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무리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건만.’
나는 산 전체로 퍼져 나가는 신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난 파도처럼 삼림을 집어 삼키던 불길이 대공의 신력에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이, 이게 대체…….”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기사들이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괜찮으세요?”
“이 정도는 문제없다.”
유심히 대공의 얼굴을 살폈으나 다행히 힘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무리하지 마시라니까요.”
“매개체를 찾으려면 먼저 산불부터 정리해야 하지 않겠나.”
네? 불이 진화되었는데 왜 매개체를 찾아요?
황당하게 대공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후 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부, 불이 다시 번진다.”
그들이 가리킨 곳을 보니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빨간 불길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
데이먼이 아무리 고위 술법을 사용했다고 해도 대공이 풀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불길이 다시 살아났단 말인가.
당황스럽게 불길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대공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승님?”
“생각보다 강한 매개체를 사용했군.”
“스승님께서도 처리하기 어려운 물건인가요?”
그래서 불이 되살아난 건가?
에이, 그럴 리 없지. 신벌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무려 신의 사자이지 않나.
“내가 하지 못할 건 없다. 다만 산불을 진화해야 건 내가 아니라 너이지 않나.”
‘그럼, 그렇지.’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대공의 뒷말에 멈칫했다.
“설마 일부러 진화하지 않으신 거예요?”
“계시대로 하지 않으면 네 수명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댔다.
“매개체의 위치를 찾으려면 한 번은 불을 잠재워야 하니 그리 한 것뿐이다.”
대공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퀘스트 때마다 내 목표치가 얼마나 남았는지 여러 번 물으셨었지.’
계속 신경 쓰고 계셨던 거구나.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에 빠진 탓에 계속 걸음을 멈추고 있자 앞서 가던 대공이 다시 되돌아왔다.
“어디 불편한가?”
고개를 젓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대공이 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진짜 괜찮아요. 스승님의 배려에 감동해서 잠시 서 있었을 뿐이에요.”
반듯해지려던 대공의 미간이 내 말에 다시 좁혀졌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대공 옆으로 조르르 달려가 걸음을 맞추었다.
“스승님, 저 평생 스승님 옆에 꼭 붙어 있을래요.”
힐끔 나를 쳐다본 대공이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해 버렸다.
‘이 정도 무시에 물러설 내가 아니지.’
훈련 때문에 거의 매일 같이 대공을 만나다 보니 그의 무시와 외면엔 이골이 난지 오래였다.
“스승님께서도 제가 있으니까 지루하지 않으시죠? 제자 키우는 보람도 있고. 그렇죠?”
“불길이 다시 거세진다. 매개체 찾는 일에 집중해.”
되살아나는 불길을 제압하며 앞장서서 가던 대공이 나무라듯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슬쩍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말로는 질책하면서도 내게 작은 불티라도 튈까 봐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해머를 소환해 탐지 기능을 활성화하자 다이아몬드로 된 헤드가 은은하게 빛났다.
검게 그을리거나 다 타버린 나무들 사이로 걸어가며 해머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폈다.
반쯤은 부러져 시커멓게 변해버린 나무 아래를 지나던 순간.
영롱하게 빛나던 해머가 갑자기 어둡게 물들었다.
“스승님, 여기요. 여기.”
해머를 내려놓고 흙을 파내려 손을 뻗었는데 대공에게 덥석 붙잡혔다.
“위험하다.”
매개체 때문인지 방금 전 불길을 정리했음에도 금방 다시 불이 타올랐다.
내가 해머로 다시 불길을 정리하자 대공이 신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흙을 파헤쳤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매개체는 부싯돌처럼 생긴 검은 돌이었다.
검은 돌은 자체적으로 계속 불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해머를 들어 부싯돌을 내리치자 산산이 부서질 거란 예상과 달리 돌은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저 검은색이던 외양이 하얗게 변했을 뿐이었다.
다행히 더는 불꽃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해머에 맞았음에도 깨어지지 않은 건 이상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힘이 부족한가 싶어 몇 번을 더 내리쳤지만 돌은 금조차 가지 않았다.
“신물이라 그런 거다.”
“신물이라고요? 그런데 왜 요력이 느껴졌던 걸까요?”
“데이먼이 신물을 타락시켜 저주의 매개체로 이용한 탓이지.”
“그럼, 이제 저주는 파훼된 건가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끊임없이 되살아나던 불길이 말끔히 진화되어 있었다.
안심하고 부싯돌을 집어 들자 시스템 알림음이 들려왔다.
띠링!
『신비의 부싯돌 한 개를 획득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부싯돌이 내 인벤토리로 들어갔다.
『아이템 : 신비의 부싯돌
종류 : 신물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불을 일으킬 수 있으며 오직 소유자만이 불을 끌 수 있다.』
뒤이어 ‘신비의 부싯돌’에 대한 설명이 나타났지만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부싯돌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대공이 신경 쓰인 탓이었다.
“해머로 정화해서 그런지 부싯돌이 해머에 종속되었나 봐요.”
