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저희가 쫓고 있다기보다는 그 반대의 상황이죠. 아시잖아요. 그동안 저와 대공 전하가 무슨 일을 했는지.”
클로디안은 언제라도 요수 편에 설 수 있는 자다. 그러니 우리의 계획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았다.
“설마 그자가 그대를 위협하기라도 한 건가?”
순식간에 굳어진 얼굴 위로 걱정이 내려앉았다. 그게 꼭 진심처럼 느껴져 속이 울렁거렸다.
‘왜 나를 걱정하는 거지?’
우린 군신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한편으로는 조소가 흘러나왔다.
아비는 나를 납치해 죽이려 했는데 그 아들은 내 안위를 걱정하다니.
이 얼마나 모순되고 우스운 상황인가.
‘나를 위협한 자가 네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되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넌 나를 걱정할까? 아니면 아버지를 지키려 내게 칼을 겨눌까?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아 입 안이 씁쓸해졌다.
내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했는지 클로디안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자를 직접 만났나?”
어떻게 할까. 황제의 그림자를 만났고 나도 그 노예들처럼 추모탑에 갇혀 있었다고 말할까?
황제가 나를 요수에게 바쳐서 그자를 직접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해줘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애써 삼켰다. 클로디안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므로.
“직접 만나지 않고도 상대를 위협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죠.”
최근 카밀라가 겪은 일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클로디안은 잠시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하퍼 경이 걱정할 만했군. 당분간 대공을 따라다니는 건 쉬는 게 어떻겠나?”
“염려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는 괜찮아요. 스승님이 계시니까요.”
“대공이 강하다는 건 안다. 하나 우리가 쫓는 자는 정체도 알 수 없는 놈이야.”
역시 아직까지는 요수에 대해 모르는 것 같네.
뭐가 어찌되었든 클로디안과 협력할 생각은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퀘스트 해결이 우선이었다.
때마침 춤곡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와 몸을 사린다고 해서 그자가 절 쫓지 않을까요?”
클로디안도 반박할 말이 없는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미 눈에 띄었으니 그자를 찾아내 처리하는 것만이 제가 안전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마침내 춤이 끝나고 나는 뒤로 물러서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드려요.”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싱긋 웃자 클로디안이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려 있던 탓에 더는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돌아서기 직전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호감도를 확인했다.
호감도 41%.
‘언제 저렇게 올라간 거지?’
의심 받을 사건은 많았어도 호감을 이끌 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설마 오류인가?’
생각해 보면 클로디안의 호감도는 처음부터 이상했었다.
만난 적도 없는데 호감도가 올라가 있었으니까.
뭐가 어찌됐든 10%는 확실하게 넘겼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앞으로 만날 일도 별로 없을 테고.
클로디안에 대해서는 빠르게 관심을 접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저 나가셨나?’
붉은 머리가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니 대공이 먼저 나간 듯 했다.
그렇다면 나도 빠져나가야겠군.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와인을 한 잔 받아들고는 벽으로 향했다.
적당히 쉬는 척 하다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로나.”
그런데 언제 다가왔는지 애런이 내 팔을 붙잡았다.
“애런, 오랜만이야.”
못 본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 가나?
클로디안 때문에 폴루티아에 동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해도 나도 가지 말라고 설득할 거라 생각했는데.
애런은 그날 이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아, 스승님께서 기다리실 텐데. 이를 어쩐담.
나는 슬쩍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히든 퀘스트 제한 시간
04 : 39 : 15』
“잠깐이면 돼.”
내가 난감해 하는 걸 알아챘는지 애런이 말을 덧붙였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몇 마디 나누는 정도는 괜찮겠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나를 2층에 있는 휴게실로 데려갔다.
다른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근 애런은 창문도 닫고 커튼까지 쳤다.
“잘 지냈어? 그동안 별일 없었지?”
꼼꼼하게 나를 살피는 눈길에 걱정이 묻어났다.
“나는 잘 지냈어. 다친 곳도 없고, 아프지도 않았어.”
“다행이다.”
흐리게 미소 짓는 얼굴이 예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피부도 좀 거칠어 보이고.
“임무가 많았나 봐.”
“아, 이것저것 알아볼 것들이 있어서 조금 바빴어.”
내 시선을 느낀 애런이 머쓱하게 제 뺨을 매만졌다.
나는 무엇을 알아본 것인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지난번에 네가 했던 말들에 대해서 고민해 봤어.”
“…….”
“네가 날 걱정해서 한 말이라는 거 알아. 그래서 조사해 봤어.”
애런의 녹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직 폴루티아의 배후는 찾지 못했지만 지난번 노예 사건이 황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알아냈어.”
“황태자 전하께도 보고한 거야?”
애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전혀 모르고 계셨던 것 같아. 그러니 우리에게 조사를 하라고 하셨겠지.”
그 말은 즉 애런도 그 모든 일의 배후에 황제가 있다고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로나, 내 추측이 맞는다면 넌 지금 위험한 상황이야.”
애런이 한 번 더 주위를 살피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아까 보니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 사이가 심상치 않았어. 폐하께서 너도 주시하고 계실지 몰라.”
주시하다 못해 납치해서 죽이려 했지.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려고 대공이 신년제에 참석한 것이고.
할 말은 많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에 대한 믿음도 없거니와 더 이상 깊게 얽히는 건 좋지 않았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의 호감도가 높아질수록 1회차와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폴루티아에 위험한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며. 주술사나 마법사일 확률이 높아. 노예들이 갇혀 있던 곳에 이상한 제단이 있었거든.”
