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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93)화 (93/140)

93화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까. 이대로 둔다면 머지않아 우리가 살 땅도 모두 사라지게 될 거야.”

애런이 담담하게 말하는 로웨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로웨나가 무척 낯설었다.

아니, 오늘만이 아니던가.

생각해 보면 최근 들어 그녀의 낯선 모습을 마주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로웨나도 철이 든 거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지만 기분은 가라앉곤 했다.

자신이 모르는 로웨나가 늘어갈수록 그녀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서.

“폴루티아가 확대되고 있다고는 하나 제국은 아직 건재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 네가 나서지 않아도 돼.”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대공 전하께서 계시잖아. 전하라면 폴루티아를 완전히 해결하실 수도 있을 거야.”

“애런, 네가 날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겠어.”

그게 왜 네가 해야 하는 일이야? 황실 책임이지!

이전에는 폴루티아에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자꾸 위험한 일을 하려는 거야?

애런은 로웨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속이 들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굳건하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를 보니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로웨나가 저런 눈빛을 할 때는 백작님이 오신다 해도 말릴 수 없으니까.

‘하아.’

애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가.”

“……?”

“폴루티아든, 어디든 같이 가자. 너 혼자는 못 보내.”

로웨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자신이 그에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안 돼. 위험해.”

단호한 거절에 애런의 푸른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서로 의견이 달라 투닥대다가도 뜻에 따라주면 기뻐하며 도움을 마다하지 않는 로웨나였다.

당연히 이번에도 동행을 허락해 줄줄 알았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는 거지?’

사실 폴루티아 일도 평소의 로웨나라면 진작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을 일이었다.

문득 무니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로웨나가 마수로부터 자신을 구해줬던 일이.

그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무니스에선 마수를 처음 상대해 봐서 조금 미숙했을 뿐이야. 앞으로는 잘 할 수 있어.”

사실 그날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료들만 아니었다면 로웨나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왜 피나게 훈련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훈련에 임했던 건 비단 아버지의 기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웨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를 처단하는 검이, 그녀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주고 싶어서였다.

‘이제 겨우 그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왜 날 밀어내는 거야?’

“나도 널 지켜줄 수 있어. 대공 전하처럼.”

무니스에서 로웨나와 합을 맞추어 마수를 처리하는 대공은 참으로 빛나 보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내게도 기회를 줘. 어릴 적 네가 날 지켜줬던 것처럼 나도 널 지킬 수 있게.”

결연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로웨나를 곧게 응시했다.

찰나 로웨나의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지만 애런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애런의 머리 위로 향하더니 고양이를 닮은 눈매가 살짝 커졌다 이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네가 무리하는 건 싫어.”

분명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다정한 음성인데 은회색 눈동자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입안이 말라왔다. 애런이 다급하게 대꾸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지금도 근위대 임무로 많이 바쁘잖아.”

“병행할 수 있어.”

비번인 날이 있으니 얼마든지 로웨나와 동행할 수 있었다.

“네게 부담주고 싶지 않아. 폴루티아에는 항상 스승님과 함께 가니까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긋하지만 확실한 거절 의사에 애런은 얼음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로웨나는 분명 선을 긋고 있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애런이 멍하니 가슴에 손을 대었다.

아팠다.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로웨나가 제페스와 사귀게 되었을 때도, 제페스에 대해 조언했다가 다투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었는데 왜 이러는 걸까?

애런이 고개를 들어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왠지 이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에 하얀 손을 꼭 붙들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그제야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놓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붙잡았다 생각했던 온기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애런이 텅 비어 버린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또…….’

거부했다. 자신의 손길을.

‘언제부터였을까. 로나가 날 피한 것이.’

처음에는 단순히 어린 아이 취급 받는 게 싫어서 그런 거라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애런이 빈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무니스에서 로웨나와 대공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이후부터 뭔지 모를 불안을 느꼈던 이유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급하게 백작저로 달려온 이유를.

자신은 이제 ‘친구’라는 이름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로웨나의 전부를 욕심내고 그녀의 옆자리를 욕망하게 되었으니까.

그 사실을 자각하자 심장이 크게 박동했다.

대공을 만날 때마다 불안과 경계심을 느낀 건 아마도 본능적인 직감이었으리라.

로웨나를 빼앗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

대공은 처음부터 그랬다. 제페스를 마주할 때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로웨나가 제페스에게 푹 빠져 있는 것처럼 굴 때도 불안하진 않았었다.

속이 끓고 걱정이 되긴 했어도 언젠가는 헤어질 거란 확신이 있었기에.

그러나 대공은 처음부터 자신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었다.

맹수들이 본능적으로 강자를 알아보는 것처럼.

