문제는 그 자리에 로나도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느냐 여부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로 폴루티아가 황제와 연관이 있다면 황제는 로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대공은 쉬이 손대기 어렵겠지만 로나는 아니지.’
사냥을 할 때는 상대적으로 약한 것들을 먼저 처리하는 법이다.
그러니 황제는 대공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도 로나를 건드릴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라면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어.’
제 아무리 제국의 금권을 쥐고 있는 케인 백작가라도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긴 어려울 터.
무도회 내내 황제의 시선이 로나에게 닿을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애초에 대공과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대공보다 먼저 로나를 발견했다면 로나가 그와 만나지 않게 되었을까?’
로웨나가 호수에 빠졌던 날을 떠올린 애런이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그때 이미 두 사람은 사제 관계였으니 그 전에 막았어야 했다.
‘제페스, 그래. 로나가 제페스와 헤어졌을 때 자주 찾아가 봤어야 했어.’
호신술도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고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근위대 일로 정신이 없어서 로나를 살피지 못했다.
이제야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다.
어떻게 해야 황제의 칼날에서 로나를 구할 수 있을까.
‘우선은 대공과 거리를 두게 만들어야 해. 그리고 폴루티아에도 못 가게 해야 하는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해머가 없었다면 폴루티아에도 가지 않았을 텐데.
‘아, 그래. 팔찌!’
로나가 그랬었다. 수장고에서 찾은 팔찌 때문에 해머를 얻게 되었다고.
팔찌를 없앤다면 로나도 폴루티아를 포기하게 될지도 몰랐다.
‘설령 없앨 수 없다고 해도 잠깐 동안만이라도 팔찌를 숨길 수 있다면 로나를 보호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팔찌를 숨길 수 있을지 고민하던 애런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지 두통이 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도회장 밖으로 향했다. 찬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화려했던 정원엔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군데군데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 아래 상록수의 푸른 잎들이 어른거렸다.
찬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지끈거리던 두통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표정이 한결 편안하게 풀린 애런에게로 누군가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하퍼 경.”
“누구신지……?”
“접니다, 로이스 슐레만.”
사내가 대답함과 동시에 애런의 벽안이 잠시 초점이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아, 슐레만 경.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밝게 웃는 사내의 머리카락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황금처럼 반짝거렸다.
슐레만 경의 머리색은 짙은 갈색이었으나 애런은 사내의 머리색이 다름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슐레만 경을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애런이 미안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요즘 근위대 일로 바쁘셨나 봅니다. 백작저에도 자주 못 오신 걸 보면.”
“아, 네. 임무가 좀 많아져서요.”
“저, 그…….”
사내가 주위를 힐끗거리더니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애런이 의아하게 물었다. 슐레만 경이 이렇게 망설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가씨가 걱정 되어서요. 하퍼 경도 해머에 대해 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아가씨께서 해머를 사용하시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사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런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가씨의 실력이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 압니다만 폴루티아는 위험한 곳이지 않습니까?”
“아, 경도 저와 같은 걱정을 하고 계셨군요.”
애런이 드디어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감격했다.
“많이 걱정하고 계셨나 봅니다.”
“로나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애정이 담긴 음성에 사내가 가만히 애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런이 눈을 들자 금세 걱정 어린 표정을 가장했다.
“제게도 아가씨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사내는 충성스런 기사처럼 가슴에 손을 대며 진중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가씨를 지켜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퍼 경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슐레만 경은 말이 많지도, 자신이 모시는 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설령 상대가 모시는 이와 친한 친구일지라도.
그럼에도 애런은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저도 고민입니다. 아시잖습니까? 로나가 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뭐래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거.”
“알다마다요. 폴루티아도 문제지만 대공 전하와 가까이 지내셔도 될지 염려가 됩니다. 오늘 보니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서 말입니다.”
“경께서도 느끼셨군요. 저도 그 부분이 걱정되지만 로나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애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무심하고 자비가 없는 분이라고 하던데. 아가씨만 위험해지시는 건 아닌지.”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슬쩍 애런의 반응을 살폈다.
애런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대공을 몇 번 마주하지 않았지만 무심하고 냉랭한 사람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다만 로나와 있을 때 그는 어딘가 조금 달라보였다. 로나에게 향하는 시선에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황궁 호수에 빠진 로나를 구하러 달려왔을 때도, 무니스에서 산불을 진화하고 마수를 처리할 때도.
