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스승님, 어서 누우세요.”
대공이 키가 큰 편이라 낑낑대며 그를 침대에 눕혔다.
“필립 경을 불러올게요. 잠깐만 계세요.”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대공이 나를 붙잡았다.
팔에 닿은 손이 어찌나 뜨거운지 살갗이 데일 것만 같았다.
‘무니스를 떠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상태가 너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필립은, 지금 없다.”
대공이 쌔액 쌔액 힘겹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쩐지. 보통 퀘스트를 다녀오면 바로 나타났었는데 이상하다 했어.
‘이를 어쩐다. 필립 경이 있어야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텐데.’
내 마음대로 하다가 대공의 상태가 더 악화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꽉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괜찮으니 이만 가 봐.”
힘없이 나를 밀어내는 손길에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조심스럽게 그 손을 붙잡자 불덩이를 쥔 것처럼 화끈한 열기가 덮쳐 왔다.
화들짝 놀라 손을 놓칠 뻔한 나는 얼른 뜨거운 손을 힘주어 붙들었다.
“저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시면서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평소 같으면 바로 손을 놓고 가버렸을 사람이 힘없이 내게 붙들려 있는 걸 보니 속상했다.
“필립 경이 없어서 어차피 집에 못 가요. 그러니 여기 있을래요.”
대공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필립이 나를 데려다 줘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지 꽉 다문 입에서 미처 막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내 손을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붙잡아 왔다.
맞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고통에 내 몸이 다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스승님, 아프지 마세요.’
당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벌을 받으려면 당신의 반려를 죽인 그 당시 황제와 데이먼이 받아야지.
그들은 당신에게 사죄조차 하지 않는데. 왜 당신만 제국을 위해 애를 쓰고 고통 받아야 하나.
‘억울하지 않나요?’
나는 억울했는데. 이유도 없는 죽음에 화가 났었는데.
나야 이미 그 시간들이 지워져 죄를 물을 사람이 없다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은가.
‘신이 정말 살아있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반려를 잃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정작 벌을 주어야 할 자는 데이먼인데!
원망과 분노로 가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 잡고 있던 대공의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스승님을 아프게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이 세계를 부숴버리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신을 향해 협박하듯 읊조리는데 갑자기 심장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단발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통증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저번에 제단에서도 이렇게 아팠던 것 같은데.’
설마 나, 병에 걸린 건가.
덜컥 불안한 마음이 드는 순간 몸에서 기운이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어……?’
방금 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이러는 거지?
많이 피곤했나? 생각해 보니 오늘 일이 많긴 했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걸 거야. 지금까지 큰 병에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애써 마음을 달래며 불안감을 떨쳐 버렸다. 다행히 통증은 얼마 가지 않아 가라앉았다.
나는 안심하며 대공을 살피는데 집중했다.
일단 열부터 내려야 하니까 물수건을 준비하고 또…….
“아, 맞다. 그걸 잊고 있었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포션.
‘지난번에 효과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효과가 있겠지? 무려 SSS급이잖아.’
조급한 마음으로 인벤토리를 열었지만 생각과 달리 움직임은 굼뜨기만 했다.
추를 매단 것처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축 처졌다.
심지어 머리도 멍멍해져서 사고가 자꾸 끊겼다.
‘정말 ……이상한데?’
빠르게 상태가 나빠지는 것이 불안하긴 했지만 일단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보단 대공의 상태가 더 심각하니까.
“스승님, 이거 저번에 드셨던 포션인데…….”
대공을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시야가 빙 돌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려고 애써 보았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 안 되는데…….’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해일처럼 덮쳐 오는 수마에 속수무책으로 삼켜졌다.
* * *
카이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에 더는 로웨나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대공저에 도착해 몇 마디 나눈 것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고통을 참아낸 것이었다.
살의를 드러낸 건 아니라서 황금 사슬이 나타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것만 같은 고통은 신수의 몸이라 해도 견디기 힘들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고통 탓에 머리가 혼몽해졌다.
그저 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두근.
심장이 강하게 맥동하며 반려의 각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기운이 흘러들었다.
‘……에이바?’
아니, 그럴 리 없지.
머리가 고통에 절여지다 못해 고장이라도 난 것인가?
하지만 만에 하나 착각이 아니라면…….
번쩍 눈을 뜬 카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급하게 주위를 훑어보았지만 방금 전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던 기운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하아.”
그러면 그렇지. 죽은 이가 나타날 리 없지.
얼굴을 손에 묻으며 깊은 숨을 토해내던 카이스가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화로에 달궈진 쇳덩이처럼 끓어오르던 열이 내리고 온몸을 부술 것처럼 쏟아지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신벌로 인한 고통은 어떤 약으로도 낫지 않는다.
정신을 잃는 것도, 목숨을 끊는 것도 허락되지 않고 오로지 주어진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것.
그것이 신벌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렇게 단숨에 나아버렸단 말인가.
못해도 하루는 꼬박 앓아야 하는데.
