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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88)화 (88/140)

88화

무심코 로웨나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카이스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가락에 스친 열기가 심상치 않아 동그란 이마에 손을 대자 뜨끈한 열이 전해져 왔다.

그제야 로웨나의 창백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쯧. 저 하나도 챙기지 못하면서.”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로웨나를 안아들고는 침대에 바로 눕혔다.

그쯤이면 몸을 뒤척이거나 깨어날 만도 한데 로웨나는 미동도 없었다.

그만큼 상태가 안 좋은 건가 싶어 카이스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로웨나에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력을 쏟아 붓던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확인한 로웨나의 신력은 분명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미약했다.

그런데 몸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신력의 흔적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정도면 상당한 양의 신력을, 그것도 불과 몇 분 사이에 사용했다는 뜻인데…….

‘잠깐.’

카이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제 몸으로 향했다.

“……!”

 설마 로웨나가 신력으로 자신을 치료한 것인가?

필립과 해리의 신력으로도 통증을 완화시킬 뿐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는데 어떻게 로웨나가?

마수를 처리할 때마다 그녀의 해머에 신력이 늘어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직접 확인도 했고.

하지만 로웨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력이 증가하는 건 아니었다.

‘이 정도로 많은 신력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거지?’

만약 정말 신력으로 자신을 치유한 거라면 지금 로웨나의 상태가 안 좋은 것은 과로 때문이 아니라 신력 고갈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의아한 건 왜 흔적만 남은 신력에서 익숙함이 느껴지냐는 것이었다.

‘너는 대체 어떤 존재인 것이냐.’

여러 번 회귀했다는 비밀까지 들었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주군!”

필립이 굳은 얼굴로 다급하게 달려왔다.

“쉿.”

카이스가 조용하라며 주의를 주자 필립이 잠시 멈칫했다.

그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로웨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주군 괜찮으신 겁니까? 분명 신벌이 발동된 것 같았는데 금세 사라져서 당황했습니다.”

가디언들은 그들의 주군인 카이스와 연결되어 있기에 그의 변화를 기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무니스에서 신력을 한계 이상으로 사용해서 그런 거다.”

“데이먼을 만나신 겁니까?”

필립이 긴장하며 묻자 카이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를.”

데이먼과 황제가 로웨나를 건드린 이상 이대로 조용히 지내서는 안 되었다.

로웨나를 보호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 그녀의 안위가 더욱 보장될 테니.

신력을 한계 이상으로 쓰게 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떻게 나으신 겁니까?”

걱정스럽게 카이스를 살피던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로웨나에게로 향했다.

“아, 혹시 아가씨께서 이번에도 포션을 가지고 계셨던 겁니까?”

“……그래.”

카이스는 손에 들고 있던 포션을 감추며 대답했다.

“다행입니다.”

필립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대꾸했다.

“한데 아가씨께서는 왜 여기에서 주무시고 계신 겁니까? 혹 다치신 겁니까?”

로웨나를 바라보는 필립의 눈빛에 걱정과 의아함이 담겼다.

“오늘 무리한 데다 나를 간호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야.”

“송구합니다. 제가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내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니 마음 쓸 거 없다. 나머지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도록 하지.”

로웨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난 카이스가 그녀의 안색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어준 뒤에야 걸음을 옮기는 카이스의 모습을 필립이 주의 깊게 살폈다.

이내 그들이 향한 곳은 침실 옆 응접실이었다.

“맡긴 일은 어떻게 됐나?”

카이스는 로웨나와 계시를 이행하러 갈 때 필립에게 다른 일을 맡기곤 했다.

최근 들어 필립이 로웨나를 호위하게 되면서 평소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카밀라 체임버는 여전히 케인 백작저에 머물고 있습니다. 데이먼이나 황제와의 접점은 아직 없습니다. 주위에서 데이먼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요.”

“암살 사건은 정말 낸시 체임버가 벌인 일인가?”

“해리의 조사에 따르면 사실이라고 합니다. 다만 관련 암살 조직이 황가의 공식 발표와는 다른 곳입니다.”

“어디인데?”

“이시어스라고, 아가씨께서 말씀해 주셨던 바로 그 조직입니다.”

이시어스가 언급되자 카이스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혹시 로웨나를 추적하기 위해 공녀를 대상으로 삼은 건 아닌가?”

로웨나는 체임버 공녀와 벨라인 상단주와 함께 달빛 저택에 갔었고 거기서 노예들을 풀어 주었었다.

로웨나를 찾아내기 위해 용의자들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공녀를 습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시어스는 아가씨가 범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카이스가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밖에 로웨나를 추적하거나 감시하는 이들은 없겠지?”

“네.”

“카밀라 체임버를 쫓는 자들은?”

“암살 시도 이후로는 없습니다. 이시어스에서도 손을 뗀 것 같습니다.”

카이스가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내리떴다.