그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항상 로나를 지키고 배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슐레만 경의 우려에 완전히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 대공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으니까.
‘자신이 가진 것들을 위협받게 된다면 로나를 외면하게 될지도 모르지.’
생각에 잠긴 애런을 살피던 사내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해머가 없다면 아가씨께서도 무모하게 나서진 않으실 텐데.”
혼잣말 치고는 크게 읊조린 말에 애런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팔찌만 아니었어도 폴루티아에 갈 일은 없었겠지요.”
애런이 작게 중얼거린 말에 사내의 검은 안광이 번뜩였다.
뒤이어 사내의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애런을 둘러쌌다.
“이건……!”
순간 애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그가 검을 꺼내기도 전에 푸른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졌다.
“이래서 오러 유저들은 성가셔.”
금발의 사내, 데이먼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그가 더욱 요력을 끌어올리자 애런을 둘러싼 검은 연기가 짙어졌다.
“해머와 관련된 팔찌를 내게 가져와.”
그가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낮게 속삭였다. 애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몽롱해졌다.
그걸 확인한 데이먼이 요력을 거두며 애런에게서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고 얼마 후, 흐려졌던 애런의 초점이 점차 또렷하게 돌아왔다.
“아,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었지?”
그가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뒤늦게 정원에 나온 이유를 떠올렸다.
“팔찌를 어떻게 손에 넣지? 로나가 항상 하고 다니는 것 같던데.”
그는 다시 고민에 잠긴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황제의 침실을 다녀온 클로디안은 무도회장의 휴게실로 돌아왔다.
3층에 마련된 황족 전용 휴게실 중의 하나로 클로디안에게 배속된 곳이었다.
그는 로웨나의 예상과 달리 황제의 침실을 빠져나올 때 테라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곳 휴게실과 이어진 비밀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궁 내부에 만들어진 비밀 통로는 미로처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어 황족들도 전부 알지 못했다.
이 휴게실에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한 건 어릴 적 유희에서 비롯된 우연의 산물이었다.
아버지가 이곳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챈 뒤에는 그의 눈을 피할 때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다만 비밀 통로에선 아버지의 침실을 들여다 볼 수 없기에 안에 들어갈 땐 테라스를 이용한 것이었다.
클로디안은 진열장 옆 비밀 통로에서 나오자마자 그대로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그에게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비밀을 숨기실 수가 있나.’
드디어 마주하게 된 황가의 진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선조가 저지른 일은 스스로가 황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저열하고 비겁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모두 거짓이었어.’
유일한 희망이 대공이었는데.
자신의 반려를 죽인 황가를 어떻게 용서하겠느냔 말이다!
끝도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정녕 판타시아 별궁 외에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비참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왜 선조의 죄를 내가 짊어져야 하는 거야.’
엘페르 1세가 앞에 있었다면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다.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느냐고, 왜 끔찍한 저주를 우리에게 물려주었냐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쏟아낼 길이 없어 가슴만 타들어갔다.
‘이제 다 끝났어.’
클로디안이 무릎을 그러모으며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가져서는 안 될 욕심이었던 것이다.
‘카이스님께 가서 빌까? 몇 날 며칠이라도 사죄하면 돌아봐주시지 않을까.’
약속하셨는데. 진실을 알아오면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주신다고 했는데. 그건 거짓말이셨던 걸까.
눈가가 시큰거렸다.
울면 안 되는데. 아직 신년제는 끝나지 않았고 카밀라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클로디안이 애써 울음을 삼켰다.
카밀라는 지난번 수확제 때도, 이번에도 자신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었다.
혼인으로 보호해 주는 대신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자신의 계획에 협조해 주기로 거래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나가봐야 하는데.’
도무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클로디안이 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손에 쥐었다.
“누구냐!”
문 밖에는 근위대장과 대원들이 있으니 여차하면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다.
“황태자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꽤나 정중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신분을 밝혀라!”
클로디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원불명의 사내를 향해 단검을 겨누었다.
“황제 폐하의 자문관이라고 하면 아실런지요?”
클로디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앞의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화려한 금발에 미형의 외모.
처음 보는 이였다. 무엇보다 자문관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께 자문관은 없다.”
“아, 그럼 이렇게 말씀 드리면 아실까요? 판타시아 별궁의 창조자.”
사내의 유려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 순간 클로디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