카이스는 문득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불편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는 로웨나가 있었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왜 침대에…….’
의아하게 로웨나를 바라보던 카이스가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나를 간호하다 잠이 든 모양이군.’
그의 시선이 저를 꼭 붙들고 있는 여린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무감하던 붉은 눈동자에 언뜻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카이스가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하자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로웨나가 다시 잡아왔다.
“……아프지 ……마세요.”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 순간 카이스는 상실감으로 공허한 가슴이 무언가로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예전에 로웨나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었을 때처럼.
‘너는 어찌하여 내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걸까.’
카이스가 조심스럽게 로웨나의 손을 어루만졌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이 손을 외면하지 못했던 건.
로웨나에게 걸어두었던 보호술에 처음으로 이상 신호가 나타나 찾아갔던 그 밤.
눈물을 흘리며 애달프게 엄마를 부르는 로웨나를 본 순간 절로 발이 움직였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손을 내어준 상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손을 거두고 싶진 않았다.
그 순간 카이스는 직감했다. 앞으로도 이 손을 외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카이스, 신의 첫 번째 사자는 인간에게 자애로운 존재가 아니다.
무심하고 냉철한 관리자라 불리는 그가 신수도 아닌 인간에게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카이스의 시선이 살포시 눈을 감고 있는 로웨나의 얼굴로 향했다.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여린 눈가를 부드럽게 쓸자 연분홍색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카이스는 아무것도 묻어나오지 않는 건조한 손가락을 보며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이바를 잃은 이후로 죽어버린 마음이 로웨나에게 반응할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안 되는데. 이 마음의 주인은 그녀가 아닌데.
“너를 어찌해야 할까.”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로웨나도 위험해지지 않았을까.
로웨나가 자신을 깨운 이상 모른 척 할 순 없었겠지만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이제라도 이 손을 놓으면 네가 안전해질까? 나도 이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걸까?’
로웨나에게 붙들린 손을 서서히 빼내던 카이스가 저도 모르게 멀어지는 온기를 다시 붙들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다른 행동에 매끈하던 미간이 깊게 패었다.
“큰일이군.”
놓고 싶지 않아서.
작게 중얼거린 음성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바람의 작은 손짓에도 식어버릴, 미약한 이 온기가 뭐라고. 이토록 떨어지기가 싫은 걸까.
물끄러미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카이스의 시선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는 다른 손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로웨나의 손가락을 펴자 하얀색 액체가 든 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폴루티아를 정화시키던 액체는 푸른색이었으니 그건 아닐 테고.
‘혹시 ……포션인가?’
예전에 신벌의 후유증으로 알았을 때도 로웨나가 준 포션으로 금세 회복했었지.
그때 필립이 말해주었던 포션의 외양과 똑같은 것 같았다.
사실 신벌로 인한 고통은 포션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
다만 로웨나가 가지고 있던 포션은 신의 힘이 담겨 있기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다.
‘계시를 받으면 그에 따른 물품이 생긴다고 했지.’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허무맹랑한 얘기라며 무시해 버렸겠지만 로웨나라면 이상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해머와 퓨릭서만 해도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니.
무엇보다 기약 없는 잠에서 자신을 깨운 사람이 아닌가.
신이 왜 일개 인간에게 그런 힘을 맡겼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기오 님은 가끔 뜻 모를 일을 벌이고는 하시니 이번에도 그런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런데 왜 포션을 손에 쥐고 있는 거지?’
뒤늦게 든 의문에 포션을 집어든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걸 로웨나가 가지고 있었다는 건 제게 먹이기 전에 잠이 들었다는 건데.
‘그럼 나는 어떻게 회복된 거지?’
카이스가 손에 쥔 포션과 맞잡고 있는 로웨나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조금 전 느낀 에이바의 기운이 착각이 아니었다면?
문득 추모탑으로 로웨나를 데리러 갔던 날이 생각이 났다.
그날 로웨나를 찾아간 것은 보호술의 신호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인 것은 반려의 각인이었다.
에이바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던 각인이 그날 갑자기 달아올랐었다.
방금 전처럼.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가운데 머릿속이 온통 로웨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했었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추모탑은 절대 그녀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었으니.
황제나 데이먼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 아닌지 걱정하며 달려간 곳에서 로웨나를 마주한 순간.
거짓말처럼 각인의 열기가 사라졌었다.
‘착각이라 하기엔 각인의 통증이 너무나 선명했었지.’
이번에도 반려의 각인이 달아올랐고 역시나 로웨나가 옆에 있었다.
단순히 신벌로 인한 고통 때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와 같은 상황이 벌써 두 번째라 여러 가지로 의문이 들었다.
‘에이바, 혹시 이 아이를 지키고 싶은 거니?’
백 년 전에 죽은 에이바가 로웨나와 접점이 있을 리 없건만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에이바를 떠올리고 싶은 것일지도.
카이스가 복잡한 눈빛으로 로웨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