요수가 새로운 제단을 완성한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애런이 제단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가 오기 전에 내가 모두 파괴했었으니까.
“더는 추모탑에 노예들을 가두지 않나 보네.”
“노예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저들도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겠지.”
“새로 알아낸 곳도 황궁 안이야?”
떠보듯 꺼낸 말에 애런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도 내가 또 쫓아가서 노예들을 풀어줄까 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로나, 당분간만이라도 대공 전하와 거리를 두는 게 어떨까? 폴루티아에 가는 것도 쉬고.”
그의 벽안엔 나를 향한 순수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백작님을 생각해서라도. 응?”
아버지가 언급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이미 발을 빼기에는 늦었고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퀘스트를 하지 않으면 나는 소멸되고 말테니까.’
일단은 클로디안에게 받은 사면패가 있으니 황제가 무슨 수작을 부리든 한 번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요수를 처리해 버려야 해.’
요수가 없다면 황제쯤이야 대공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테니.
내가 긍정의 대답을 하지 않자 애런이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폴루티아에 가는 건 말리지 않을게. 다만 노예는 쫓지 마. 황궁을 조사하지도 말고.”
당장 수행해야 할 퀘스트가 황궁을 조사해야 하는 일이라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백작님과 네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제발 백작님과 널 지킬 수 있게 해줘.”
애런이 무릎을 꿇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황실을 조사하는 건 내가 할게. 난 근위대에 소속되어 있으니 너보다 조사하기가 유리할 거야. 그러니 내게 맡겨줘.”
애원하는 얼굴 위로 나를 제단에 버리고 차갑게 돌아서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렇게 나를 지키려고 애쓰면서 왜 1회차 때에는 나를 버린 거니?’
아니면 너도 이번 회차에 들어 변하게 된 걸까?
카밀라와 클로디안이 지난 회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처럼?
설령 그렇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의 애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알았어. 다만 너도 약속해줘. 위험해지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긍정적인 내 대답에 밝게 미소 짓던 애런이 이어진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너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알려줘. 내가 도와줄게.”
나는 대답 대신 옅게 미소 지었다. 그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었으므로.
* * *
나는 애런과 헤어지자마자 바로 무도회장 밖으로 나왔다.
우선 사람들이 없는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 시스템창부터 열었다. 어드바이저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히든 퀘스트 ‘황가의 진짜 비사(祕史)를 찾아라.’ 어드바이저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잠시 로딩 화면이 뜨더니 이내 결과물이 나타났다.
『퀘스트 완수를 위한 Tip.
1. 황제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
2. 가장 내밀한 곳.
3.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선택할 것.
4. 물건에 손을 대보면 진짜인지 여부 확인 가능.』
보아하니 황가의 기록이 숨겨진 곳을 말해주는 힌트 같은데 3번이 아리송했다.
‘일단 1번과 2번을 중심으로 찾아보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긴 한데 난이도가 높은 곳이라 쉽진 않을 것 같았다.
쉬운 일이었으면 히든 퀘스트로 주지도 않았겠지. 속으로 혀를 차며 시스템창을 닫았다.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미로 정원에는 다행히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미로 안으로 들어가니 나무들로 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대공이 보였다.
“스승님,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황태자가 계속 붙들었나 보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대공이 말했다.
“황태자 전하와는 춤이 끝나고 바로 헤어졌는데 애런과 잠시 얘기를 나누느라 늦었어요.”
애런을 언급하자 대공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애런과 무슨 일이 있으셨나?’
두 사람이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황가에서 기록을 숨겨 놓았다면 황제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평소와 같이 무표정으로 돌아온 대공이 화제를 돌렸다.
“제가 계시 내용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힌트가 될 만한 게 몇 가지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시스템이 알려준 힌트들과 그것들을 바탕으로 추론한 장소들을 말해주었다.
내가 추려본 장소들은 총 세 곳이었다.
황제의 침실과 집무실 그리고 비밀 서고.
사실 비밀 서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이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장소라 덧붙여 보았다.
혹시 대공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알지도 몰라서.
내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궁에는 황제만 아는 비밀 통로와 공간들이 있지.”
“정말 비밀 서고 같은 게 있어요?”
“그곳에 황실의 비사(祕史)가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기록은 그게 아닐 것 같군.”
퀘스트에서 ‘진짜’ 기록을 찾으라고 한 걸 보면 대공 말이 맞을 것이다.
“혹시 비밀 서고 안에 또 다른 숨겨진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요?”
“궁금한가?”
“서고가 건국신화와 제일 관련이 높은 곳인 것 같아서요.”
“그럼, 그곳부터 살펴보도록 하지.”
대공이 미로 정원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스승님.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은신 결계는 유지 시간이 45분밖에 안 돼요.”
찾아봐야 할 곳이 적어도 세 곳이 넘는데 45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한 곳만 찍어서 갈 수도 없으니 대공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역시 스승님이 최고라니까.
“아, 그리고 저 옷도 편한 걸로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차림으로는 들키기 쉬울 것 같아서요.”
아무리 은신 결계로 안 보인다고 해도 다니는데 불편하지 않나.
가만히 나를 보던 대공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동시에 간편한 바지차림으로 변했다.
아, 이 사기적인 스킬. 정말 탐난단 말이야.
대공을 부러워하고 있는데 순간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
나는 대공에게 잡혀 있는 내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간이동과 결계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니 떨어지지 말도록.”
“……네.”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눈앞의 풍경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