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커다란 문이 열리고 붉은색 긴 머리를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눈밭 위에 홀로 핀 장미처럼 고고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사람들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서늘한 눈매가 좌중을 훑어 내리는 순간 얼굴을 붉히던 여인들은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숨소리를 죽였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살갗이 베이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무도회장에 긴장감이 서렸다.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간 카이스가 멈춘 곳은 황제가 서 있는 단상 앞이었다.
그의 냉랭한 시선이 황제에게로 향했다.
“폐하,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그는 말만 존대를 할 뿐 그 외에 황제에게 갖추어야 할 예는 모두 무시했다.
당당하게 고개를 든 카이스의 오연한 시선에 황제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몸이 불편하다 들었는데 이제 괜찮은 것인가.”
그는 카이스를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사람들을 의식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말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카이스가 입매를 길게 늘였다.
“몸이 불편했다라……. 그렇군요. 폐하 덕분에 잘 회복했습니다.”
‘폐하’에 유독 힘을 준 카이스가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회복되었다니 다행이군. 앞으로도 종종 황궁에서 그대를 볼 수 있으면 좋겠네.”
꽤나 카이스를 아끼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황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이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아, 일전에 폐하께서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하여 답례로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카이스가 손을 까딱이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필립이 작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필립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은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 황제에게 보였다.
“……!”
내용물을 확인한 황제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가 형형하게 타올랐다.
카이스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한 황후는 갑작스럽게 얼어붙은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러나 클로디안은 상자 안에 든 검은 돌멩이를 보고는 금세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예전에 로웨나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살얼음판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뚫고 대공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황제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다가오려 했으나 클로디안이 고개를 저어 막았다.
카이스가 공개된 장소에서 황제를 위협하지는 않을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카이스는 기사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몸을 물린 황제가 팔걸이를 꽉 쥐었다.
“이게 무엇인지 너는 알겠지.”
살짝 몸을 숙인 카이스가 황제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선물을 언급하자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 황제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카이스에게 쏘아졌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이미 보여준 것 같은데. 데이먼이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들은 황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더는 내 것을 건드리지 마라. 내 인내하고 있으니.”
황제를 향한 카이스의 금안에 살기가 어렸다.
순간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민 기분을 느낀 황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카이스가 그런 그를 비웃으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폐하,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어 더는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경고와 같은 조언을 남긴 카이스가 몸을 돌리자마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외모하며 제 주제도 모르고 오만불손한 것이 100년 전 그놈과 똑 닮았군.’
당장이라도 황제의 목을 꺾고 싶은 걸 참느라 바닥까지 인내심을 긁어모아야 했다.
‘어차피 데이먼을 죽인 뒤 황가도 쓸어버릴 거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살려두는 것일 뿐. 에이바를 죽인 죗값은 확실하게 받아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카르트 황가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업보를 쌓아가고 있었다.
왜 아기오 님께서 침묵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데이먼과 손잡은 저들을 벌하실 게 분명했다.
말아 쥔 카이스의 손에 하얗게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그가 걸음을 내딛자 모여 있던 이들이 옆으로 물러섰다.
홍해와 같이 갈라진 길을 걸어가던 카이스의 눈에 익숙한 이가 들어왔다.
로웨나 케인.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눈빛에 들끓던 분노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찬바람이 불던 가슴에 훈풍이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에 그의 굳은 눈매가 슬며시 풀어졌다.
‘경고만으로는 부족하겠지.’
황제는 물론이고 귀족들에게도 확실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로웨나 케인을 보호하는 이가 누구인지.
출입문으로 향하던 발길이 로웨나에게로 틀어졌다.
“스승님, 여긴 어떻게……?”
“놀랐나?”
“네. 그저께 뵐 때만 해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잖아요.”
불퉁하게 볼을 부풀리는 모습에 카이스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오늘 오실 거였으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카이스가 서운한 티를 내는 로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 신년제에 참석한 것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황제에게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로웨나를 지키기 위해 나선 걸음이지만 그녀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건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대개 약혼자나 연인이 파트너가 되니까.
하여 파트너는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운해 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약속된 파트너가 있었을 거 아닌가.”
‘지난 수확제 때 그 금발 기사와 함께 참석했었지. 오늘도 그자와 함께 온 것일까.’
문득 든 생각에 카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그가 속으로 혀를 차며 얼른 생각을 털어버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떨쳐내려고 하면 할수록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파트너가 없어서 아버지와 함께 왔단 말이에요. 이왕 참석하실 거였으면 이 불쌍한 제자 좀 구제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소꿉친구에게 부탁하지 그랬나? 흔쾌히 들어주었을 것 같은데.”
“애런에겐 매번 부탁하는 게 미안해서요. 걔도 이제 약혼해야 할 나이인데 아무리 친구라도 저랑만 다니는 건 좋지 않잖아요.”
로웨나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카이스는 얼마 전 자신에게 로웨나를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며 소리치던 애런을 떠올렸다.
