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카이스는 로웨나가 건네준 알 조각들을 보고 무엇이냐고 묻지 않았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으니까.
백자처럼 매끈한 표면은 만져보지 않아도 그 감촉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지난날 매일 같이 어루만지고 닦아주었던 것인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어째서 이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지?’
설마하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보관하고 있던 것은 아닐 터.
그랬다면 오늘 황제가 그리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바라보진 않았겠지.
‘나를 조롱하기 위함인가?’
저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바는 아니었다.
저들의 헛된 욕망과 어쭙잖은 열등감 때문에 희생되었는데 죽은 뒤에도 모욕을 당해야 하겠는가.
저들에게 조금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아니,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들끓는 분노로 가슴이 뜨거워지다 못해 눈앞이 붉어졌다.
그의 분노에 반응하듯 대공저의 공기가 울부짖듯 진동했다.
‘아, 에이바.’
그가 버석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100년 전에도 지키지 못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모욕당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니.
반려로서 실격이 아닌가.
‘내가 밉겠지. 원망스러울 거야.’
그래도 각인만큼은 남겨주지 그랬어.
카이스가 허전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황제의 침실 테라스에서 로웨나를 기다리고 있을 때, 갑자기 심장에 통증이 느껴졌었다.
통증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그 결과 반려의 각인이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지독한 상실감에 몸서리가 처졌다.
100년의 잠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각인이었는데 왜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으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만약 그때 로웨나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황제가 거하는 본궁을 다 부숴버렸을지도.
카이스가 알 조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살아있기를 바랐는데…….’
너무 큰 욕심이었나.
각인에 기대어 겨우 숨을 쉬며 살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버텨야 하는 걸까.
알 조각들로 뻗어진 손이 차마 조각에 닿지 못하고 잘게 떨렸다.
한참을 허공에 머물러 있던 손이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조각에 닿았다.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감촉에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에이바는 항상 따뜻하고 생기가 넘쳤었는데.’
정말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미안하다.”
널 지켜주지 못해서.
바스러질 듯한 음성이 낮게 울렸다.
뒤이어 창백한 뺨을 따라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카이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적막한 침실 안에서 침몰하는 난파선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슬픔 속으로 침잠해 갔다.
그와 공명하듯 대공저 안의 모든 생명체들도 그 슬픔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그렇게 카이스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에이바를 애도했다.
한참 만에 눈을 뜬 카이스의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는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하염없이 조각들을 어루만졌다.
여전히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지만 왠지 에이바가 제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자신을 이만 놓아달라고.
따뜻한 성품의 그녀라면 혼자 남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그래서 내게 돌아온 거야? 이렇게 부서졌으면서도?’
카이스의 얼굴이 울 듯 말 듯 일그러졌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표정을 굳혔다.
신수의 알껍데기는 몸의 일부나 다름없어서 껍질에도 신력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 조각들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가의 기록서가 손상 하나 없었던 걸 보면 데이먼의 술법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게 분명해.’
황실 도서관의 비밀 서고가 자신의 술법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처럼.
그렇다면 에이바의 알껍데기에 깃들어 있던 신력도 보존되었어야 마땅했다.
‘누가 흡수하기라도 한 것인가?’
한낱 인간은 신력을 흡수할 수 없으니 설마 데이먼이?
그의 요력을 강화하는데 신력만큼 강력한 재료는 없으니 탐이 났겠지.
다만 타락한 그가 어떻게 신의 힘이 담긴 신수의 신력을 흡수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었다.
신력과 요력이 충돌하면 신체의 일부를 잃거나 최악의 경우 요력을 모두 잃고 소멸될 수 있는데 말이다.
판타시아 궁이나 황제의 침실을 둘러싼 결계가 건재했던 걸 보면 데이먼은 무사한 게 분명했다.
‘도대체 어떻게?’
순간 데이먼의 요력에서 나던 악취를 떠올린 카이스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요력에서 악취가 나는 이유, 그가 강해진 이유.
모두 금기를 어기고 인신제물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데이먼이 에이바의 신력을 흡수했다면 인간을 매개체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데이먼, 감히 에이바의 신력을 더럽히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그시 눈을 감아 분노를 갈무리한 카이스가 신력으로 새하얀 보석함을 만들어 냈다.
벨벳으로 감싸인 내부는 유리 공예품을 넣어도 깨지지 않을 만큼 폭신해 보였다.
알 조각들을 보석함에 넣은 그가 작별인사를 전하듯 조각들에 입을 맞추었다.
보석함의 단단한 뚜껑이 닫히고 그 위로 갖가지 신술 문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데이먼, 네놈이라고 해도 이번엔 절대 가져갈 수 없을 것이다.’
보석함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카이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앉아 있던 로웨나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나간 거지?’
