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일주일 전에 체임버 공작부인의 시녀가 카헬에 다녀갔어요.”
제국은 물론 타국까지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해리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특히나 카이스의 명령으로 카밀라는 물론 체임버 공작가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선 더욱더.
“공녀를 노린 게 맞았나 보군.”
“구체적인 의뢰 내용은 카헬에 직접 가 봐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카이스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령 공녀를 노렸는데 아가씨께서 휘말린 것이라 할지라도 이참에 경고를 해둘 필요는 있어요.”
이유를 묻는 듯 카이스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언제 어느 조직에 아가씨에 대한 의뢰가 들어갈지 모르니까요.”
카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바닥이 소문이 빠르거든요. 오늘 카헬이 의뢰를 실패했다는 게 벌써 업계에 소문이 쫙 돌았을 걸요?”
잠시 고민하던 카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해리, 나랑 같이 움직여야겠다.”
붉은 안광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여기가 카헬 본거지예요.”
해리가 뒷골목 구석진 곳에 자리한 건물을 가리켰다.
이곳은 황도 외곽 지역으로 빈민가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나보군.”
허름한 이층 건물은 이미 침입자들로 인해 소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쇳소리와 함께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나왔다.
“황태자가 벌써 사람들을 보낸 모양이네요.”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봐.”
카이스의 지시에 해리의 하얀 손에 보랏빛 신력이 어렸다.
잠시 후 건물 창가에 앉아 있거나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던 새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짙은 회색의 로브 위로 다양한 종류의 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모습이 장관이었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는 이들은 없었다.
해리를 중심으로 은신 결계가 둘러져 있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재잘재잘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수고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바쁘지 않았다면 한 마리씩 쓰다듬어 주었을 텐데 지금은 보고가 우선이었다.
해리가 바닥에 모이를 떨어뜨려주자 새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황태자가 보낸 사람들이 맞네요. 체임버 공녀에 대해 의뢰한 자가 누구인지 찾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증거를 찾은 건가?”
“아니요. 카헬의 마스터가 장부를 가지고 도망갔대요.”
“어디로?”
“비밀 통로를 이용해 도망갔는데 아직 밖으로 나오진 않은 것 같아요.”
“추적해.”
해리가 낮게 휘파람을 불자 열심히 모이를 먹고 있던 새들 중 몇 마리가 다시 그에게 날아왔다.
앞장서는 새들을 따라가자 카헬의 사무실로부터 두 번째 건물 뒤편에 다다랐다.
때마침 그곳에서 지하에 만들어둔 창고의 문을 열고 나오는 두 명의 사내와 맞닥뜨렸다.
“주인장이 어서 술을 더 가져오라고 재촉이야. 빨리 옮겨.”
“재촉하지 않아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카이스와 해리를 발견한 사내들이 자연스럽게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는 척했다.
이 건물의 1층이 주점이라 지나가는 손님들이라면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쥐새끼가 여기 있었군.”
“젠장.”
카이스가 자신들을 쫓아왔다는 걸 알아챈 사내들이 단검을 꺼내들며 뒤로 물러섰다.
“너흰 누구냐!”
“우리가 누구인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가지고 계신 장부를 주시면 목숨만은 살려드리지요.”
후드로 얼굴을 반쯤 가린 해리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지금 품에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카헬의 마스터.”
해리가 짧은 갈색 머리의 사내를 가리키자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서 도망가십시오. 여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조직원이 마스터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 망설이던 마스터는 슬금슬금 뒷걸음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카이스에게 붙잡혔다. 마스터가 거세게 저항했지만 카이스는 가뿐히 그를 제압했다.
나머지 조직원도 해리에게 붙들렸다.
“확인해 봐.”
카이스가 마스터에게서 뺏은 장부를 해리에게 던졌다.
빠르게 장부를 확인한 해리가 최근 의뢰 목록을 펼쳐 카이스에게 보여주었다.
“카밀라 체임버 암살, 의뢰자는 체임버 공작부인의 시녀라고 적혀 있네요. 이놈들도 따로 뒷조사를 했나 봐요.”
시녀가 암살을 의뢰하면서 신분을 밝혔을 리 없으니 따로 미행해서 조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알았겠지. 진짜 의뢰자가 누구인지.
“로웨나에 대한 건?”
“없어요. 공녀와 같이 계시다 휘말리신 게 맞나 봐요.”
해리의 대답에도 카이스의 서늘한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그의 손짓에 카헬의 마스터와 조직원을 묶고 있던 붉은 밧줄이 그들의 몸을 타고 올라가 목을 칭칭 감았다.
“커흑.”
신력으로 된 밧줄이 목을 죄어오자 두 사람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똑똑히 기억해라. 로웨나 케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로웨나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스터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저, 저희는, 컥. 아니…….”
마스터는 숨이 막히는 상황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썼다.
“로웨나 케인을 노린 적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게지요?”
해리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자 마스터가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그런데 어쩌나. 오늘 습격 장소에 우리 아가씨도 계셨거든. 체임버 공녀와 함께.”
마스터의 잿빛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가 억울하다 호소했지만 카이스는 무감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주군, 제가 처리할게요.”
“아니다. 내가 직접 하지.”
해리가 뒤로 물러나며 힐끔 카이스의 낯을 살폈다.