‘과연 그 기사도 로웨나와 같은 생각일까?’
그가 슬쩍 눈을 들어 무도회장을 훑어보았다. 아까부터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떨어진 곳에 그가 예상한 인물이 서 있었다.
애런 하퍼.
그의 시선이 로웨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웨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린 카이스가 반쯤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내게 함께 춤을 출 영광을 주지 않겠나?”
카이스가 손을 내밀자 로웨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이내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눈매가 둥글게 휘어지더니 분홍빛 입술이 열렸다.
“영광이에요, 스승님.”
활짝 핀 리시안셔스처럼 청초한 미소에 어쩐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이스는 맞닿아 오는 온기를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 * *
대공이 물러난 뒤 잠시 굳어 있던 황제는 다행히 개회사를 잘 마무리했다.
이후 클로디안과 카밀라가 첫 춤을 열며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두 사람이 춤을 마치자 사람들의 이목이 대공에게 쏠렸다.
공식 행사에 처음 나온 대공이 과연 누구와 춤을 출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주목 제대로 받겠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의 손을 잡고 중앙으로 나가자 온몸이 따가울 정도로 시선이 꽂혔다.
“대공 전하께서 왜 케인 영애와 춤을 추시는 걸까요?”
“케인 영애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건네신 걸 보면 원래 친분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대공 전하께서는 대외 활동을 거의 안 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러게요. 두 사람이 어떻게 아는 사이일까요?”
“혹시 대공 전하께서도 로벨라의 고객이신 걸까요?”
우리를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다행히 격이 맞지 않는다거나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린 거 아니냐는 비난은 나오지 않았다.
“신경 쓰이나?”
대공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니요. 비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궁금해서 그러는 거니 괜찮아요.”
오히려 저런 관심은 내 명성과 사업에 도움이 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어떻게 우리 로나를 알고 계시냐고? 그야 로나가 전하의 가르침을 받고 있으니까 그렇지.”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는 무척 기분이 좋으신지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였다.
“아, 글쎄 우리 로나가 대공 전하께 가르침을 청했는데 흔쾌히 받아주셨다지 뭔가. 전하께서도 우리 로나의 잠재력을 알아보신 게지.”
간간이 들리는 말로 보아 나와 대공이 어떤 사이인지 사람들에게 대답해 주고 계신 모양이었다.
“케인 백작인가 보군.”
대공의 시선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두 분이 서한을 주고받긴 했지만 서로 얼굴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네. 저와 많이 닮았죠?”
“그렇군.”
무심한 시선은 금세 내게로 돌아왔다.
“제가 스승님의 제자라는 게 만천하에 알려졌으니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겠네요.”
“왜 이제와 물리고 싶나?”
“아니요. 저는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좋은 걸요.”
이왕이면 연인으로 알려지면 더 좋을 텐데.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조금 아쉬운 마음으로 대공을 바라보던 나는 어디선가 반짝이는 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 스승님, 이거 하고 오셨네요?”
대공의 소매에 달린 커프스 버튼을 가리키자 그가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보고 싶다지 않았나.”
선물할 때 착용한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던 걸 기억하고 계셨구나.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렸다.
“……잘 어울리나?”
“네, 무척이요.”
이 커프스 버튼은 내겐 큰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다.
카라나이트는 내가 공들여 세상에 내놓은 첫 보석이었고 커프스 버튼은 처음부터 대공을 생각하며 만든 것이었으니까.
대공이 내 정성과 마음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들떴다.
‘다른 사람들 눈에도 커프스 버튼이 보이겠지?’
꼭 내 것이라고 도장 찍어놓은 것 같은 기분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순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던 대공의 입가가 살짝 휘어졌다.
‘어?’
내가 잘못 본 건가?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봐도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여전했다.
사실 미소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내가 웃을 때마다 무감하게 바라보거나 눈썹을 찌푸리기 일쑤였는데.
내게도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네. 스승님께서 제 선물을 하고 와주셨으니까요.”
대공이 웃어서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귀한 미소가 사라져 버릴까 봐 말을 돌렸다.
내 선택은 탁월했다.
그의 미소가 조금, 아주 조금 더 짙어졌으니까.
더불어 대공의 머리 위에서 호감도 55%가 깜빡거렸다.
고조되는 내 기분만큼 음악도 점차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
“내가 공식적으로 너와의 관계를 드러냈으니 데이먼이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다. 괜찮겠나?”
“이미 각오한 일인 걸요.”
요수가 제단과 관계되어 있는 이상 그를 잡는 건 내 일이기도 했다.
그를 처리하지 않으면 이번에도 제단에 끌려갈지 모르니.
“나와 필립이 항상 주시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무섭지 않아요. 스승님이 계시니까요.”
대공이 지그시 나를 응시했다.
일렁이는 황금 물결이 아름다워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단 생각이 들던 찰나 ‘띠링!’ 하고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