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나는 바디슈트를 다시 갖춰 입고 정면을 주시했다.
“코두스 처리법, 잊지 않고 있겠지?”
“네. 주의 사항 모두 기억하고 있어요.”
대공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동안 많은 종류의 마수를 훈련했지만 각각의 공략법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레벨이 올라가면서 지능도 많이 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땅의 진동이 더욱 심해지면서 저 멀리 코두스 떼가 모습을 드러냈다.
왕도마뱀처럼 생긴 코두스는 몸길이가 4m에 달하는 크고 육중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딱딱한 비늘이 온 몸을 둘러싸고 있어 불에도 끄떡없는 마수가 코두스였다.
“헉, 진짜 마수다.”
“저, 저게 마수……!”
마수를 처음 보는 기사들이 당혹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토벌 경험이 전무하니 제대로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지금은 퀘스트가 우선이었다.
나는 해머의 길이를 최대로 늘인 뒤 코두스를 주시했다.
코두스를 공격할 때는 꼬리의 공격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크고 넓적한 꼬리에 맞으면 그대로 뼈가 부러져 버리니까.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도 한번 속도를 내면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기에 선공이 답이었다.
나는 코두스 떼를 향해 땅을 박차고 달렸다.
“로나!”
뒤에서 애런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내 움직임을 읽은 코두스도 달리기 시작했으니까.
‘코두스는 시력이 좋지 못하지. 그러니까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쿵!
해머에 머리를 맞은 코두스가 저 멀리 날아갔다.
‘역시 레벨이 높은 마수라 한 번에 안 되네. 세 번은 때려야 처리되려나.’
나는 코두스 머리 위로 보이는 HP를 확인하며 계속 해머를 휘둘렀다.
『코두스 처리(1/400)』
첫 카운트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그 뒤로는 빠르게 숫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으악!”
“꼬리를 조심해라!”
주변에서 기사들의 비명과 다급한 외침이 번갈아 들려왔다.
“마수들이 마을로 내려간다. 막아라!”
마을로 내려간다고?
마을에는 황실과 네페르 기사단 그리고 아직 대피하지 못한 주민들이 남아 있었다.
‘이젠 대놓고 사람들을 사냥하려는 거냐?’
데이먼의 잔혹성에 속이 울렁거렸다.
“스승님, 마을 사람들을 보호해야 해요.”
나는 대공과 눈짓을 주고받은 뒤 마을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하나 몰려드는 코두스 때문에 쉽사리 속도가 나진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코두스를 처리해 나갈수록 레벨 업 메시지도 반복해서 떴다.
그러다 코두스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꼬리의 타격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 저건 위험하겠는데.’
내게 달려드는 코두스를 쳐낸 뒤 그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퍽!
해머를 휘둘러 코두스를 날리자 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얼떨떨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몸을 돌린 순간.
“……!”
거리가 좀 떨어진 곳에서 도약하기 직전의 코두스가 눈에 들어왔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코두스의 목표가 애런이기 때문이었다.
애런은 제 등 뒤에서 코두스가 달려오는 것도 모른 채 쓰러진 동료를 구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달려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동시에 해머를 힘차게 휘둘렀다.
해머에 정통으로 맞은 코두스가 옆으로 날아갔다.
쿵! 묵직한 몸체가 떨어지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나는 코두스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해머를 몇 번 더 휘둘러 완전히 처리해 버렸다.
뒤를 돌아보자 애런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처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코두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그의 동료는 부상을 입기는 했어도 무사했다.
“얼마나 남았나?”
대공의 물음에 상태창을 확인하느라 그 순간 클로디안도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백 마리 정도 남은 것 같아요.”
“빨리 처리하지. 그래야 주민들도 안전해질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코두스 처리에 속도를 내었다. 대공도 빠르게 코두스를 처리해갔다.
……397, 398, 399, 400.
마침내 목표치를 채우고 퓨릭서를 땅에 붓자 끝도 없이 몰려오던 코두스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더불어 산불로 인해 검게 변해버렸던 땅도 제 색을 되찾았다.
“어, 어디 갔지?”
“이, 이럴 수가…….”
주위에서 당황과 경악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뒤이어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퀘스트 ‘무니스를 정화하라(2)!’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바디슈트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지금 시행하시겠습니까?』
나는 ‘아니요’를 택했다.
현재 슈트를 입고 있기 때문에 업그레이드를 진행하면 여기서 바로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이 이상 주목을 받고 싶진 않았다.
해머를 인벤토리로 집어넣고 머리 부분의 슈트를 벗었다.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린 탓에 훤히 드러난 목덜미 위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덕분에 열기가 한풀 꺾이며 기분도 상쾌해졌다.
“다 끝났네요. 고생하셨어요, 스승님.”
“하루 사이에 계시가 두 번 내린 경우는 처음 아닌가.”
“네. 저도 당황스러워요.”
