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황제와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하며 진열장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에는 고급 양장본으로 된 책 한 권과 깨진 알 조각이 있었다.
그 뒤에 있는 진열장에는 붉은 검집에 든 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어? 저 검은?’
조금 전 보았던 그림에서 초대 황제가 들고 있던 검이었다.
그는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이 검을 세워서 붙든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붉은 날개 모양의 독특한 칼밑(Guard) 탓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게 목적이 아니었던가? 하긴 이게 여기 숨겨져 있는 줄도 모르겠지.”
황제는 책과 깨진 알 조각이 있는 진열장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엘페르 1세는 왜 그런 일을 벌여서는.”
그가 탄식과 함께 원망을 쏟아냈다.
“배짱 좋게 일을 벌였으면 대공까지 깔끔하게 처리했어야지. 이제 와서 나보고 어떻게 수습하라고!”
울분을 참지 못한 황제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뒤이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것만은 절대 들키면 안 돼. 이걸 어떻게 처분하지?”
진열장 주위를 불안하게 서성이던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칫했다.
“이게 목적이 아니라면 혹시……?”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사색이 된 황제가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시종장을 찾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황제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침실을 나갔나 보네. 그럼, 이제 느긋하게 살펴볼까?’
일단 퀘스트 해결을 위해 책부터 확인하려고 진열장으로 손을 뻗은 순간.
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드르륵, 닫혔던 벽이 다시 열렸다.
‘아, 맞다. 저 사람이 있었지.’
저 자도 여길 노리고 있던 건가?
나는 뒤로 물러서며 ‘은의 망토’ 스킬의 남은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 00 : 32 : 04 』
아직 시간이 여유 있긴 한데.
저 사람이 얼마나 여기 머물지 그리고 무엇을 노릴지 알 수가 없어서 긴장되었다.
‘저 책은 손대면 안 되는데.’
아무리 봐도 퀘스트에서 찾으라는 책인 것 같단 말이지.
나는 진열장으로 다가오는 사내를 경계하며 주시했다.
저 자가 책을 들고 도망가려고 하면 덮쳐서라도 뺏을 생각이었다.
진열장 앞에 선 사내가 복면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순간.
“……!”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클로디안이 왜 여길 들어온 거지?’
노예 사건과 폴루티아의 배후를 쫓고 있다더니 진심으로 황제의 뒤를 캐고 있는 건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왜 굳이 황제와 대립하려는 걸까?’
그의 행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클로디안은 초대 황제의 검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깨진 알 조각과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책을 꺼낸 그는 천천히 책의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설마 끝까지 다 읽으려는 건 아니지? 나 시간 없는데.’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 보자는 생각에 수시로 타이머를 확인하며 클로디안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는 어느새 책에 빠져들었는지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 어떤 지점에서 우뚝 멈추더니 그의 녹안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고장 난 목각인형처럼 고개를 든 클로디안이 깨진 알 조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상황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왜 저러는 거지?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길래?’
궁금한 마음에 발이 절로 움직였으나 애써 걸음을 붙들었다.
가까이 다가갔다가 자칫 위화감이라도 느끼면 어떡하나.
‘책은 놓고 나가라, 제발.’
여기서 몸싸움을 하면 아주 곤란해진단 말이다.
클로디안은 차마 알 조각에 손을 대지 못하고 한동안 굳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스킬 사용 시간은 착실하게 줄어갔다.
『 00 : 10 : 57 』
‘아, 쫌 빨리 나가라고!’
클로디안이 도무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할 수 없이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대공이 준 매개체를 꺼내 문을 탁탁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클로디안이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를 볼 수 없는 그는 잠시 의아해 하다가 책을 내려놓고 복면을 다시 썼다.
그리고 빠르게 비밀 공간을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책을 가지고 나갈까 봐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
나는 얼른 진열장 안으로 손을 넣어 책을 만져보았다.
『도서명 : 아카르트 황가의 진짜 비사(祕史)
퀘스트와 관련된 도서입니다.』
‘찾았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띠링!
『히든 퀘스트 ‘황가의 진짜 비사(祕史)를 찾아라.’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나이아스의 샘물’이 지급되었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와 함께 손에 쥐고 있던 책이 인벤토리로 옮겨졌다.
‘아, 이거 없어진 걸 알면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이를 어쩌나.
그렇다고 책을 다시 돌려놓을 방법은 없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다시 진열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책이 없어진 걸 알면 난리가 날 텐데 이거 하나 더 가져갔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
나는 깨진 알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심장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윽.’
혹여 신음이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을 부여잡으며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왜 이러는 거지?’
몸이 약해졌나? 아니면 스킬에 문제가 있는 건가?
더는 길게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타이머가 붉은색으로 깜박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알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조각들을 집을 때마다 심장에 격통이 일었지만 꾹 참고 계속 조각들을 꺼냈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내가 손을 대는 족족 알 조각들이 인벤토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퀘스트와 관련된 물건도 아닌데 왜?’
