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체임버 공작가의 비극, 공작의 선택은?」
「낸시 체임버의 암살 시도! 자매간의 치정 싸움인가.」
「예비 황태자비, 암살 위협을 받다. 범인은 언니?!」
신문은 연일 낸시와 카밀라의 이야기로 도배되었다.
무려 황태자와 체임버 공작가가 관련되어 있는데도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지속적으로 보도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클로디안이 작정을 했군.’
체임버 공작이 허튼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사들 어디에도 이시어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저 낸시가 암살을 의뢰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
‘황제가 막은 걸까?’
낸시를 내주는 대신 이시어스를 보호한 것일지도.
안 그래도 낸시는 유죄를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시어스에서 조직원을 보내 낸시의 의뢰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시어스가 아니라 다른 조직 이름을 댔지만.
거기다 낸시의 방에서 이시어스의 증표인 은색 별 문양의 장식품도 발견되었다.
이것 역시 그냥 증표가 발견되었다 정도로만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까지 낸시를 외면해 버렸으니 아무리 체임버 공작이라도 방도가 없을 것이다.
‘애가 타서 미칠 지경이겠지.’
처음부터 공작이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했다면 이런 사태가 났겠느냐고.
나는 낸시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카밀라를 우리 집으로 데려 왔다.
공작은 황궁에 가 있었고 공작부인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였기에 우리를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카밀라가 우리 집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작은 지금까지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대단히 편파적인 부성애지.’
체임버 공작을 생각하면 연민은커녕 욕만 나왔다.
‘그나저나 카밀라는 저대로 둬도 될지 모르겠네.’
나는 고개를 들어 카밀라가 머물고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창문은 물론이고 테라스 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낸시가 범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카밀라는 며칠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문은 열어줬지만 대화를 나눌 상태는 아니었다.
오늘도 산책을 가자고 권유해 봤지만 말없이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혼자 차를 마시고 있는 거지. 이 널따란 정원을 벗 삼아.’
흠, 원래도 혼자 마셨는데 오늘따라 차가 더 씁쓸한 것 같네.
띠링!
반갑지 않은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무니스를 정화하라(1)!’
무니스 지역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산불을 진화하여 쿠르네 산맥과 지역 주민을 보호하십시오.
성공 시 보상 : SSS급 회복 포션 1개
실패 시 페널티 : 레벨 열 단계 강등』
요 며칠 동안 카밀라 챙기랴 대공저에서 훈련 받느라 정신이 없었건만.
차 한 잔 마실 여유조차 주질 않다니.
“아주 내가 쉬는 꼴을 못 보지.”
툴툴대며 붉은 피리를 불자 잠시 후 전령새가 날아왔다.
“스승님께 잘 전달해줘.”
내가 적은 쪽지를 한 입에 삼킨 새가 포로롱 울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난 회차들에선 무니스 지역에 산불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무니스 지역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산불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제단을 파괴해서 생긴 변화인 것 같았다.
‘급하긴 급했나 보군. 불을 이용할 생각을 한 걸 보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빨리 다녀와야 할 듯싶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무니스 지역으로 이동하자 후끈후끈한 열기가 훅 밀려들었다.
탄내가 코를 찌르고 끊임없이 치솟아 오르는 연기와 재로 인해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와, 장난 아니네요.”
나는 온통 시뻘겋게 물든 전경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작정을 한 모양이군.”
대공의 금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소도시 규모의 무니스 지역은 쿠르네 산맥으로 둘러싸인 산간지역이었다.
그런데 산이란 산은 전부 불길에 휩싸여 불로 만들어진 고리 안에 마을이 갇힌 모양새였다.
“불이 번진다. 서둘러!”
“물, 물이 더 필요해!”
사람들이 줄을 지어 물을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쉬지 않고 물을 퍼 나르고 있었지만 불길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거세지는 느낌이었다.
“젠장, 불길이 잡히지 않아.”
“이대로라면 마을까지 다 잡아먹힐 거예요.”
“일단 대피하는 게 좋겠네. 우리 힘으론 역부족이야.”
열심히 물을 나르던 사람들이 절망 어린 얼굴로 산을 바라보다 서둘러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스승님, 이거 일반적인 불이 아닌 것 같아요.”
산불이 한 번 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정도가 심했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건조한 날씨도 아닌데 비정상적일 정도로 급격하게 번지고 있었다.
마치 불길이 이지를 가지고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산불이 퀘스트로 내려온 것부터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요력이 섞여 있군. 데이먼의 짓이다.”
손으로 주변 공기를 훑어 내리던 대공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물을 퍼붓는다고 꺼지진 않겠네요.”
“신력으로 내리 누르던가 아니면 매개체를 파괴해야 꺼지겠지.”
“매개체를 찾아봐요. 신력으로 제압하기엔 범위가 너무 넓어요.”
“이 정도는 괜찮다.”
“안 돼요. 그러다 또 아프시면 어떡해요?”
대공은 신벌과 반려에 대해 이야기해주면서 제한된 이상으로 신력을 사용하면 앓아눕게 된다는 것도 말해 주었었다.
‘지금 회복 포션도 없는데 앓아눕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지난번처럼 생으로 앓으려고?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지.
그때의 대공은 지켜보는 사람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 보였단 말이야.
“그때는…….”