원작 게임에서 퀘스트는 레벨을 올리기 위한 관문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퀘스트가 데이먼과 관련되어 있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판타시아 궁도, 무니스의 산불도 마수 토벌로 레벨 업을 한다는 원작 게임의 취지에는 부합하지 않는 퀘스트였으니까.
그것들은 오히려 데이먼과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심지어 퀘스트 내용도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 데이먼의 행동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무니스의 산불만 봐도 그렇지 않나. 내가 제단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
‘애초에 폴루티아부터가 데이먼과 관계된 것이었지.’
“그 문제는 대공저에 가서 다시 의논하지.”
대공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저기…….”
갈색 머리의 젊은 기사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 코두스에게 크게 다칠 뻔한 기사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아, 예. 모두 영애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마수를 처리하며 꽤나 고생한 것인지 자잘한 상처들이 많아 보였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는 것 같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영애께서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지금 여기 서 있지 못했겠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기사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더니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무심코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기사들 사이에 있던 애런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밝게 빛나던 푸른 눈동자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황도로 돌아오면 백작저로 오라고 전해둬야겠다.’
안 그러면 애런의 성격상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 고민하다가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다.
애런에게 가려던 나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클로디안 때문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대공, 무니스를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클로디안이 대공에게 고개를 숙이자 기사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대공을 경계하진 않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대공을 향한 경외가 담겨 있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무뚝뚝한 대답에도 클로디안은 미소 지었다.
“영애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
“저는 그저 스승님의 뜻에 따른 것뿐이에요.”
“그렇다 하여도 그대 덕분에 나와 내 기사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무사할 수 있게 된 건 달라지지 않지. 고마워.”
“황공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클로디안의 치하에 답했다.
“사실 그대에 관해 대공이 해준 말들을 믿지 못하고 있었어.”
“……?”
“그대가 마수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거든. 그런데 오늘 그대 실력을 보니 경탄밖에 나오지 않더군.”
나를 향한 클로디안의 녹안에 이채가 어렸다.
데이먼과 황제가 손을 잡고 있는 이상 클로디안과 거리를 두긴 어렵겠지만 그의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최고의 스승님께 배우고 있으니까요.”
내가 대공을 가리키자 클로디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대공, 황실 기사단에도 가르침을 주실 순 없는지요? 마수에 대해선 모두 경험이 없는 지라 훈련이 필요할 듯합니다.”
“훈련을 시킨다고 한들 토벌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황제가 용인할 것 같으냐는 물음에 클로디안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오늘처럼 불시에 마주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든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군.”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 번 더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공이 차갑게 거절함에도 클로디안은 여유로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보다 내 존재가 알려져도 괜찮은 것인가?”
대공이 기사들을 향해 눈짓하며 물었다.
“숨긴다 한들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저는 아바마마와는 뜻이 다르거든요.”
“알겠다. 그럼, 여기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
불도 끄고 마수도 처리했는데 무슨 마무리를 하시겠다는 거지?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대공에게서 퍼져 나가는 붉은 신력을 보고 다급하게 그를 붙들었다.
“스승님, 설마 여기 전부를 되살리시려는 건 아니죠?”
피해를 입은 산이 한두 개가 아닌데 지금 그 모든 걸 회복시키겠다고?
이건 실레니아 호수를 회복시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였다.
더구나 대공은 산불을 진화하느라 이미 힘을 많이 쓰지 않았나.
“스승님, 며칠 뒤에 와서 다시 작업해요. 그래도 되잖아요.”
대공의 팔을 붙들고 만류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나를 드러낼 때도 되었지.”
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거냐며 속으로 툴툴대던 나는 뒤늦게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
지금 이곳에는 클로디안과 그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이외에도 산 아래에 있던 기사들이 클로디안을 찾아 올라오고 있었다.
‘저들에게 보이시려는 거구나.’
대공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데이먼 그리고 황제에게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대공은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발밑으로 붉은 신력이 퍼져나가며 그곳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황량했던 땅 위에 초록색의 풀과 알록달록한 들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불에 의해 손상되었던 나무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았고 새로 움튼 새싹들이 곧 커다란 나무로 자라났다.
민둥산이 순식간에 울창한 숲으로 변해가는 광경에 모두들 눈을 떼지 못했다.
무니스 지역을 둘러싼 산들이 제 모습을 되찾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경험한 광경임에도 실레니아 호수 때와는 차원이 다른 규모에 탄성이 흘러나오다 못해 경외심마저 들었다.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자 상쾌한 숲내음이 폐부로 밀려들었다.
작업을 마친 대공이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스승님, 정말 너무 아름…….”
아름답고 멋있고, 경이로운 광경이라며 온갖 찬사를 꺼내려던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공의 얼굴이 곧 쓰러질 사람처럼 창백했다.
게다가 이마와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혀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무리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나는 대공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팔을 붙들었다.
“스승님, 대공저는 제가 모셔다 드릴 테니 더 이상 힘쓰지 마세요.”
의아하게 쳐다보는 대공을 꼭 붙들고는 그대로 이동스크롤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