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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96)화 (96/140)

96화

히든 퀘스트> ‘황가의 진짜 비사(祕史)를 찾아라.’

황제가 숨겨둔 아카르트 황가의 진짜 기록을 찾으십시오.

제한 시간 : 5시간

성공 시 보상 : 나이아스의 샘물

실패 시 페널티 : 해머의 공격력 –50%』

나는 퀘스트 메시지를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황궁에 마가 꼈나? 왜 여기만 오면 히든 퀘스트가 뜨는 거지?’

지난 번 판타시아 궁 퀘스트처럼 이것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황제가 숨겨둔’이라는 말에서부터 벌써 위험 신호가 느껴지지 않나.

‘하여튼 내가 편안히 지내는 꼴을 못 보지.’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낮고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불편한가?”

남들이 본다면 무심한 눈빛이라 하겠지만 늘 그 눈빛을 봐 온 탓인지 내게는 보였다.

짙게 가라앉은 금빛 눈동자에 어린 걱정을.

“스승님, 계시가 또 내려왔는데요. 그게 상당히 곤란한 내용이에요.”

“마수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보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번 건 시간제한이 있어요. 지금부터 5시간 내에 해결해야 해요.”

“뭘 하면 되나?”

나야 시간제한이 있는 퀘스트가 익숙했지만 대공에게는 생소할 터.

그럼에도 그는 의아해하지도,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다음 할 일을 물을 뿐이었다.

그의 변함없는 신뢰에 가슴 가득 온기가 퍼져나갔다.

나는 주위를 힐끗 살피고는 대공에게 고개를 숙여 달라 눈짓했다. 그러자 그가 내게 몸을 기울였다.

“황제가 숨겨둔 황가의 비사(祕史)를 찾아야 해요.”

대공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이자 금빛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당황스럽겠지. 나도 당황스럽다고요.

판타시아는 요수와 관련이라도 있었지. 황가의 기록과 폴루티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대체 시스템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예상되는 장소는?”

고개를 젓자 대공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드바이저 기능을 사용하면 시스템이 힌트를 줄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이목이 쏠려 있어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우선 황제에게 미행을 붙여놓고 단서가 나올 때까지 황궁을 직접 살펴봐야겠군.”

“사람을 붙이시려고요?”

1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탓에 황궁에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누굴?

무엇보다 황제는 그림자들의 호위를 받고 있지 않나. 미행이 가능할 리가.

“사람은 아니다. 다른 방법이 있으니 그 문제는 내게 맡기도록.”

의아하긴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춤이 끝나면 미로 정원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황제가 주시하고 있으니 함께 움직이는 건 좋지 않았다.

마침내 음악이 끝나고 나와 대공은 중앙에서 물러났다.

이제 각자 흩어져 적당히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불청객이 찾아왔다.

“대공, 오랜만이네요.”

클로디안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는 카밀라와 함께였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카밀라 체임버라고 합니다.”

카밀라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묵례로 답한 대공이 가만히 카밀라를 응시했다.

평소처럼 무감한 시선이 아닌 샅샅이 파헤칠 것처럼 예리한 시선에 카밀라가 긴장했다.

‘왜 그러시지?’

낯선 사람을 마주해서 그런가? 카밀라에 대해선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혹시나 잊으신 건가 싶어 슬쩍 앞으로 나섰다.

“카밀라는 제 친구예요. 사업도 같이 하고 있고요. 전에 말씀드렸었죠?”

“그렇군.”

짧게 대답한 대공은 더는 관심이 없다는 듯 카밀라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카밀라가 그제야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신년제에서 대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클로디안은 사람들을 의식한 듯 대공에게 극존칭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언제까지고 저택에만 머물 수는 없으니까요.”

대공도 황제를 대할 때처럼 공대를 사용했다.

“사제지간의 정이 깊은 모양이네요.”

클로디안은 대공이 신년제에 참석한 이유가 나 때문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대공은 그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팔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도닥이며 클로디안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이 천적을 앞에 두고 제 새끼를 지키려는 맹수와 닮아 있었다.

잠시 날 선 긴장감이 어렸지만 클로디안의 부드러운 미소에 금세 풀어졌다.

“부럽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대공에게 가르침을 청해볼 걸 그랬습니다.”

“저도 쉽게 얻어낸 기회가 아니랍니다. 대공 전하의 승낙을 얻어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요.”

첫 만남에서 죽을 뻔한 것도 모자라 매번 냉대와 무시를 견뎌야 했었지.

지난날의 눈물겨운 노력을 떠올리며 아련한 눈빛을 짓자 클로디안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쟤는 왜 나만 보면 웃는 거지? 저렇게 웃음이 헤프진 않았었는데.’

이상하게 클로디안 앞에만 서면 내가 광대가 된 기분이 든단 말이야.

뾰족하게 그를 쳐다보자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영애가 고생이 많았겠군. 그래도 이리 훌륭한 스승을 얻었으니 보람이 있지 않은가.”

웃음을 갈무리한 클로디안이 짐짓 점잖은 척 말했다.

“그럼요. 대공 전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제게 행운이었지요.”

대공의 팔에 답삭 매달리자 카밀라가 조금 신기하게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게도 그런 행운이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미소 지은 얼굴과 달리 클로디안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예전에는 그가 왜 그렇게까지 대공에게 잘 보이려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황가의 저주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

안타까움이 일었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그를 동정하기엔 내가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아바마마께 귀한 선물을 했더군요.”