하지만 의문을 해결할 시간은 없었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 했으므로.
마침내 마지막 조각까지 다 옮기자 격통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은 뻐근했다.
『‘은의 망토’ 스킬 사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00 : 03 : 55』
시스템의 경고음과 함께 붉은 메시지가 떴다.
나는 억지로 걸음을 움직여 출입문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커다란 그림 앞에 섰다.
‘아까 황제가 눌렀던 곳이 여기였던 것 같은데.’
신 옆에 덧칠된 부분. 황제는 분명 그곳을 눌렀었다.
그와 똑같이 그곳에 손을 대고 누르자 스르륵 벽이 돌아가며 문이 닫혔다.
그 순간 보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붉게 빛나는 어떤 형상을.
그림을 덧칠한 이유.
그것은 그 아래 그려진 존재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고, 불꽃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새.
피닉스를 가리기 위해서.
‘건국신화의 주인공이 피닉스였어.’
나도 모르게 시선이 테라스 너머로 향했다.
그 뜨거운 불꽃이, 태양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누군가와 꼭 닮아 있어서.
테라스로 나가자 우두커니 서 있는 대공이 보였다.
클로디안은 이미 빠져나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른 대공의 손을 붙들었다. ‘은의 망토’ 스킬 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스승님, 저 결계 사용 시간이 다 되어가요.”
“……아.”
가슴에 손을 댄 채 멍하니 서 있던 대공이 그제야 내게 시선을 내렸다.
마주잡은 손에 붉은빛이 어리고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제한 시간이 다 되어 ‘은의 망토’ 스킬을 해제합니다.』
무사히 침실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데 대공의 상태가 영 이상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어딘지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시선은 나를 향해 있으나 어째서인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특히나 상실감에 젖은 눈빛이 어찌나 아프게 보이는지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스승님, 괜찮으세요?”
대공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사이 클로디안이 오고 간 일밖에 없을 텐데 왜 이러시는 거지?
“스승님, 대공저로 가요. 여기 더 있다가는 위험할 것 같아요.”
위험하다는 말에 그제야 대공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찾아야 할 건?”
“찾았어요. 그러니 여기서 빨리 벗어나요.”
대공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신술을 이용해 대공저로 이동했다.
그는 자신의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침대로 다가가 앉더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문도 잠시, 우선 인벤토리를 열어 황가의 기록서와 깨진 알 조각을 꺼냈다.
지금이 아니면 꺼낼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대공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스승님, 어디 아프신 거예요?”
오늘 신력을 많이 사용하신 건 아닌데.
혹시 신년제에 오기 전에 신력을 쓰실 일이 있으셨나?
“……괜찮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대공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의 낯빛이 확실히 좋지 않았다.
“그보다 황제의 침실에서 별일은 없었나? 황태자도 모자라 황제까지 나타났던데.”
“좀 당황하긴 했지만 큰일은 없었어요.”
“다행이군.”
정말로 나를 걱정했던 것인지 그의 얼굴에 깊은 안도가 서려 있었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대신 그가 궁금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황제가 침실 안에 새로운 비밀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나는 대공이 가르쳐 준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책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황제가 한 말들과 클로디안의 반응까지 상세하게 전달했다.
“이게 바로 진짜 황가의 비사(祕史)예요.”
대공에게 책을 건네자 그가 책장을 넘겨보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아서 함께 책 내용을 살폈다.
책에는 예전에 대공이 해 주었던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엘페르 1세가 에이바를 죽여 신벌을 받게 된 일 그리고 그 이후로 황족의 연인들이 어찌되었는지까지.
또한 판타시아 별궁에 대해서도 설명되어 있었다.
엘페르 1세가 저주로 사랑하는 황후를 잃은 뒤 충격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인 엘페르 2세가 황위에 올랐을 때.
금발의 주술사 도움으로 판타시아 궁을 만들게 되었다고.
더불어 판타시아 별궁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클로디안은 황가가 저주를 받은 이유를 몰랐던 모양이네.’
그러니 이 기록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겠지.
지난 2회차에서도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된 것일까? 그래서 날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한 걸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런다고 죄가 가려지는 게 아닐 텐데.”
기록을 모두 확인한 대공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들이 진정 저주를 풀고 싶었다면 신은 물론 대공에게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요수와 손잡고 신의 눈을 피할 궁리를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대공이 말하는 죄라는 건 비단 에이바를 죽인 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을 제물로 사용한 죄, 신을 기만한 죄. 그걸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승님, 그 방에 기록서 말고 다른 것도 보관되어 있었어요.”
나는 알 조각이 담긴 손수건을 조심스럽게 대공에게 건넸다.
의아하게 손수건을 바라보던 그는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