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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98)화 (98/140)

98화

황궁에는 도서관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외궁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황궁 관리나 황궁에 방문한 이들이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한 곳은 내궁에 있는 도서관으로 황족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대공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궁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비밀 서고라고 해서 은밀한 장소에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도서관 안에 있다니 조금 김이 샜다.

“아무도 없나 봐요.”

“신년제가 열리는 중이니까.”

하긴 밤도 깊었는데 사서도 퇴근했겠지.

덕분에 우리는 마음 편히 도서관을 누빌 수 있게 되었다.

황족 도서관은 외궁 도서관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3층 높이의 벽면에는 책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특히나 황족 도서관은 고서나 희귀본들이 많아 학자라면 누구나 탐내는 곳이었다.

“비밀 서고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2회차 때 클로디안의 특별 허락을 받고 이곳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비밀 서고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대공은 대답 대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가 도착한 곳은 2층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가였다.

‘흠, 이곳에 비밀 공간 같은 게 있는 건가?’

나는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혹시나 건국신화와 관련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서가와 마주한 벽에는 어떤 그림이나 장식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근처 서가에 꽂힌 책 제목들을 살펴보았지만 그 역시 건국신화에 관련된 건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여기 비밀 서고 출입문이 있는 건가요?”

“여기.”

대공이 막다른 길에 있는 회색 벽을 가리킨 뒤 그곳에 손을 대었다.

아무 것도 없던 벽에 처음 보는 문양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서재처럼 생긴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고급 양장으로 제본된 책들이 책장에 정갈하게 꽂혀 있었다.

“관리가 무척 철저하게 이루어지나 봐요.”

자주 이용하는 곳도 아닐 텐데 책장에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곳은 신력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그래서 책이 낡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지.”

신력? 그럼 설마?

“혹시 여기 스승님께서 만드신 곳이에요?”

“만들긴 초대 황제가 만들었지. 난 신술로 도와줬을 뿐이고.”

아, 그래서 이렇게 잘 아시는 거였구나.

그럼, 여기는 아닐 가능성이 높겠는데?

숨기고 싶은 기록이라면 대공의 눈도 피해서 보관했을 테니까.

기운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왔으니 확인은 해봐야겠지?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두꺼운 책 위에 손을 대보았다.

『도서명 : 셀레르노 2세의 개인 기록

해당 도서는 퀘스트와 무관합니다.』

아하, 이렇게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었군.

일일이 확인해 봐야 한다는 점이 귀찮지만 자린고비 시스템이 준 힌트 치고는 유용했다.

나는 비밀 서고에 있는 책들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 중에 내가 찾는 건 없었다.

“스승님, 여기는 없어요.”

“이곳에 따로 숨겨진 공간은 없다.”

조용히 벽면에 기대어 서 있던 대공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침실 먼저 가볼까요?”

분명 황제는 신년제가 끝나자마자 침실로 올 테니 그 전에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공은 이번에도 먼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정확히 말하면 침실에 딸린 테라스에 도착했다.

“스승님, 왜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어요?”

“데이먼이 결계를 쳐 놓아서.”

대공이 테라스 문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이렇게 악취가 나나 했더니, 쯧.’

다행히 아직 황제가 오지는 않았는지 불이 꺼진 침실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못 들어가는 건가요?”

“들어가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결계에 닿자마자 들킬 거다. 내 존재 자체가 요력과는 상극이니.”

“저도 감지할까요?”

“해머를 꺼내지 않는 한 너를 알아차리지는 못하겠지.”

“그럼, 저 혼자 다녀올게요.”

대공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답 대신 눈썹을 찌푸렸다.

“황제가 오기 전에 확인해 봐야 하잖아요.”

“내 신술은 결계에 감지될 수 있으니 은신 결계도 해제해야 한다. 괜찮겠나?”

“제 걸 사용하면 되죠. 설마 제 것도 감지할까요?”

‘은의 망토’ 스킬은 시스템이 부여한 것이니 이 세계 어떤 것도 감지하지 못하…….

잠깐, 대공은 내 은신 결계가 안 통했잖아. 혹시 그럼 요수도?

“데이먼은 신의 권능을 잃었으니 널 보지 못할 거다. 이 결계 또한 널 감지하지 못할 거고.”

정말 그런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대공을 믿어봐야지, 별 수 있나.

“이걸 지니고 들어가도록 해.”

대공이 내민 검은 돌멩이는 판타시아에 있던 주술의 매개체였다.

안 그래도 침실에 둘러진 결계 때문에 코가 썩는 것 같은데 이 악취 덩어리까지 들고 다니라고요?

“요력이 강한 물건이니 네 존재감을 감춰줄 거다.”

“아, 네.”

데이먼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나는 냉큼 그 돌을 받아 옷 주머니에 넣었다.

“45분을 넘길 것 같으면 바로 나오도록 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니까.”

“네.”

속으로 ‘은의 망토’를 외치자 시스템창이 열렸다.

『액티브 스킬 ‘은의 망토’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나는 팔찌를 낀 손을 들어 팔찌를 누르는 척 시스템창을 터치했다.

‘예’를 누르자 바로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은의 망토’ 스킬이 활성화 됩니다.

