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세상에. 공녀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벨라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카밀라부터 살폈다.
그녀는 카밀라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참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전하께서 보내주신 호위 기사분들이 지켜주셨거든요.”
“정말 다행이에요.”
벨라가 안도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오늘은 집에서 쉬시지 그러셨어요? 가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나도 말렸는데 극구 출근하겠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나는 여느 때처럼 카밀라를 데리러 갔다가 암살자들이 침입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카밀라는 창백한 얼굴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었다.
‘그런데도 출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내가 아주 속이 터질 뻔 했지.’
“어제 일이 자꾸 생각나서 혼자 있고 싶지 않았어요.”
카밀라가 살포시 눈을 내리깔자 보랏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던 나는 아침에 보았던 공작저 분위기를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공녀가 그것도 황태자의 약혼녀가 저택 내에서 암살당할 뻔 했는데도 공작가는 차분하기만 했다.
카밀라가 출근한다는데도 말리러 나오는 사람은커녕 배웅하러 나온 사용인들조차 없었다.
‘황태자와 약혼까지 했는데도 그런 대우라니.’
외출을 자유롭게 하길래 예전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너무 화가 나서 내 속이 다 부글부글 끓었었지.’
아휴, 다시 생각해도 열이 뻗치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삭였다.
어차피 조만간 공작가는 낸시로 인해 발칵 뒤집히게 될 테니 오늘은 내가 참는다.
“여기 오면 로웨나랑 벨라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카밀라가 말을 흐리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 아래 미처 다 감추지 못한 두려움이 배어나왔다.
“어제 일,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냈나요?”
벨라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밀라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황태자 전하께서 침입자들을 심문하시고 결과를 알려주신다고 하셨어요.”
“혹시 누가 그랬을지 의심 가는 사람은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겠고요.”
팔을 감싸는 손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가.’
미래를 알고 있다면 낸시가 황태자의 약혼녀를 암살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함께 마차를 타고 오면서 지켜본 카밀라는 정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연기 같지는 않은데.’
목숨을 위협받아 본 경험자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가족들도 많이 놀랐겠어요.”
카밀라가 정말로 낸시에 대해 예측하지 못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 번 더 떠 보았다.
“네. 언니도 놀라서 한달음에 달려왔더라고요.”
그거야 자신의 의뢰가 정말 실패한 것인지 확인하러 달려온 거겠지.
나는 비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카밀라를 살폈다.
그녀에게선 배신감이나 분노 하다못해 씁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낸시의 관심에 당황과 혼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낸시가 배후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네.’
카밀라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왜 이번 사건은 예측하지 못했던 걸까.
‘혹시 ……카밀라가 알고 있는 미래가 1회차 때 삶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와 클로디안의 사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 낸시의 암살 의뢰에 대해 몰랐던 점.
이 두 가지에 비춰보면 아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 보여준 카밀라의 행보에 가장 부합된 가설이었다.
1회차 때에는 낸시가 황태자비였으니까.
‘그런데 왜 1회차일까?’
카밀라가 이번 회차에서 처음으로 다른 행보를 보였던 걸 보면 첫 회귀일 텐데.
그러면 당연히 바로 직전의 회차가 전생이어야 하지 않나.
왜 타임라인이 꼬인 건지?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일단 그 문제는 미뤄두었다.
“체임버 공작님께서도 이번 일의 배후를 찾고 계시겠네요.”
벨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밀라에게 말을 건넸다.
“아, 네. 황태자 전하와 함께 조사하고 계신 것 같아요.”
카밀라의 얼굴에 미처 감추지 못한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것만 봐도 공작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사에 나선 건 황태자의 눈치가 보여서겠지.’
정말 하나같이 다 구제불능이구나.
지난 회차 때 내 상황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 집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에 발칵 뒤집어졌었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달음에 달려오신 아버지는 무사한 나를 안고 우셨더랬다.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지. 사용인들도 나를 극진히 보살폈고.
심지어 침실도 당장 바꿨다. 내가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면 안 된다고.
나는 물끄러미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작저에 돌아가도 침실을 바꾸기는커녕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겠지.
같은 일을 겪어서 그런가 왠지 오늘만큼은 카밀라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잘래요?”
나는 충동적으로 카밀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집에서 파자마 파티해요. 나 친구들이랑 그거 꼭 해 보고 싶었거든요. 벨라도 시간 되죠?”
“네, 괜찮아요.”
내 의도를 금방 눈치챈 벨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라도 같이 갈 거죠? 공작저에는 제가 서한을 보내 놓을게요.”
카밀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큰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나 파자마 파티하자고 부를 사람이 카밀라와 벨라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 꼭 부탁 들어줘야 해요.”
카밀라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하자 당황해하던 그녀가 이내 눈을 휘었다.
“저도 파자마 파티는 처음이에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집에 미리 알려놓아야겠네요.”
나는 바로 서한을 작성해서 슐레만 경에게 부탁했다. 각각 우리 집과 공작저에 전해달라고.
다행히 공작가에서 허락해 준 덕분에 우리는 일을 마치고 백작저로 향했다.
* * *
“으아, 개운하다.”
내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외치자 먼저 방에 와 있던 카밀라가 웃었다.
“로웨나는 목욕을 좋아하나 봐요.”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피로가 풀리거든요. 카밀라는 안 그래요?”
“저는 뜨거운 물엔 오래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갑갑해서.”
