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간에 알려진 러브 스토리,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긴장한 것인지 카밀라의 음성이 떨렸다.
슬쩍 내 반응을 살피던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지, 않네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어떻게…….”
“제가 좀 감이 좋아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아……. 제 연기가 부족했던 거군요. 눈치챈 사람들이 또 있을까요?”
카밀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마 없을 거예요. 주변에서 두 분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요.”
카밀라는 안도하면서도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그럼, 두 분은 정략혼인가요?”
“네.”
카밀라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숨긴 거예요? 정략혼이 문제될 건 없잖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저와 정략혼을 하겠다고 하셨다면 다들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예요.”
카밀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그 소식을 들었다면 나도 의아해했을 거라 딱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사랑으로 포장하면 전하와의 혼인이 좀 더 쉬워질 거라 생각했어요.”
“카밀라가 제안한 건가요?”
“아니요. 전하의 뜻이었어요. 전하께서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 그러신 거예요.”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퍼트리고 황제와 체임버 공작의 허락을 받는 일까지 클로디안이 다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좋은 분이세요. 제겐 과분한 상대죠.”
나는 동조하지 못할 말이기에 가만히 있었다.
클로디안은 제 사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서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이는 끝까지 보호했다.
‘나도 지난 회차에서 그 울타리 안에 있다고 안심했었지.’
기대와 달리 완벽하게 배신당하고 말았지만. 입 안이 썼다.
“어느 날 언니가 와서 그러더라고요. 아버지께서 제 혼처를 알아보고 계신다고.”
카밀라가 난간에 몸을 기대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처지에 연애결혼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돈만 보고 고른 자리들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지더라고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린 카밀라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때 절 구해주신 분이 황태자 전하세요. 제겐 은인이시죠.”
카밀라가 나를 돌아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전하와 인연이 닿아서 정말 다행이네요.”
“어제 일만 해도 전하께서 보내주신 기사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나 혼자서 카밀라를 24시간 지키는 건 무리였을 테니까.
“로웨나, 지금 제가 한 이야기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돼요.”
“물론이죠. 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입도 벙긋하지 않을게요.”
입에 자물쇠 채우는 시늉을 하며 말하자 카밀라의 얼굴에 안도가 어렸다.
이로써 두 사람이 정략 관계라는 건 확실해졌다.
나는 난간을 톡톡 두드리다 넌지시 물음을 건넸다.
“카밀라,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이전 물음이 너무 강력했던 탓인지 카밀라가 긴장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 말이에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그건 저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언니를 따라 보석점을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거예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숄을 붙들고 있는 손끝의 떨림은 감추지 못했다.
“낸시는 최고로 유명한 가게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죠. 그런데 어떻게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아이작이 언급된 걸까요?”
일순 카밀라의 눈가가 굳었다.
“아이작은 태어나서 한 번도 그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세공한 건 전부 공방 주인의 이름으로 팔렸고요.”
아이작이 말하길 그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었다.
“저는 그냥 보석점 직원이 언니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베히른에 홍수가 났을 때 황실에서 이례적일 만큼 빠르게 구호팀을 보냈었죠. 마치 홍수가 발생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찰나 카밀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아이작도, 베히른 홍수도 정보의 출처가 카밀라라고 생각하는데. 맞나요?”
“……제, 제가 어떻게 홍수를 예측할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카밀라의 얼굴이 창백했다.
“예측할 수도 있죠. 저도 하는데요.”
“……네?”
우뚝 움직임을 멈춘 카밀라가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는 알고 있었어요. 베히른에 홍수가 날 거란 거. 그래서 미리 준비했고 홍수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갔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카밀라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설사 내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농담이라 말하면 그만이었다.
베히른으로 제일 먼저 달려가 구호 활동을 펼친 사람이 나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내가 홍수를 미리 예측한 게 아니냐는 루머들이 잠깐 돌았었다.
그걸 이용해 둘러대면 카밀라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밀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미래를 보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닌 양 가볍게 묻자 카밀라의 얼굴에 당혹과 혼란이 어렸다.
내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려는 듯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는 눈길이 느껴졌다.
‘조금 더 흔들면 털어놓을 것도 같은데.’
나는 할 말을 신중히 골라 내뱉었다.
“저는 꿈을 통해서 봐요. 매번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만.”
“저도!”
자신도 모르게 외친 것인지 카밀라가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런, 이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내겐 잘된 일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카밀라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역시 황태자 전하께 홍수에 대해 알려준 사람이 카밀라였군요. 아이작에 대한 것도 꿈을 통해서 본 거고요.”
태연하게 말을 건네자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있던 카밀라가 나를 힐끗 살폈다.
“……저, 정말 로웨나도 미래를 볼 수 있나요?”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라가 고민에 잠겼다.
한참 동안 혼자 끙끙대더니 이내 한숨처럼 내뱉었다.
“로웨나의 말, 믿을게요.”
“고마워요. 믿어줘서.”
“……저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어요.”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죠.”
가볍게 대꾸하자 카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장미 축제 전이었어요. 이상한 꿈을 꾼 게.”
카밀라는 꿈을 통해 미래를 보았다고 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공작가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다가 19살 에 에슬라 후작의 후처로 들어갔단다.