“절대 안 돼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왜 무리하려고 하세요?”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마을 부근에서 소란이 일었다.
“황실 기사단이다!”
“이제 살았어, 살았다고!”
뭐? 황실 기사단이 왔다고?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월계수와 검이 새겨진 깃발이 보였다. 황가의 문장이었다.
선두에서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이는 클로디안이었다.
그의 뒤에는 근위대장과 애런이 따르고 있었다.
“하아.”
이례적으로 발생한 대규모 산불이니 황실에서 당연히 지원팀을 보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클로디안이 직접 왔을 줄이야.
‘아니, 이 위험한 곳에 황태자가 왜 직접 오는 거야?’
클로디안이 오니까 애런까지 따라왔잖아.
“마주치기 싫으면 보이지 않게 해줄 수 있다.”
힐끗 나를 본 대공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더 이상 숨길 수도 없게 되었는데요, 뭘.”
애런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에게도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얼마 전, 애런이 클로디안의 호위 기사로 발탁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테니까.
“대피하십시오!”
“아랫마을 대피소로 이동하십시오!”
기사들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주민들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네페른 백작가 기사단은 주민 대피를 돕고 4기사단과 5기사단은 산불을 끄는데 집중하도록!”
클로디안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끝내고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무니스 지역이 네페른 백작령에 속해 있어서 백작가 기사단들도 함께 온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클로디안은 말을 몰아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근위대장과 애런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나와 대공은 자리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차피 매개체를 찾다보면 서로 마주치게 될 테니 작업 전에 인사를 나누는 게 나았다.
산길 초입에 들어서던 클로디안이 우리를 보고 멈칫했다.
“당신은…….”
근위대장은 대공을 보자마자 검을 꺼내 들었다.
‘스승님이 누구인지 클로디안이 알려주지 않은 건가?’
추모탑에서 마주쳤을 때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는데 왜 저렇게 경계하는 거야?
게다가 애런은 대공의 정체를 알면서도 근위대장과 같이 경계심을 보였다.
‘쟤는 지난번부터 왜 저러는 거지?’
대공에 대한 경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공,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손을 들어 근위대장을 저지한 클로디안이 말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워낙 규모가 큰 산불이라 직접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클로디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다 옆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 계신 분은 누구신지.”
아무리 바디슈트의 안면창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 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저건 분명 놀리는 거였다. 이상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고.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로웨나 케인입니다.”
그래서 보란 듯이 인사를 해주었다. 물론 차림새를 고려해 기사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 그래도 나를 보고 당황하고 있던 애런은 정말 나라는 걸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영애는 오늘도 대공을 따라왔겠군. 그렇지?”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차림새가……. 어디다 눈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군.”
그때 애런이 저벅저벅 걸어와 제 망토를 내게 걸쳐주었다.
‘아, 이럴 필요 없는데. 내가 뭐 벗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돌려주려고 했지만 애런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에휴, 나중에 몰래 벗어야겠다.’
애런은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눈빛이었지만 클로디안이 함께 있는 탓에 입술만 달싹이다 물러났다.
“방호복이에요. 스승님께서 만들어 주셨죠.”
대공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모른 척 했다. 시스템이 준 거라 할 수는 없잖아.
대공의 정체를 아는 클로디안은 그런대로 납득했지만 나머지는 의아한 눈초리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특히나 애런은 강렬한 눈빛으로 대공을 쏘아 보았다.
“불은 우리가 끄도록 하지. 그쪽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 게 좋겠군.”
“지금 두 분이서 이 불을 끄시겠단 말입니까?”
근위대장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경악했다.
“이 불은 일반적인 불이 아니에요. 아무리 물을 쏟아 부어도 불은 꺼지지 않을 거예요.”
“로나, 그게 무슨 소리야?”
애런이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야. 마을 사람들도 불을 끄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하고 내려갔어.”
“그럼, 너도 피해야지. 왜 여기 있는 거야. 아니, 애초에 네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애런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나를 다그쳤다.
“하퍼 경,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 지금은 불을 끄는 게 먼저야.”
“……송구합니다.”
클로디안이 부드럽게 만류하자 애런이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큼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불을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클로디안이 대공에게 묻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맡기고 이 이상은 들어오지 마라. 다른 이들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알겠습니다. 이곳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로디안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당황했다.
그들 모두 대공이 제국을 수호하는 신의 사자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었다.
“로나!”
클로디안이 기사들을 데리고 물러서려고 하자 애런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로나, 여긴 위험해. 우리랑 같이 가자.”
내게 달려오려는 애런을 클로디안이 붙잡았다.
“하퍼 경, 영애는 무사히 돌아올 걸세. 나를 믿고 기다리게.”
“하오나 전하, 위험한 곳에 로나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경, 명령일세. 영애를 붙잡지 말도록.”
입을 꾹 다문 애런이 고개를 떨구었다. 세게 말아 쥔 두 손이 잘게 떨렸다.
나는 그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나를 향한 걱정이 진심이라는 건 알지만 그의 뜻을 따라줄 순 없었다.
불편한 마음을 털어버리려 산불을 끄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매개체를 어떻게 찾아야 하지?’
시스템의 어드바이저 기능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스승님!”
대공의 몸에서 붉은 신력이 피어오르더니 활활 타오르는 불길 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