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내가 로웨나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카이스의 물음에 애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계와 의심으로 가득한 그의 눈빛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카이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내게 스승이 되어 달라 청한 것도 로웨나였고, 추모탑에 간 것도, 무니스에 간 것도 모두 로웨나 스스로의 의지였다.”
“로나가 추모탑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추모탑 지하에 대해 알고 있었을 리도 없고요.”
가만히 애런을 바라보던 카이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달빛 저택에서 로웨나를 만났었다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지 애런의 눈이 살짝 커졌다.
“거기서 본 노예들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었다. 그들을 풀어주고 싶다더군. 그래서 추모탑에 간 것이다.”
“……거기서 데려가신 이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애런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로웨나의 뜻대로 모두 풀어주었다.”
애런이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카이스가 애런의 어깨를 붙잡자 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가까운 사이라도 모든 걸 알 수는 없는 법이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 로웨나에게 물어보도록.”
“……전하께서는 로나를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애런이 말을 내뱉자마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어렸다.
“자네보다는.”
무덤덤한 말에 애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카이스는 애런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저 금발의 기사가 제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이유도 알고 있었고.
평소라면 같잖은 도발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로웨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구는 게 거슬려서.
‘유치하게 굴었군.’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후회는 들지 않았다.
자신의 대답이 거짓말도 아니지 않은가.
로웨나의 가족도 알지 못하는 중요한 비밀을 자신은 알고 있으니까.
새삼 그 사실을 깨닫자 이상하게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신경을 긁어대던 불쾌감이 사라질 정도로.
시선을 들자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겠군.’
로웨나의 보호자처럼 구는 것도,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더는 참아주고 싶지 않았다.
카이스가 애런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이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로웨나의 안위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지키는 한 안전할 테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붙었다.
적막한 긴장을 뚫고 카이스의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로웨나의 앞길을 막아서지 마라.”
경고와도 같은 말에 꽉 다문 애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전하보다 제가 더 로나에 대해 잘 압니다. 로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는 건 전하이십니다.”
뒤돌아 걸어가는 카이스를 향해 애런이 외쳤다.
카이스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으로 인해 로웨나가 위험하게 되었다는 말에 반박할 수 없었으므로.
그날 밤 암살 조직원들이 자주 다니는 뒷골목에 카헬 조직원의 사체가 전시되었다.
더불어 제국에 있는 모든 암살 조직에 경고장이 날아들었다.
암살 조직들 사이에서 로웨나 케인이라는 이름이 금기어가 된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그 소식은 이시어스를 통해 황제에게도 들어갔다.
* * *
애런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케인 백작저로 향했다.
어젯밤, 대공을 만난 이후로 도무지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터였다.
자신보다 로웨나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는 대공의 말이, 로웨나의 앞길을 막아서지 말란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대공은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가 황궁 호수에서 로웨나를 데리고 사라졌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람.
그런 사람이 로웨나 가까이에 있다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로웨나는 다른 사람들 말에 쉽게 휩쓸리는 편이니까.
‘왜 하필 그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거야.’
제페스와 헤어져 이제 좀 마음이 놓이나 했더니 이번에는 대공이 로웨나를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왜 고르는 사람마다 다 그 모양인 것인지.’
로웨나의 형편없는 안목에 답답함이 치밀었다.
말을 재촉해 백작저에 당도한 애런이 다급하게 말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님.”
백작가의 집사 팬튼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로나는 일어났나?”
“네. 조금 전에 아침 식사를 마치셨습니다.”
“내가 왔다고 알려주겠나?”
“알겠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지요.”
팬튼이 가까이 있는 시종을 불러 지시를 내린 후 애런을 안내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하고 왔네.”
“그럼, 다과는 가볍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팬튼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소파에 앉은 애런이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과가 준비되는 동안 로웨나에게 할 말을 차분히 정리하려 했지만 들쭉날쭉한 생각 탓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애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런, 언제 황도로 돌아왔어?”
조금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은회색 눈동자와 솜사탕을 닮은 분홍색 머리칼. 그리고 보기 좋게 달아오른 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로웨나의 모습에 지난 며칠 동안 그를 갉아먹던 불안감이 씻겨 내려갔다.
“이틀 전에.”
“그렇구나. 오늘 비번이면 좀 더 쉬지 그랬어. 무니스까지 오고 가느라 피곤했을 텐데.”
“괜찮아. 그보다 어제 큰일이 있었다며.”
“아……. 황태자 전하께 들었어?”
소파에 앉으려던 로웨나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어찌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편히 자리에 앉았다.
“응. 내게만 말씀해 주셨어. 공녀가 습격 받았을 때 너도 함께 있었는데 무사하다고.”
“황태자 전하 덕분이지. 전하께서 보내주신 호위들이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거야.”
“네 실력이면 카헬의 암살자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텐데.”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는데 자신도 모르게 조금 퉁명스럽게 말이 흘러나왔다.
애런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아, 너를 추궁하거나 비꼬려는 뜻은 아니었어. 그저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네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나다는 뜻…….”
“알아. 네게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거.”
