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영애,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였다.
나는 검은 무복을 입은 황태자의 비밀 호위를 얼떨떨하게 바라보았다.
“네,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제가 갑자기 찾아와 놀라게 해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평소에는 아무리 불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니까.”
얼마 전 카밀라가 습격당하지 않았다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의 명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전하께서 영애에게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전하께서요?”
“네.”
클로디안이 내게 무슨 일로?
호위가 건넨 서한을 펼치자 단정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서한의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카밀라를 습격했던 이들이 카헬 조직이었고 암살을 사주한 자는 체임버 공작부인이라는 것.
더불어 카헬은 모두 정리했지만 공작부인 문제가 남아 있으니 당분간 카밀라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공작부인이었어.’
이를 카밀라에게 어찌 알려야 할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말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집안이군.
“전하께 답신을 전해주실 수 있나요?”
“제게 맡겨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서한을 작성했다.
카밀라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공작부인의 확실한 처벌을 요청했다.
그리고 애런과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혹시라도 그가 당신을 찾아가 폴루티아의 일을 물을지도 모른다고 적었다.
덧붙여 애런이 폴루티아에 동행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도 부탁했다.
사실 이게 답신을 보내는 진짜 목적이었다.
애런에게 황실을 언급한 건 당연히 황태자가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거란 계산이 있기에 꺼낸 말이었다.
제 사람을 아끼는 황태자라면 애런이 황제와 폴루티아의 배후에게 주목 받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애런과 동행하면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단 말이지.’
해머의 능력은 물론이고 퓨릭서와 같은 아이템과 스킬들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정해진 수만큼 마수를 처리해야 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시키고.
그뿐인가. 요수가 애런을 주목하게 되면 그거야 말로 골치 아파진다.
‘때마침 클로디안이 먼저 연락해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안 그래도 어떻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한시름 덜었다.
나는 서한을 봉한 뒤에 비밀 호위에게 건네주었다.
“잘 부탁드려요.”
호위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교계가 들썩거렸다.
수확제 이후로 사교 시즌이 끝났음에도 연일 터지는 체임버 공작가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낸시에 이어 공작부인까지 카밀라를 죽이려 했다는 소식에 사람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체임버 공작가의 위상이 떨어졌고 카밀라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어났다.
공작부인은 죄상이 낱낱이 드러나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체임버 공작은 두문불출했다.
그사이 나는 카밀라를 위로하며 체임버 공작가의 돈줄을 조이기 시작했다.
체임버 공작이 투자한 사업의 원자재를 독점하고 은행 대출을 제한하는 것쯤은 제국의 금권을 장악한 우리 가문으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공작이 투자한 무역선이 사고로 돌아오지 못해 재정상태가 좋지 못한 상황이라 더 쉽게 공작가에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결국 재정압박을 견디지 못한 공작은 사금융에 손을 댔고 그의 채권 또한 내가 인수했다.
그런 와중에도 공작은 한 번도 카밀라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편, 클로디안이 내 부탁을 충실히 이행해 준 덕분에 애런과 함께 폴루티아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겨울 동안 열심히 폴루티아를 다니며 퀘스트를 이행했고 레벨을 70까지 올렸다.
* * *
시간이 흘러 해가 바뀌고 황궁에서 새해를 기념하는 신년제가 열리게 되었다.
“어머, 케인 영애. 오늘도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네요.”
“오늘 드레스도 페시나에서 맞춘 거지요?”
“처음 보는 디자인인 거 보니 이번에도 페시나가 영애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었나 보네요.”
“영애만큼 페시나의 드레스를 소화하는 사람도 없지요. 무척 잘 어울려요.”
무도회장에 들어서마자 젊은 귀부인들이 내게 다가와 찬사를 늘어놓았다.
저들은 모두 로벨라 매장의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동안 로벨라의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내 명성도 점점 올라갔다.
그에 따라 매장을 찾는 귀족들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하며 그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그래도 황궁 행사에서 이 정도로 친분을 드러낼 줄은 몰랐는데.
‘최근 명성치가 400에 도달해서 그런가?’
수확제 때만 해도 감히 기대할 수 없었던 상황에 감격스러웠다.
“과찬이세요. 페시나의 드레스는 저보다는 엘렌 후작부인께서 입으셨을 때 더 빛나죠.”
모여 있는 이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를 지목해 추켜세우자 분위기가 한층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는 영애에게 칭찬을 들으니 민망하네요.”
엘렌 후작부인이 수줍게 웃으며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영애의 안목이 높은 거죠. 후작부인만큼 드레스의 우아한 실루엣을 잘 소화하시는 분은 없잖아요.”
“그럼요. 오늘 드레스도 후작부인의 하얀 피부에 너무 잘 어울리는 걸요.”
“다들 좋게 봐주셔서 기뻐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찬사가 후작부인에게로 향하자 그녀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그때 후작부인 곁에 서 있던 샐먼 백작부인이 무언가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로벨라의 다이아몬드 반지 아닌가요?”
샐먼 백작부인이 후작부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얼마 전에 후작님께서 저희 매장에서 사 가신 바로 그 반지로군요.”
나는 이제야 반지를 알아본 것처럼 놀란 척을 했다.
“후작님께서 부인의 아름다움을 빛낼 수 있는 특별한 보석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제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몰라요.”
결혼 10주년 기념 선물을 사러온 후작을 보며 기회라고 생각했다.
로벨라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유행시킬 기회.
아이작의 뛰어난 실력 덕분에 로벨라의 다이아몬드는 대륙 최고로 아름다운 광채를 자랑하지만 2%가 부족했다.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가 되려면 독창적인 디자인에 더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하여 바깥세상의 지식을 빌어 다이아몬드에 ‘청혼’이라는 스토리를 입혀 홍보할 계획을 세웠다.
