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퍽.
해머에 맞은 복면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복면인이 정신을 잃은 걸 확인하고 뒤를 돌아보니 동상처럼 얼어붙은 카밀라가 보였다.
“괜찮아요? 많이 놀랐죠?”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자 파드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정면에서 살기를 마주한 탓일까 아니면 내 행동에 놀란 것일까.
회색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한 팔로 카밀라를 끌어안으며 주위를 둘러보니 나머지 복면인들도 모두 처리된 상태였다.
“안심해요. 이제 다 끝났어요.”
토닥토닥 카밀라를 달래자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애,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모든 처리를 마친 비밀 호위들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다친 곳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카밀라가 대답할 상태가 아니라서 내가 대신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들은 안심하면서도 나를 보는 눈길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내 손에 들린 해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가씨.”
슐레만 경이 그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듯 내 앞을 가리고 섰다.
또 다른 내 호위 기사인 네이선 경도 조용히 그 옆에 따라 붙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아요.”
나를 꼼꼼히 살펴본 슐레만 경이 작게 안도의 숨을 흘렸다.
물끄러미 해머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나눠요.”
“……알겠습니다.”
슐레만 경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갈무리하며 대답했다.
“카밀라, 마차에 가서 안정을 취하는 게 어떻겠어요?”
“로웨나는요?”
“저는 여기 정리 좀 하고 갈게요.”
비밀 호위들에게 맡기고 갈 수도 있지만 궁금한 게 있어서 확인하고 싶었다.
내 권유에 잠시 망설이던 카밀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내 작게 숨을 고른 그녀가 결연하게 말했다.
“저, 저도 여기 있을래요.”
“괜찮겠어요?”
“……네. 로웨나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나는 내 옷깃을 꼭 쥐고 있는 여린 손을 바라보았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아챈 카밀라가 얼굴을 붉히긴 했지만 나를 놓지는 않았다.
그녀를 부드럽게 다독여 준 뒤 비밀 호위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선 이놈들 정체부터 확인하죠.”
해머를 맞고 쓰러진 복면인의 손등과 귀 뒤를 살펴보았다.
암살 조직에 속해있다면 분명 표식이 있을 테니까.
‘여기 있다.’
아니나 다를까 복면인의 귀 뒤에 손톱만 한 크기의 작대기 세 개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2회차 때 암살 위협을 받고 나서 범인을 잡기 위해 제국의 모든 암살 조직을 조사했었다.
그때 각 조직의 표식과 표식을 새기는 위치들까지 알게 되었던 터라 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귀 뒤, 작대기 세 개.
이건 카헬 조직의 표식이었다.
카헬은 이시어스 다음으로 실력 있는 암살 조직이었다.
“카헬 조직원이네요.”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비밀 호위의 대장이 놀라며 내게 물었다.
“여기 이 표식이요. 카헬의 표식이에요.”
“……그렇군요.”
복면인의 표식을 확인한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헬은 경들께 맡겨도 되겠지요?”
“네.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여기도 정리를 해야겠네요. 알려져 봐야 좋을 거 없으니.”
원칙적으로는 치안대를 불러 신고하고 배후를 찾아야하겠지만 그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카밀라에 대한 여론만 나빠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나머지 뒷수습은 황태자가 알아서 잘 하겠지.
“아, 그리고 제 실력에 대해선 황태자 전하께서 이미 잘 알고 계시니 마음 편히 보고하시면 돼요.”
황태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비밀 호위들은 물론이고 카밀라까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밀라, 우리는 이만 가요.”
“……아, 네.”
카밀라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왔다.
슐레만 경과 네이선 경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타자 카밀라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많이 놀랐죠?”
카밀라의 옆자리에 앉으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손이 차네요.”
아까보단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냉기가 감돌았다. 부드럽게 손을 어루만지자 카밀라가 다른 손을 포개어왔다.
“고마워요. 로웨나 덕분에 살았어요.”
“다른 호위분들 덕분이죠.”
“그분들께도 감사하지만 로웨나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숨 쉬고 있지 못했을 거예요.”
창백한 얼굴에 맺힌 옅은 미소가 왜 이리 아프게 보이는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다가 그녀를 살포시 안아주었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의 온기이지 않을까 싶어서.
어느 순간부터 어깨가 젖어 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모른 척 카밀라를 토닥여 주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어요.”
카밀라가 내게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이번에 황태자 전하께서 다 정리하실 테니.”
카헬이라면 황제와 관련 없는 조직이니 황태자의 힘으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누굴까요? 누가 저를 죽이려 한 걸까요?”
떨리는 음성에 참담함이 배어 있었다.
오늘 암살자들은 정확히 카밀라를 지목했었다.
주요 용의자는 총 세 명.
우선 낸시는 감옥에 갇혀 있으니 따로 손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체임버 공작은 아무리 낸시를 편애한다고 해도 어리석은 짓을 할 사람은 아니고.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공작부인뿐인데.
그녀라면 동기도, 실행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쯧, 자기 딸이 그렇게 된 걸 보았으면서 겁도 없이.’
하긴 불같은 성정의 공작부인이라면 스스로를 불살라서라도 카밀라를 죽이려고 했겠지.