제한 시간  00 : 45 : 00』

잡고 있던 대공의 손을 놓자 차가운 밤바람이 스쳐지나가며 남아 있던 온기마저 앗아가 버렸다.

허전한 느낌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가만히 손을 움켜쥐었다.

‘빨리 끝내고 와서 다시 잡아야지.’

나름 결연한 각오를 다지며 테라스 문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문을 당겨 보았지만 잠겨 있는지 열리지 않았다.

요수의 결계만 아니면 해머로 부수거나 대공의 신술로 바로 열 수 있었을 텐데.

‘음, 어떡해야 하나. 머리핀으로 열 수 있지 않을까.’

적당한 걸 찾기 위해 머리꽂이들을 더듬는데 눈앞에 길쭉한 무언가가 쓱 들이밀어졌다.

“……?”

“이걸로 열면 열릴 거다.”

아무 장식도 없는 꼬챙이는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 걸까?

물끄러미 꼬챙이를 바라보고만 있자 대공이 나를 살짝 밀어내며 문 앞에 섰다.

꼬챙이를 문틈 사이로 밀어 넣고 위 아래로 움직이자 ‘달깍’하고 걸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이 땅의 수호자이며 아카르트 제국의 대공이신 분이 문을 따는 기술은 왜……?

“오래 살다 보면 여러 가지를 익히게 되는 법이지.”

그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오래 산 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에요?

신벌을 받기 전에는 신술을 자유자재로 쓰셨을 분이 이런 잡기는 대체 왜 익히신 거람.

어쨌든 도와준 건 고마운 일이니 인사는 해야겠지.

“감사해요.”

“침실과 연결된 비밀 통로의 위치는 잊지 않았겠지?”

여기 오기 전 대공이 황제의 침실과 집무실 각각에 연결된 비밀 통로의 위치를 알려 주었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살펴보고 나올게요.”

테라스 문은 소리도 없이 조용히 열렸다. 얇은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자 어두운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방안으로 비쳐 드는 달빛에 사위가 구분되긴 했다.

‘흠, 여기 벽난로 옆에 비밀 통로가 있다고 했었지.’

황제의 침실이 아니랄까 봐 가구들은 물론이고 벽난로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황금을 어찌나 덧발랐는지 한낮이 아님에도 주위가 환하게 빛날 정도였다.

‘벽난로 위에 놓인 장식들을 움직이면 된다고 했는데.’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조각상들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거울에 비친 무언가를 보고는 멈칫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거울 맞은편에 있는 벽면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벽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커다란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갑옷을 입은 흑발의 사내가 신으로 보이는 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그림.

신으로부터 왕관을 하사받은 사내의 머리 위로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모습은 분명 건국신화의 한 장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시스템이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찾으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여기에 황실의 비사(祕史)가 숨겨져 있는 건가?

나는 다시 한 번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신으로부터 왕관을 받은 사내는 당연히 초대 황제일 테고.

그 주위에 서 있는 이들은 머리색과 가문의 문장을 보니 개국 공신 가문들인 것 같았다.

체임버 공작가와 하퍼 공작가 그리고 올리안 공작가.

‘이 세 가문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고. 남은 건 신 아니면 초대 황제인데. 저건 뭐지?’

신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광채가 어딘가 이상했다. 오른쪽 부분이 유독 부자연스럽게 보인 달까.

‘새로 덧칠한 건가?’

제대로 확인해 보고자 손을 뻗는데 갑자기 테라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승님이신가?’

아니야, 움직임이 무거워.

스승님은 건장한 체격과 달리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는 분이셨다.

‘누구지?’

뭐, 상관없나? 어차피 결계 때문에 들어오지 못할 테니.

그러나 침입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나야 어떤 결계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 그렇다 쳐도 저 사람은 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내는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침실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이곳이 능숙한 듯 거침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향한 곳은 침대 밑이었다.

‘어? 침대 밑에는 왜 숨어?’

어리둥절하게 침입자를 살펴보고 있는데 이곳으로 향하는 발소리들이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들어와 등을 밝혔다.

뒤이어 들어온 황제가 겉옷을 벗어 시종장에게 건넸다.

“모두 나가.”

황제의 날카로운 외침에 시종장을 비롯한 사용인들 모두 밖으로 물러났다.

“빌어먹을. 왜 갑자기 황궁에 나타난 거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 황제가 씨근덕거리며 짜증을 냈다.

그러더니 뭔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긴 그가 다다른 곳은 아까 보았던 건국신화 그림 앞이었다.

그림의 한 부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손을 뻗어 그 부분을 눌렀다.

그 순간 그림이 달려 있던 벽이 돌아가며 숨겨져 있던 공간이 나타났다.

‘저기가 비밀 공간인가 보네.’

대공도 몰랐던 곳인 걸 보니 그가 잠든 이후에 새로 만든 모양이었다.

아니면 선조들이 대공에게 비밀로 했던가.

‘따라 들어가야 하나?’

황제와 한 공간에 있는 건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스킬 사용에 시간제한이 있으니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황제를 따라 비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한눈에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방에 있는 거라곤 가운데 놓인 유리 진열장 두 개가 전부였다.

진열장으로 향한 황제는 그 안에 든 물건들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뭐가 있길래 저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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