살포시 미소 짓는 로웨나의 모습에 마음이 턱하고 놓였다.
‘그래, 로나는 말하지 않아도 나를 잘 아니까.’
혹시라도 자신을 오해할까 봐 허둥지둥 거린 게 민망했다.
‘이렇게 나를 잘 알면서 왜 그동안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애써 꾹 눌러놓았던 감정들이 비죽 솟아올랐다.
서운했다.
어릴 적부터 모르는 것이 없었던 로웨나에게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생겼다는 것이.
그리고 그 모든 걸 대공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질투가 났다.
‘그래서 대공에게 날을 세웠던 거지.’
그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대공에게 왜 그러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로웨나가 자신보다 대공을 더 많이 의지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한심하군.’
애런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울적한 낯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잖아. 로나는 가족보다도 가까운 존재인 걸.’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사람.
그러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나.
“왜 내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어제 대공을 만난 탓일까. 평소 같았으면 삼키고 말았을 말이 툭 내뱉어졌다.
“내가 너를 이해해 주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아니면 내가 대공 전하보다 실력이 부족해서 너를 지켜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이런 못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생각과 달리 자꾸만 원망이 흘러나왔다.
애런이 입가에 힘을 주며 마구잡이로 새어나오려는 말을 막았다.
그때 로웨나에게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애런이 움찔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미안. 원망하려던 건 아닌데.”
“……많이 놀랐지? 뜬금없이 추모탑과 무니스에 나타났었으니 네가 놀랄 만도 해.”
나긋하게 달래는 목소리에 애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다정한 눈빛에 그의 굳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추모탑에서는 정말 기함하는 줄 알았어. 네가 누구인지 알려질까 봐 내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알아?”
“다른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
“황태자 전하께선 알아보신 것 같았는데 다른 대원들은 못 알아본 것 같아.”
“다행이네.”
“지금 다행이라는 말이 나와?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간 거야?”
답답한 마음에 질책을 쏟아내던 애런은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는 로웨나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그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자꾸 몰아붙이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애런이 작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추모탑에는 어떻게 가게 된 거야?”
다행히 한결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달빛 저택에서 봤던 노예들이 마음에 걸려서. 스승님께 말씀드렸더니 조사해 주셨어. 그래서 추모탑에 가게 된 거고.”
거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갇혀 있을 줄은 몰랐다며 로웨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공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닌가 보네.’
그가 제멋대로 끌고 다닌 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위험한 곳에 로웨나를 데리고 갔다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나도 알아봐 줄 수 있는데.”
“혹시라도 임무와 관련된 일이면 곤란해질 수 있잖아.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사실 임무와 관련된 일이 맞기에 아니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애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도 네가 직접 올 필요는 없었잖아. 대공 전하께서 알아서 처리하셨을 텐데.”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어. 스승님께 부탁만 드리고 가만히 있기도 죄송했고.”
“앞으로는 노예와 관련된 곳엔 가지 마. 잘못하다간 너는 물론이고 백작님도 위험해지실 수 있어.”
“……알아.”
시무룩해지는 로웨나를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대로 당부해 두어야 했다.
애런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무니스에는 대공 전하께서 가자고 하신 거야?”
“아니야. 스승님께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무니스 산불 소식을 듣게 되었어. 그래서 내가 가자고 한 거야.”
애런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로웨나가 대공을 감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야.”
억울한 표정의 로웨나를 보며 애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구호를 위해서라면 산불이 진화된 이후에 와도 되었잖아. 왜 가장 위험할 때 온 거야?”
그래, 베히른 홍수 때처럼 구호를 위해 관심을 가졌다면 이해가 된다.
예전 같았으면 구호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았겠지만 최근 로웨나의 관심사가 변했으니까.
“……애런. 대공 전하께서 사용하시는 힘이 무엇인지 알아?”
“신력.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해 주셨어.”
무니스에서 산불을 진화하고 산맥을 회복시킨 어마어마한 힘.
그 당시, 생전 처음 보는 경이로운 광경에 다들 할 말을 잃었었다.
대공과 로웨나가 사라진 이후에도 한동안 적막이 흐를 만큼.
“나도 신력을 사용할 수 있어.”
“……?”
그날의 기억에 빠져 있던 애런이 상상치도 못한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런 애런을 보고 어색하게 미소 지은 로웨나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수장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팔찌와 그로 인해 얻게 된 해머 그리고 대공으로부터 받은 훈련까지.
“비록 우연히 얻게 된 힘이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걸 가졌으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애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로웨나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디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라며 웃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해머와 그녀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이상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승님께 훈련을 부탁드렸고 폴루티아의 마수도 토벌하러 다니게 됐어.”
“……뭐? 잠시만. 폴루티아를 다닌다고?”
멍하니 있던 애런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응. 마수를 토벌하면 스승님께서 그 땅을 정화하셔. 무니스에서 하신 것처럼.”
“네가 왜, 폴루티아에…….”
황실도 포기한 곳에 네가 왜!
애런의 푸른 눈동자가 혼란과 불안으로 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