고요히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네.’
신의 명령을 제외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신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에이바 님의 일 이후로 처음이지?’
후드 아래로 해리의 보랏빛 눈동자가 흥미롭게 빛났다.
잠시 후 카이스는 마스터를, 해리는 조직원을 데리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카헬의 본거지에서는 아직도 수색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모두 결박된 상태였으나 황태자가 보낸 이들은 여전히 사무실을 헤집고 있었다.
그때 어깨에 마스터를 짊어진 카이스가 1층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냐!”
조직원들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검집에 손을 올리며 경계했다.
“……대공 전하?”
그들 중 한 명이 카이스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가장 기수가 높은 펠리체 경이었다.
그는 황태자와 함께 무니스에 갔던 터라 카이스를 알아본 것이었다.
“대공 전하라고?”
당황한 기사들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 눈짓했다.
때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애런이 카이스를 발견하고는 빠르게 걸어왔다.
“대공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푸른 눈동자가 경계심으로 짙어졌다.
무감하게 그 시선을 맞받아친 카이스가 바닥에 툭하고 마스터를 내려놓았다.
“쥐새끼처럼 도망가고 있길래 잡아왔다.”
가까이 있던 기사들이 마스터의 얼굴과 귀 뒤를 확인했다.
“카헬의 표식이 있는데?”
“설마 도망갔다던 마스터인가?”
기사들이 얼른 결박되어 있는 조직원들 중 하나를 데려와 사내의 신원을 확인했다.
“전하, 이 자를 어디서 잡으신 겁니까?”
“오르톤 주점의 창고 앞에서.”
“오르톤이라면 요 옆에 있는 주점 아니야?”
“어떻게 거기까지 도망간 거지?”
기사들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덕분에 중요한 증인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펠리체가 카이스를 향해 고개 숙였다.
“대공 전하께서는 이 자가 카헬의 일원인 걸 어떻게 알아보셨습니까?”
그때까지도 카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애런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하퍼 경.”
추궁하는 듯한 태도에 펠리체가 애런을 만류했다.
그러면서도 펠리체 역시 궁금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쫓고 있던 자라 주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런데 마스터의 상태가 왜 이런 겁니까?”
정신을 잃은 마스터는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엉망이었다.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려서.”
“네에?”
카이스의 대답에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애런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 자가 증언을 마치면 내가 다시 데려갈 터이니 황태자에게도 그리 전하도록.”
“……아, 네.”
황태자에게 존칭을 사용하지 않는 태도에 펠리체가 곤란한 기색을 보였지만 반발하지는 않았다.
무니스에서 황태자가 대공을 어떻게 대하는지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태자와 대공의 관계에 대해 잘 모르는 기사들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이것도 함께 전하도록.”
“이것이 무엇입니까?”
펠리체가 카이스로부터 장부를 건네받으며 물었다.
“카헬의 장부. 거기에 체임버 공녀의 암살을 의뢰한 자가 누구인지 적혀 있더군.”
다급하게 장부를 살핀 펠리체가 자신들이 찾던 정보를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대공 전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이걸 찾고 있었거든요.”
“장부와 함께 내 말도 전했으면 하는데.”
반드시 전하겠다며 펠리체가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약혼녀 호위를 제대로 하라고 전하게. 또다시 내 제자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그땐 이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
펠리체를 비롯해 근위대 기사들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애런만이 말뜻을 알아듣고는 표정을 굳혔다.
카이스는 할 말을 다 전했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을 나갔다.
그 뒤를 애런이 따라 나갔다.
“대공 전하.”
걸음을 멈춘 카이스가 애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카이스가 말해보라며 눈짓하자 잠시 망설이던 애런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로나를 무니스에 데려오신 것입니까?”
“그게 왜 궁금하지?”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왜 로나를 데리고 오신 것입니까?”
카이스를 탓하는 듯한 어투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로웨나의 실력을 보지 않았나.”
“……실력이 있다고 해도 산불을 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애런이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반박했다.
산불을 진화할 때 황태자 일행과 거리가 떨어져 있었던 탓에 다들 카이스가 한 일인 줄 알고 있었다.
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로웨나가 해머로 땅을 내려치는 걸 보고 불을 진화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마수 토벌에는 함께 가도 되는 것인가?”
“로나가 실력이 늘었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훈련을 시작한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실전은 아직 위험합니다.”
“마수를 처리함에 있어 황실 기사들보다 능숙했다. 자네도 구해주지 않았나.”
카이스의 마지막 말에 애런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아 쥔 두 손에 하얗게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카이스가 힐끗 그 손을 바라보았다.
“로나를 일부러 훈련시키신 겁니까? 마수 처리를 맡기려고?”
완곡하게 표현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부려 먹기 위해 훈련시킨 것이냐며 따지는 것이었다.
“무슨 말로 로나를 꼬드긴 겁니까? 설마 강압적으로 시키신 건 아니겠지요?”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 게지?”
“전하 때문에 로나가 자꾸 위험에 노출되지 않습니까? 지난번 추모탑에서도 로나와 함께 계셨지요?”
“그래.”
순순히 인정하자 애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속셈인 겁니까? 왜 로나에게 접근한 겁니까?”
카이스에게 당장이라도 검을 겨눌 것처럼 애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