애런이 고개를 들어 로웨나를 응시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로나, 혹시 대공 전하에게 마음이 있는 거야?”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스스로가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로웨나에게서 긍정의 말이 나올까 봐.

차마 로웨나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 시선을 내렸다. 그럼에도 모든 신경은 그녀에게로 쏠렸다.

“……스승님은 내가 많이 의지하는 분이야.”

한참 만에 흘러나온 대답에 애런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대공을 좋아한다는 최악의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휑하니 비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자신보다도 더 의지하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답할까 봐.

‘나는 왜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일까?’

항상 옆에 있어서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일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로웨나와 같은 이를 또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애런의 입가에 자조가 맺혔다.

그녀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자 안식처였다. 가족도 주지 못한 것을 준 사람이었다.

과연 그런 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우리가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너와 나, 우리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을 텐데.’

애런은 울고 싶은 심정이 들었으나 꾹 참았다. 그녀에게 못난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애런이 조심스럽게 로웨나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녀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힘주어 붙잡았다.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이.

순간 로웨나의 은회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나 밀어내지마, 로나. 너마저 날 밀어내면 난 갈 곳이 없어.”

네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데 다른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더 노력할게. 실력도 더 쌓을게. 그러니 날 혼자 두지 마.”

애런이 로웨나의 손등에 이마를 대며 애원했다.

‘마음이 여린 로나는 연약한 것을 외면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매달리면 손을 잡아줄 거야.’

어릴 때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자신을 지켜주었던 것처럼.

대공을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의지한다고 했지.

몇 개월의 사제지간보단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아온 소꿉친구의 정이 더 깊지 않겠나.

아직 기회는 있었다.

애런의 단단한 턱에 힘이 들어갔다.

“네 실력을 의심해서 폴루티아 동행을 말리는 게 아니야.”

작은 한숨과 함께 들려온 로웨나의 목소리는 밤바다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폴루티아 문제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아.”

단순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폴루티아의 확대 원인은 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했고 황실도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대공이라는 새로운 희망이 나타나지 않았나. 그가 가진 능력이라면 폴루티아도 정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왜 저렇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 것일까.

“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줘. 판단은 내가 할게. 너와 동행하기로 한 건 내 선택이니까.”

가만히 애런을 바라보던 로웨나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폴루티아에는 황실이 연관되어 있어. 네가 알지 못하는 위험한 인물도.”

황실? 애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너는 황실에 소속된 기사잖아. 그러니 말리는 거야.”

“로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폴루티아에 관한 건 내 뜻을 따라주면 좋겠어. 부탁할게.”

진지한 눈빛에 애런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단순히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핑계를 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폴루티아가 황실과 관계되어 있다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생각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로웨나는 물론이고 백작님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까?’

무니스에서 로웨나를 말리려는 자신을 황태자 전하께서 막아선 것이 생각이 났다.

‘전하께서는 두 사람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게 틀림없어.’

아무래도 전하께 찾아가 봐야할 것 같았다.

‘로나는 내가 지켜야 해.’

* * *

나는 애런이 떠난 후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애런에게 추모탑과 무니스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것이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피곤할 줄은 몰랐다.

폴루티아에 함께 가겠다는 걸 말리는 것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순간순간 치솟는 분노와 원망을 숨기는 게 더 힘들었다.

‘그런데 애런의 호감도가 왜 그렇게 높은 거야?’

45%라니. 도대체 언제 그렇게 호감도가 오른 거지?

달빛 저택에서 도와준 일 때문인가? 아니면 무니스에서 구해준 것 때문에?

그렇다 해도 너무 많이 오른 거 아닌가?

게다가 더 이해가 가지 않았던 건 애런에게 대놓고 선을 그었음에도 호감도가 더 올라갔다는 점이다.

50%로.

호감도가 떨어질 걸 예상하고 저지른 일인데 오히려 호감도가 올라가서 상당히 당황스러웠었다.

사실 애런이나 황태자나 시스템이 제시한 최저 기준인 10%만 채운다면 그 이상 호감도가 올라가는 건 바라지 않는다.

지난 회차들에서 애런이나 황태자 모두 공략캐들 중 가장 호감도가 높았을 때 나를 죽였으니까.

‘당분간 애런하고는 거리를 두어야겠어.’

그런 다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이라면 ‘아가씨, 저예요!’ 하고 말했을 텐데 문 너머는 조용했다.

‘누구지? 설마 애런이 다시 온 건 아니겠지?’

기감을 세워 문 너머를 살피자 암살자처럼 가볍고 흐린 기척이 잡혔다.

황제가 사람을 보낸 걸까? 아니면 요수?

해머를 소환할 준비를 한 뒤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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