모른 척 지나갈까도 생각했지만 부싯돌이 어디로 간 것인지 밝히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데이먼을 상대하고 있는 이상 어떤 아이템을 언제 사용하게 될지 모르니까.
대공과의 관계에서 신뢰에 금이 갈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정화한 탓에 신물이 널 주인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다행히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럼, 이건 제가 보관하고 있을게요. 혹시라도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매개체는 하나인가요?”
“그런 것 같군.”
대공이 일시적으로 산불을 진화시켰을 때 다시 불이 솟아오른 곳은 한 곳이 아니었다.
당황한 기사들 어깨 너머로 보였던 두 번째 발화 지점.
그곳은 맞은편 산에 위치한 곳이었다.
산불이 말끔하게 진화된 이곳과는 달리 맞은편 산은 이전보다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서둘러야겠군.”
이미 산을 삼켜버린 불은 마을 입구까지 번진 상태였다.
우리는 대공의 신술로 매개체가 있는 곳으로 바로 이동했다.
어찌나 상황이 심각한지 연기와 불길 탓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대공이 우리 주변의 불을 진화한 덕분에 조금이나마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스승님, 저쪽이에요.”
해머가 반응하는 곳으로 달려가니 첫 번째 매개체처럼 커다란 나무 밑동에 매개체가 묻혀 있었다.
대공의 도움으로 매개체를 파낸 뒤 해머를 이용해 정화했다.
그러자 무니스의 삼림을 게걸스럽게 삼켜버리던 불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검게 변해버린 나무와 흙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산불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띠링!
『퀘스트 ‘무니스를 정화하라(1)!’를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SSS급 회복 포션 1개가 지급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신비의 부싯돌’ 2개를 획득했습니다.』
“휴, 다행이네요.”
매개체가 신물이었던 탓에 만약 여기서 막지 못했다면 무니스는 물론이고 인접 지역까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오늘 받은 임무는 모두 해결한 건가?”
“네. 다 끝냈어요.”
“그럼, 이만 돌아가지.”
“아, 잠깐 기다려주실 수 있으세요? 친구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요.”
이대로 가버리면 애런이 걱정할 게 분명했다.
추모탑과 오늘 일에 대해선 어차피 해명을 해야겠지만 나중에 잔소리라도 덜 들으려면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따로 찾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의아하던 것도 잠시, 내게도 이곳으로 향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공!”
잠시 후 클로디안이 기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가 우리를 향해 빠르게 걸어왔다.
“모두 진화된 것입니까?”
“그래.”
“다행입니다. 다시 불길이 일어나기에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클로디안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함께 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나!”
클로디안이 대공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애런은 내게 다가왔다.
나를 꼼꼼히 살펴본 그는 내가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심했다.
“거 봐. 내가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
내가 안면창을 해제하며 씩 웃자 애런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로나,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백작님 허락은 받고 온 거야?”
“어, 그게 말이지…….”
아버지는 모르시는데, 이를 어쩐담.
갑자기 아버지가 언급되는 바람에 당황하자 애런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띠링!
그때 불길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무니스를 정화하라(2)!’
무니스 지역의 포식자 코두스를 몰아내고 일대를 정화하십시오.
목표 1 : 코두스 처리(0/400)
목표 2 : 쿠르네 산맥 정화
보상 : 바디슈트 업그레이드 』
‘이게 뭐야? 왜 퀘스트가 또 내려와?’
어쩐지 퀘스트에 ‘(1)’이라고 되어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해머를 소환했다.
“로나?”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애런이 갑자기 나타난 해머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애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곧 마수가 몰려올 테니 너도 대비해.”
“……그게 무슨 말이야?”
애런에게 상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었기에 일단 그를 내버려둔 채 대공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계시가 또 내려왔어요. 코두스가 몰려올 거예요.”
대공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계시가 내린 과정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몇 마리?”
“400마리요.”
시스템도 연달아 퀘스트를 내리는 게 눈치가 보였던지 이전 퀘스트보다 목표치가 하향 조정되어 있었다.
대공이 신검을 소환하자 클로디안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검을 꺼내들었다.
“대공, 무슨 일입니까?”
클로디안이 매우 당황한 낯으로 대공과 나를 바라보았다.
특히 그는 내 해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수가 몰려올 거다.”
“마수라니, 그게 무슨 말씀…….”
클로디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산이 크게 울렸다.
“전하, 대피하셔야 합니다.”
근위대장이 클로디안을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아실리 경, 산 아래에 있는 기사단에게 마수에 대해 알리게. 아직 마을에 주민들이 남아 있으니 마수로부터 보호하도록.”
“알겠습니다.”
클로디안의 지시를 받은 기사가 말을 타고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전하께서도 내려가셔야 합니다.”
“마수가 나타난다면 대공과 함께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그 말에 대공이 클로디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한편 클로디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했다.
“대열을 갖추고 황태자 전하를 호위하라!”
결국 클로디안의 뜻을 꺾을 수 없다 여긴 근위대장이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황해 하던 기사들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클로디안을 에워쌌다.
애런은 근위대장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벽안이 혼란과 걱정으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