후작과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그의 폭력에 시달리다 일찍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고.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그저 악몽을 꿨다 생각했죠.”
“공작님이 혼처를 알아본다는 말에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네요.”
“네. 그 혼처 중에 에슬라 후작도 있었거든요.”
그 사실을 알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단다.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 있는 혼인 상대자가 누가 있을까 고민해 봤는데 황태자 전하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 길로 황태자에게 달려가 미래에 대한 정보를 대가로 혼인을 청했고 베히른 홍수가 첫 번째 거래였다고 말해주었다.
“아이작에 대한 건. 공작가에서 독립하려면 돈이 필요해서 정보를 팔려고 했던 거예요.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지 못해서.”
카밀라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말해준 꿈 내용은 원작 게임에서 카밀라에게 운명으로 부여된 설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원작 게임에서 카밀라로 여러 번 플레이해 봤기 때문에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이 얼마나 가혹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살아남는 일만으로도 버거워서 두 회차 모두 그녀를 돕지 못했었다.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도 미안해요.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압박해서.”
카밀라에게 다가가 차가워진 손을 살며시 잡았다.
“저도 불안했거든요. 카밀라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행동해서.”
“사실은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꿈속에서 로웨나는 사업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다른 선택을 했으니 변화가 생긴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카밀라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사실 가장 이상했던 건 대공 전하셨어요. 그분은 제 꿈에선 존재조차 하지 않으셨거든요.”
대공은 이번 회차에 처음 등장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로웨나가 대공 전하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 무척 놀랐었어요.”
“저는 주요한 사건이 있을 때만 꿈을 꿔서 그런지 대공 전하에 대해서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어요.”
대공에 대해서는 모른 척 했다.
잘못하면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혹여 카밀라가 대공에 관해 파고들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요?”
그러게. 왜 나는 이 게임 속에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저도 그 이유를 알면 좋겠네요.”
내가 한숨을 내쉬자 카밀라가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저는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할래요. 그 꿈으로 인해 제 인생에도 희망이 생겼으니까요.”
카밀라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수줍은 듯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로웨나를 만나게 된 게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카밀라와 친구가 된 건 기쁘지만 그녀처럼 이 모든 일이 행운이라며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내겐 이 세계로 끌려 들어온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었으니까.
나는 복잡한 심정을 숨기며 카밀라를 향해 웃었다.
“저도 카밀라와 친해질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도요. 제가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늘 두려웠거든요.”
“우리 지금 나눈 이야기는 서로 비밀로 하기로 해요. 황태자 전하께도 말하면 안 돼요. 알았죠?”
“알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카밀라가 조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입술에 자물쇠 채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카밀라, 당분간 우리 집에 와 있지 않을래요? 어제 일, 계속 생각날 거 아니에요.”
클로디안이 빠른 시일 내에 사건을 마무리 짓겠지만 낸시가 그사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걱정이 되었다.
낸시 뿐인가. 체임버 공작저에 있는 이들 모두 카밀라에게는 위험인물들이었다.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로웨나에게 폐를 끼칠 순 없어요.”
“폐라니요. 카밀라가 머물러 준다면 저야 외롭지 않고 좋죠.”
우리 집에 머물며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나열하며 설득해 봤지만 카밀라는 난처하게 웃기만 했다.
“그럼, 아예 독립을 하는 건 어때요?”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아직 독립 자금을 다 모으지 못했어요.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지도 모르겠고요.”
“제가 집 얻어줄게요. 그냥 주는 거 아니고 빌려주는 거예요.”
놀란 카밀라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얼른 빌려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매달 임대료 받을 거예요. 그러면 괜찮죠?”
임대료는 카밀라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을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사주고 싶지만 부담스럽다며 펄쩍 뛸 것 같아 한 발 물러선 것이었다.
“찻집 해 보고 싶다고 했죠? 그것도 빠른 시일 내에 시작해 봐요.”
“로웨나…….”
카밀라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투자하는 거예요. 나 커피하우스들에도 투자하고 있는 거 알죠? 그러니 부담 갖지 말아요.”
“로웨나를 만난 건 정말 신의 축복인 것 같아요.”
카밀라가 울먹거리며 내게 안겨들었다.
아이처럼 훌쩍거리는 카밀라를 마주 안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여관에서 만났을 때 했던 말, 그냥 해 본 말이 아니에요. 카밀라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사실 그때 한 말은 카밀라를 가까이 두기 위해 꾸며낸 말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사업을 하면서 지켜본 결과 카밀라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습득력과 이해력이 뛰어났고 사업적 감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성실했다.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매튜도 분명 투자에 동의할 거야.’
카밀라를 직접 가르치고 함께 일을 해 봤으니까.
“내일 집하고 가게 알아보러 가요.”
“내일요?”
카밀라가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음먹었으면 빨리 처리해야죠. 미적거릴 이유가 없잖아요.”
“로웨나도 참.”
카밀라가 못 말린다며 웃었다.
“두 사람 다 감기 걸리려고 작정했어요? 뭐해요! 얼른 들어오지 않고.”
벨라가 테라스 문을 벌컥 열며 질책했다.
나와 카밀라는 혼자 나뒀다고 투덜대는 벨라를 달래느라 이후로도 한참 동안 술잔을 기울여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 낸시가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