금세 다시 밝아진 클로디안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공이 황제에게 선물한 것은 판타시아 궁에 있는 주술 매개체였다.

그때 나는 단상과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선물의 색상 외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시종장이 상자를 여는 순간 흘러나온 악취와 황제의 반응을 보고 유추할 수 있었다.

“폐하께서 먼저 선물을 보내주셨으니 응당 답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공에게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보낸 선물이라는 건 아마도 나를 납치한 일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클로디안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무슨 선물인지는 묻지 않았다.

황제와 대공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라고 짐작하는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라 많이 놀라신 듯 합니다. 감동하신 아바마마께서 대공에게 또 어떤 선물을 보내실지 심히 염려가 되는군요.”

그의 걱정 어린 시선이 대공에 이어 내게도 머물렀다.

“여기서 더 신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거든 네 아비를 말리는 게 좋을 거다.”

대공이 몸을 기울여 클로디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찰나 클로디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없으면 내게 알리기라도 해. 그럼, 더는 죄를 짓지 않게 막아줄 테니.”

클로디안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대공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이 자세를 바로하며 뒤로 물러섰다.

“전하,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아, 잠깐. 내가 영애에게 볼 일이 있는데.”

클로디안이 대공과 함께 돌아서는 나를 붙잡았다.

“케인 영애, 내게 그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겠나?”

내게 춤을?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내가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하자 클로디안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만히 그 손을 쳐다만 보고 있자 그가 내게 속삭였다.

“그대, 내게 갚을 게 있지 않나?”

저거, 애런 일로 부탁한 것을 말하는 거지?

나는 애써 한숨을 삼키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영광이에요, 전하.”

카밀라에게 양해를 구한 클로디안이 나를 이끌어 중앙으로 향했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대공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조금 있다가 만나자고.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클로디안을 향한 시선이 곱진 않았다.

“춤을 추기도 전에 대공의 시선에 꿰뚫리겠군.”

클로디안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간다고 할 때 보내주지 그러셨어요.”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셈이 약해서야 쓰나. 가는 게 있으면 응당 오는 게 있어야지.”

“저는 분명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드렸는데 혹 전달이 되지 않은 걸까요?”

애런의 일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클로디안의 답장을 받고 바로 로벨라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로 보냈었다.

그럼에도 대가를 내놓으라며 춤 신청을 한 클로디안이 뻔뻔한 거 아닌가.

“그대의 선물은 무척 기쁘게 받았어.”

클로디안이 내 허리를 감아 당기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만 조금 서운했다네. 직접 올 줄 알았는데 호위를 통해 선물만 전해 와서 말이야.”

“전하의 약혼녀가 제 친구입니다. 무슨 구설에 오르려고 제가 선물을 들고 전하를 찾아가겠어요.”

“이제 그런 일로 그대를 오해할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저는 항상 가십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에요. 지금도 사람들은 제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답니다.”

명성이 많이 올라서 무턱대고 험담을 하는 이들은 줄어들었으나 조심하는 게 좋았다.

카밀라가 암살당할 뻔한 일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내가 카밀라에게 푹 빠져 있단 걸 모르는 이는 없으니까.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의심하진 않을 거야.”

자신만만한 말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연기력 하나는 인정할 만하지.’

카밀라를 대하는 눈빛은 물론이고 손짓 하나에도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의심할 수 있을까.

과거의 나도 믿었었지. 그게 연기인 줄도 모르고.

갑자기 입 안이 썼다.

“세간의 이목보단 내 노력을 좀 더 알아줬으면 하는데. 하퍼 경을 설득하는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나?”

엄살은. 그의 명령에 애런이 바로 따랐을 텐데.

사실 그가 부탁만 했어도 애런은 제 뜻을 굽혔을 것이다. 그만큼 충성심이 강하니까.

그러나 권력자를 비웃을 수는 없으니 순순히 비위를 맞춰주었다.

“감사드려요. 아무리 생각해도 애런을 설득할 수 있는 분이 전하밖에 안 계시더라고요.”

“흠,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

클로디안이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진정으로 기뻐 보여 조금 당황스러웠다.

“나도 그대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하퍼 경은 내가 아끼는 사람이거든.”

“애런에게 어디까지 말씀하신 건가요?”

“별궁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어. 노예 사건의 배후가 폴루티아와 연관 있다고만 설명했지.”

노예 사건의 배후는 황제잖아. 지금 그걸 알고 하는 말이니?

단순히 애런을 설득하기 위해 둘러댄 말인지 아니면 정말 모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노예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애런이 순순히 따르지 않았을 텐데요.”

추모탑 일만으로도 나를 걱정했던 애런이다.

그런데 그 사건의 배후가 폴루티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절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었다.

“은밀히 그 배후를 쫓고 있으니 자중하라고 했어. 작전을 성공하려면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저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거짓말 아닌데. 정말 노예 사건의 배후를 조사하고 있어.”

진정 그 모든 일이 황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황제와 맞설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노예는 별궁과 관련이 되어 있지. 별궁은 폴루티아와 연관되어 있고. 그러니 그자를 찾아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클로디안이 내 귓가에 속삭이며 씩 웃었다.

쫓는 자가 황제가 아니라 요수인 건가?

‘황제가 요수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은 모양이네.’

그 이유가 뭘까. 클로디안이 황가의 저주를 모르는 것도 아닌데.

능구렁이 같은 황제가 또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그대와 대공도 그자를 쫓고 있지? 우리 서로 돕는 게 어떤가.”

클로디안이 은근하게 속삭이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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