“이시어스를 정리해야 하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황제를 너무 자극하면 그 불똥이 아가씨에게 튈 수도 있습니다.”

카이스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이내 수긍했다.

필립의 말이 일리가 있으므로.

“공녀에게 다른 일은 없었고?”

“해리의 보고에 따르면 공녀가 아가씨께 예지 능력에 대해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해리는 새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이용해 카밀라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았다는 그 이야기 말인가.”

예전에 해리가 보고했던 내용이었다.

“네.”

필립이 로웨나와 카밀라의 대화 내용을 소상히 전달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카이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로웨나가 자신도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을 꺼낸 건 아마도 공녀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같은 삶이 세 번째이니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나 보군.’

그래서 일부러 공녀와 가까워진 것인가.

로웨나도 공녀를 의심하고 있다면 안심이 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공녀의 존재는 거슬렸다.

“공녀는 일단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해리에게 주시하라고 해.”

미리 손을 써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깔끔하겠지만 로웨나가 친우로 삼은 자이니 함부로 손을 댈 순 없었다.

그러니 현재로선 감시가 최선이었다.

“그리고 공녀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라고도 전해.”

“알겠습니다.”

공녀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나 데이먼이 알게 된다면 이용하려 들 게 뻔했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카이스의 눈빛이 어둡게 일렁거렸다.

“황제 쪽의 움직임은?”

“정부가 위중한 상태라 온종일 판타시아 궁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가 안정을 찾으면 그 분노가 우릴 향하겠군.”

데이먼이 무니스 일로 로웨나가 누구인지 알아챘을 테니 곧 황제도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제대로 경고해줘야겠군.”

“황제를 만나시려고요?”

“그쪽이 찾아오지 않으니 내가 직접 가는 수밖에.”

본인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이참에 확실하게 깨닫게 해줘야겠어.

카이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승님!”

분명 대공의 침실이 맞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누워 있어야 할 환자가 어디로 간 거야.’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침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문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얼른 달려갔다.

“스승님!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몸은 괜찮으세요?”

다행히 대공의 안색은 좋아 보였다.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달아오른 쇠처럼 뜨겁던 손이 평소와 다름없는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 다행이다.”

그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마음이 턱하고 놓였다.

“너는 괜찮은 것인가?”

대공이 내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저요? 아, 그게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나도 왜 그렇게 쓰러지듯 잠이 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가뿐한 걸 보니 정말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흠.”

대공이 나를 관찰하듯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혹시 자다가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니겠지?’

다급하게 얼굴을 매만져 보았지만 다행히 묻어나오는 건 없었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나?”

“음, 스승님께 포션을 먹여 드리려고 침대에 올라갔다가…… 맞다, 포션!”

어디 갔지? 분명 손에 들고 있었는데.

혹시나 침대 위에 떨어진 것은 아닌지 이불까지 들춰가며 살펴봤지만 포션은 보이지 않았다.

아, 이런.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SSS급 회복 포션을 잃어버리다니.

구두쇠 시스템이 언제 또다시 그런 인심을 쓸지 모르는데.

망연하게 침대에 앉아 있는데 대공과 필립이 내게 다가왔다.

“포션을 찾고 있는 건가.”

“네. 그거 진짜로 좋은 거거든요. 지난번에 드렸던 것보다도 더요.”

“걱정 말아라. 내가 먹었으니.”

“스승님 드리려고 제가…… 네?”

뒤늦게 대공의 말을 알아들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먹었으니 찾을 필요 없다고.”

“아…….”

어쩐지. 갑자기 대공이 회복된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포션을 마셔서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던 사람이 어떻게 포션을 챙겨 먹은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대공 뒤에 서 있는 필립을 보고는 납득했다.

“하아, 다행이다. 그거 잃어버린 줄 알고 정말 속상했었거든요.”

“고맙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황금빛 눈동자가 다른 때보다 더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를 더 기쁘게 한 것은 그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호감도였다.

48%.

한동안 정신이 없어서 호감도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올라 있었다.

‘잘하고 있는 거야. 앞으로도 이렇게 해 나가면 돼.’

나는 스스로를 북돋우며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빨리 회복되셔서 다행이에요. 앞으론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왠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 같았지만 조금 전까지 아팠던 탓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매번 고마워요, 필립 경.”

필립을 따라 침실을 나서자 대공이 뒤를 따라왔다.

“배웅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괜찮다. 다 나았어.”

“포션이 피로한 정신까지 회복시켜주지는 않잖아요. 그러니 나오지 마세요.”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공의 손을 붙잡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자, 한숨 푹 주무세요.”

“……알겠으니 이만 가 봐.”

대공이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나는 대공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침실을 나왔다.

“필립 경, 스승님께서 오늘 하루는 푹 쉬실 수 있도록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차를 타기 전 대공의 침실을 올려다보니 창가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쉬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여간 고집은.’

왠지 가슴이 간질거려 그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대공이 화답해 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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