아무래도 자신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군.’
황태자도 모자라 황제까지 들이닥쳐 정신이 없었을 텐데. 그녀의 배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테라스에서 로웨나를 기다리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혼자였다면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침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는 순간 로웨나도 위험해질 수 있기에 일부러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한 채로.
사실 황제가 그리 빨리 침실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해리의 새들을 이용해 황제가 무도회장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 침실로 향한 것이었으니까.
하필 그때 황태자까지 나타나 내심 당황했었다.
‘침실에 숨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온 것일까?’
뭐가 됐든 이제 그도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분명 다시 찾아올 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황태자는 조금 더 지켜보고 판단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일말의 동정도 들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 목을 비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해야 할 터였다.
카이스는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그들보다 로웨나가 먼저였다.
옆방은 로웨나가 폴루티아로 가기 전, 옷을 갈아입는 용도로 사용하는 손님방이었다.
사실 이 저택에 손님방 같은 건 없었으니 오로지 로웨나만을 위해 만든 방이었다.
방문 앞에 선 카이스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평소 같으면 로웨나가 ‘스승님!’하고 뛰어나왔을 텐데 문 너머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손님방은 단출한 그의 침실과는 다르게 침대와 소파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우뚝 멈추었다.
순간 그의 걸음이 빨라졌다.
로웨나가 정신을 잃고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거친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로웨나.”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흔들던 그가 움찔거리며 손을 떼었다.
뜨겁다.
그제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동그란 이마에 손을 대자 체온이 높은 그에게도 뜨겁다 느껴질 정도의 열기가 전해졌다.
늘 그래왔듯 신력으로 로웨나를 치료하려던 순간.
“……!”
그가 당황스럽게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신력이 듣지 않아.’
아무리 신벌을 받았다고는 하나 신력의 효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카이스가 다시 한 번 더 신력을 사용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조바심에 입안이 말라왔다.
그는 일단 로웨나를 안아들어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얼마나 불덩이인지 잠깐 닿았는데도 맞닿은 부위들이 후끈거렸다.
‘상태가 왜 이런 거지?’
대공저에 도착해서 알 조각들을 건넬 때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신력이 듣지 않는다는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데이먼의 요력이 영향을 미친 건가?’
카이스가 다시 꼼꼼하게 로웨나를 살폈다. 하나 요력은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눈도 뜨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로웨나를 보니 답지 않게 초조함이 밀려왔다.
심장이 조이는 것만 같은 느낌에 그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신력도 듣지 않는데 이를 어쩐담.’
그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카이스가 손가락을 딱하고 튕기자 그의 손 안에 작은 유리병이 생겨났다.
유리병 안에 든 하얀색 액체는 예전에 로웨나가 그에게 먹이려 했던 포션이었다.
‘이거라면 듣지 않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포션엔 신의 힘이 담겨 있었다. 로웨나가 사용하는 해머나 퓨릭서처럼.
그래서 신벌의 후유증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로웨나를 일으켜 품에 안은 카이스가 그녀의 입에 유리병을 대고 포션을 흘려 넣어 주었다.
그러나 로웨나는 정신을 잃은 탓에 포션을 잘 삼키지 못했다.
“이런.”
카이스가 로웨나의 입가에 흘러내린 포션을 닦아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포션을 입에 털어 넣고는 로웨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여린 턱을 잡아 내리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열기 어린 숨이 새어나왔다.
입술이 겹쳐지고 출구를 잃은 열기는 그대로 카이스에 의해 삼켜졌다.
포션을 조금씩 넘겨주었으나 그마저도 로웨나가 넘기지 못하자 그가 자그마한 혀를 부드럽게 내리 눌렀다.
그제야 포션이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카이스는 로웨나가 포션을 모두 삼킬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윽고 맞닿았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사과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던 뺨이 점차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가쁘게 내쉬던 호흡도 고르게 변해갔다.
작은 변화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살피던 카이스가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로웨나의 편안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제 입술을 매만졌다.
로웨나의 열이 전염된 것인지 아직까지도 열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맞닿았던 순간, 상실감으로 허탈했던 가슴에 이유 모를 충족감이 일었다.
뻥 뚫려버린 심장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카이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벚꽃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눈보라 속에 내던져진 것처럼 시렸던 몸이 지금은 따스한 봄볕 아래 누워 있는 것처럼 나른해졌다.
그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점차 깜박이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이내 눈꺼풀이 감겼다.
고요한 침대 위로 두 사람의 고른 호흡이 잔잔하게 얽혀들었다.
그 순간 카이스의 머리 위로 호감도 65%가 깜박거렸다.
한편, 방문 앞에 서 있던 필립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안정적인 숨소리에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금 고요해진 대공저의 공기를 느끼며 그의 얼굴에 안도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