이 세계는 청혼할 때 특별히 선호하는 보석은 없었다.
그저 상대의 눈동자 색이나 머리색에 맞추어 선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성공 가능한 전략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홍보 모델이 없다는 것.
클로디안과 카밀라가 딱이었지만 정략 관계인 두 사람에게선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엘렌 후작이었다.
오늘 일부러 후작부인을 지목해 칭찬을 건넨 것도 홍보를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어머머, 후작부인께서는 좋으시겠어요. 후작님께서 결혼기념일 선물도 해 주시고요.”
내 예상대로 후작부인의 측근들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주위의 관심을 끌어주었다.
“이 반지를 선물하며 다음 생에도 자신과 혼인해 달라고 청하더라고요.”
처음 청혼 받았을 때처럼 가슴이 떨렸다며 후작부인이 얼굴을 붉혔다.
“어쩜 너무 로맨틱하네요.”
“부러워요. 후작부인.”
주위에 있던 귀부인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후작부인과 그녀의 반지를 바라보았다.
근처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도 후작부인의 반지를 힐끗거렸다.
“후작님의 안목이 뛰어나신 것 같아요. 반지가 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반지로 청혼을 받는다면 상대가 누구든 마음이 혹할 것 같지 않나요?”
“맞아요.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저리 빛날 수 있는지. 눈을 뗄 수가 없네요.”
“로벨라의 상품이잖아요. 다른 보석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요.”
“저희 로벨라의 다이아몬드를 높게 평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지금이 내가 나설 때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영애, 우리는 보석과 예술품을 평가할 땐 어떤 과장도 보태지 않는답니다. 로벨라의 다이아몬드는 가히 예술품이라 할 수 있어요.”
샐먼 백작부인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맞아요. 나도 이렇게 아름다운 반지는 처음 보았답니다.”
엘렌 후작부인도 자신의 반지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우리가 로벨라의 보석에 푹 빠지게 된 건 다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귀부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로벨라를 이리 아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자 부인들이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사람은 직접 대화를 나눠봐야 한다니까요. 이렇게 예의 바르고 상냥한 숙녀에게 왜 그런 꼬리표가 따라다녔던 건지.”
“그러게 말이에요. 소문이란 건 믿을 게 못된다니까요.”
부채로 살짝 입가를 가린 부인들이 작게 혀를 찼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 그러니까 18살 이전의 로웨나는 소문과 평판 그대로의 사람이었으니까.
물론 이 사람들도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달라진 내 모습을 인정해 주는 것이겠지.
띠링!
『명성이 올랐습니다.
명성 : 410』
귀부인들의 칭찬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나는 힐끗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짙게 미소 지었다.
“제가 조만간 티파티를 열 계획인데 초대장을 보내드려도 괜찮을까요? 여기 계신 분들께 로벨라의 신상을 가장 먼저 선보이고 싶어서요.”
“영애의 초대라면 언제나 환영이지요.”
엘렌 후작부인이 흔쾌히 승낙하자 다른 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톨린 거리에 새로 생긴 찻집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서 티파티를 열려고 해요.”
“톨린 거리에 찻집이 새로 생겼나요?”
“글쎄요. 못 본 것 같은데.”
부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네시스라는 찻집인데 동대륙에서 수입한 찻잎을 사용해서 그런지 차가 향이 좋고 맛이 깔끔하더라고요.”
“어머, 그래요?”
“네. 가게 분위기도 차분하고 편안하답니다. 저희 매장과 가까워서 걸음하기도 편하실 거예요.”
“로벨라와도 가깝다면 이번에 눈여겨봐야겠네요. 차 맛이 좋다면 로벨라에 방문할 때 종종 들려도 좋을 테니까요.”
긍정적인 반응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네시스’는 카밀라가 개업한 찻집이었다.
지난 겨울 카밀라는 낸시와 공작부인에게서 받은 상처와 충격을 추스르자마자 사업에 전념했다.
그 결과 며칠 전에 찻집을 개업했고 이번에는 그 홍보를 내가 맡았다.
“그럼, 케인 영애. 초대장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귀부인들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물러나자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내게 다가왔다.
“케인 영애,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헤슬론 후작 영애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낸시와 대등하게 사교계를 이끌던 영애였다.
그녀가 이끄는 영애들은 낸시의 무리처럼 대놓고 나를 놀리거나 무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나와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었다.
그런 그들이 먼저 내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그럼요. 우리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죠?”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자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던 영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슬쩍 주위를 살피니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페니아 영애와 그 무리들이 보였다.
낸시가 감옥에 갇힌 후로 그들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렸다.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을 모른 척하자 페니아 영애가 입술을 질끈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예전처럼 내게 다가와 따지거나 비난하지는 못했다.
‘자업자득이지.’
아무리 명성이 필요하다고 해도 나를 노리개 삼았던 그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헤슬론 후작 영애의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클로디안과 카밀라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문이 열리고 화사하게 미소 지은 카밀라가 클로디안과 함께 걸어 들어왔다.
‘체임버 공작은 보이지 않네.’
신년제는 참석할 줄 알았는데 그는 아직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빌린 돈을 갚으려면 정신이 없겠지.’
나는 혀를 차며 공작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사이 황후와 함께 입장을 마친 황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대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니 기쁘군. 올해도 농작물이 풍성하고 제국이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신년제를…….”
그때 누군가의 입장을 알리는 뿔나팔이 울렸다.
도대체 누가 황제 다음으로 입장을 한단 말인가.
무도회장에 모인 이들 모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특히 황제의 표정은 가히 좋지 못했다.
“카이스 버몬트 대공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