“파자마 파티를 하니까 이런 소소한 취향도 알게 되네요.”
싱긋 웃으며 찻잔을 들자 카밀라가 마주 웃어주었다.
그때 벨라가 잠옷에 가운을 걸친 차림으로 들어왔다.
“역시 하루의 마감은 목욕이죠.”
개운한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앉는 벨라를 보고 나와 카밀라가 마주보며 웃었다.
“왜 웃어요?”
“로웨나도 방으로 들어오면서 개운하다고 외쳤거든요.”
“벨라, 우리는 천생연분인가 봐요. 목욕을 즐기는 것도 닮은 걸 보면.”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건배하듯 찻잔을 들었다.
“저는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죠. 저와 영혼의 단짝이 되실 거라는 걸.”
벨라도 내 장단에 맞춰주며 앞에 놓여 있던 유리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혔다.
유리잔에는 냉차가 담겨 있었다.
그런 우리를 보곤 카밀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차로는 분위기가 안 사는데. 파자마 파티하면 술이 있어야죠.”
“술이요?”
카밀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녀님도 성인이시니 술 드셔도 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저는 식사 때 곁들이는 와인밖에는 못 먹어봤어요.”
“이런. 제가 오늘 공녀님께 가르쳐 드릴 게 많겠네요. 물론 호스트께서 허락하셔야겠지만요.”
“첫 파티를 고상하게 해 보려고 했는데 도와주질 않네.”
내가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자 벨라가 짓궂게 웃었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술과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안주들이 자리했다.
“자, 공녀님은 아직 주량을 모르시니 도수가 약한 과실주부터 시작해 보시죠.”
벨라가 카밀라의 잔에 과실주를 따르자 연노란빛의 액체가 흘러나오며 상큼한 사과향이 퍼졌다.
“벨라가 주는 대로 다 마실 필요는 없어요. 조금씩만 마셔요.”
“알겠어요.”
카밀라가 기대에 부푼 얼굴로 잔을 쥐었다.
“자, 영애와 저는 드라이한 와인부터 시작할까요?”
“좋죠.”
벨라가 나와 자신의 잔에 각각 와인을 따르자 짙은 붉은빛이 잔을 채웠다.
“첫 파자마 파티를 위하여.”
내가 잔을 들자 벨라와 카밀라도 잔을 들어 서로 부딪혔다.
영롱한 소리와 함께 잔에 든 술이 얕게 출렁거렸다.
“카밀라 먼저 마셔 봐요.”
카밀라가 긴장한 채 잔에 입을 대었다.
“어? 맛있어요. 달콤하면서도 상큼해요.”
“맛있다고 많이 마시진 말아요. 앞으로 맛볼 술이 많으니까.”
벨라가 웃으며 조언했다.
오늘 카밀라에게 제대로 술을 가르쳐 줄 요량인지 벨라 앞에는 이미 도수별로 술병이 세워져 있었다.
그렇게 한잔씩 이어가다보니 어느새 카밀라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카밀라, 황태자 전하와 연애 이야기 좀 해줘요.”
분위기도 적당히 무르익고 카밀라도 좀 취한 것 같아 클로디안 이야기를 넌지시 꺼냈다.
“저도 궁금하네요. 이런 얘기는 직접 당사자에게 듣는 게 제일 재밌거든요.”
다행히 벨라도 호기심을 보였다.
“아, 그게…….”
카밀라의 얼굴에 순간 당황이 어렸다. 취기가 오른 탓에 표정 관리에 틈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전하를 처음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어요. 제가 길을 가다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잠행을 나오신 전하께서 범인을 잡아주셨지요.”
그 후에도 몇 번 더 황태자가 도와주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였다.
카밀라는 세간에 알려진 러브 스토리 그대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딱 그만큼만 이야기했다.
‘정말 연애하고 사랑에 빠졌다면 이야기가 저렇게 단조로울 수 없지.’
그뿐 아니라 카밀라의 표정이나 음성 어디에도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설레임이나 수줍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반짝여야 할 눈빛마저도 건조했다.
나만 느낀 것은 아닌지 벨라의 표정도 묘해졌다.
“아, 저 좀 취한 것 같아요. 잠깐 바람 좀 쐬어도 될까요?”
카밀라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제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리 와요. 테라스에 있으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소파 옆에 있던 숄을 두 개 집어 들고는 카밀라를 데리고 테라스로 나갔다.
도톰한 가운을 입었지만 밤바람이 쌀쌀하게 느껴졌다.
나는 카밀라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고는 나도 숄을 걸쳤다.
“아, 고마워요.”
카밀라가 숄을 여미며 작게 웃었다.
나는 카밀라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가 난간에 팔을 기대었다.
밤이 깊은 탓에 정원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은 선명하게 잘 보였다.
‘여기 와서 좋은 건 별이 잘 보인다는 거지.’
먹을 입힌 하늘 위에 보석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나는 잠시 그 풍경을 감상하다 카밀라에게로 몸을 돌렸다.
“카밀라, 황태자 전하를 사랑해요?”
내 물음에 카밀라가 흠칫 몸을 굳혔다.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우린 친구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제게 솔직하게 말해줘요. 황태자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클로디안은 카밀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카밀라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로 클로디안에게 약혼을 제안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마음은 진심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카밀라를 구하는 일도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했다.
나는 카밀라가 대답해 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한참 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던 회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비밀 지켜줄 수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자 카밀라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