그러나 물증이 없는지라 입 밖으로 내뱉기가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카밀라가 받을 상처가 걱정되어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카밀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공작부인이실까요? 언니가 그렇게 되어서 제가 더 미우셨을 테니까요.”
“…….”
이럴 때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심증이 너무 확실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내 생각을 알아챈 것인지 카밀라의 얼굴이 슬프게 가라앉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렸다.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우리 집에서 머물러요. 공작님을 뵈러 갈 일이 있으면 나랑 같이 가고요.”
한참만에야 고개를 끄덕인 카밀라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한 걸까요?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일까요?”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여태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오는지 가녀린 어깨가 들썩거렸다.
“카밀라는 잘못한 거 없어요.”
부드럽게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여주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없어. 당신의 아버지가, 가족으로 묶인 그들이 잘못한 것이지.
‘황태자가 못하면 내가 해 줄게요. 내가 꼭 그들이 벌을 받게 해 줄게요.’
카밀라는 이후로도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와 카밀라를 방에 데려다준 뒤 슐레만 경과 네이선 경을 불렀다.
오늘 일에 대해 해명하기 위해서.
해머에 대해서는 수장고에서 발견한 고대 유물이라 설명하고 내 실력에 대해선 슐레만 경의 훈련과 더불어 대공에게도 훈련을 받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놀라워했지만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캐묻는 건 호위 기사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오늘 내 활약에 대해 아버지는 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아버지께는 근시일 내에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해머와 마수 토벌에 대해서.
두 사람이 나간 뒤 소파에 몸을 묻었다.
‘카밀라가 안전하게 살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공작부인이 정말 배후라면 황태자가 확실히 처리한다고 해도 체임버 공작이 문제였다.
낸시가 처벌을 받은 데다 공작부인까지 그렇게 되면 공작가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될 텐데.
과연 가문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공작이 가만히 있을까.
카밀라에게 분풀이를 하든 그녀를 이용해 가문의 명성을 높이려고 하든 뭐라도 하려고 할 테지.
어느 쪽이든 열 받는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아예 카밀라가 체임버 가문을 가지면 이 꼴 저 꼴 다 안 봐도 될 텐데.’
속으로 투덜대던 나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아카르트 제국은 성별에 관계없이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되어 있는 카밀라도 자격이 있었다.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의뢰서를 작성했다.
「체임버 공작가의 재정 상태, 사업 현황 그리고 비리 사항에 대해 조사를 의뢰합니다.」
짤막하게 쓴 서신을 봉투에 넣어 봉하고 수신인에 ‘피니티아 화원’이라고 썼다.
설렁줄을 당기자 조이가 들어왔다.
“이거 빠르게 부쳐줘.”
“네.”
카펜에 의뢰를 했으니 곧 자료가 손에 들어오겠지.
‘체임버 공작, 두고 봐. 네가 냉대하던 딸이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내리막길만 남은 공작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 * *
삐르르.
맑은 새 울음소리에 가제보에 앉아 있던 카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을 뻗자 종달새를 닮은 노란 깃털의 전령새가 단단한 팔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작은 부리가 달싹거리더니 맑은 울음소리가 아닌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 아가씨께서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받으셨습니다.”
필립의 보고에 카이스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로웨나를 노린 것인가?”
“암살자들이 지목한 건 체임버 공녀였습니다만 아가씨께서도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로웨나는 무사하겠지?”
네가 호위하고 있으니 당연히 무사해야 한다는 압박이 담긴 물음이었다.
“네. 아가씨께서 해머로 암살자들의 공격을 막아내셔서 제가 나설 일이 없었습니다.”
“해머를 사용했다고?”
카이스의 마뜩잖은 물음에 필립이 차분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카이스가 미간을 좁혔다.
이미 황태자와 황실 기사단에게 해머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때와 오늘은 상황이 다르지 않나.
불특정 다수들이 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경이 쓰였다.
특히나 체임버 공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로웨나가 스스로를 드러내기로 결정한 이상 그걸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녀를 보호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겠지.
“그래서 로웨나를 습격한 놈들의 정체는?”
“카헬 조직원들입니다.”
“황태자에게도 연락이 갔겠군.”
“네. 황태자가 보낸 호위들이 조직원들을 데려갔습니다. 심문하려는 모양입니다.”
“알겠다. 다른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도록.”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카이스가 전령새에게 손을 대자 새의 형체가 흐릿해지다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신력으로 만들어졌기에 신력을 흡수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
“해리.”
부름과 동시에 손가락을 탁 튕기자 잠시 후 해리가 나타났다.
“주군, 찾으셨어요?”
“카헬 암살 조직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놈들이 로웨나를 습격했다는군.”
“네에? 아가씨는 무사하신 거죠?”
“무사해.”
“어휴. 다행이에요. 감히 아가씨를 위협하다니. 절대 그놈들을 가만히 두어선 안 돼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해리가 눈을 부릅떴다.
“정확히는 그놈들이 노린 건 체임버 공녀였다는군. 로웨나가 같이 있다가 휘말린 것 같은데 정말 그런 것인지 의심스러워서 불렀다.”
“체임버 공녀를 노렸다고요? 보자. 카헬과 공녀라…….”
로웨나가 아니라 카밀라가 타깃이었다는 말에 해리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순식간에 냉철하게 변한 보라색 눈동자가 허공에 뭔가를 더듬듯 빠르게 굴러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하고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