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제단을 부순 것뿐인데도 통쾌했다.
그런데 왜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렇게라도 두렵고 아픈 기억들을 다 씻어내 버리고 싶었다.
제멋대로 흘러나온 웃음은 꽤나 길게 이어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대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웃음이 멈추고 눈물도 잦아들었을 때쯤 나는 소매로 눈물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가 사라진 것처럼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웃으며 대공을 향해 몸을 돌리자 그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대공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더니 신력을 일으켰다.
시큰거리던 눈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내 제자가 울보라 성가시군.”
사고뭉치에 이어 울보라니.
내가 왜 울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불퉁하게 대공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무심하게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만 내려가지.”
널따란 등을 보며 혼자 툴툴대고 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 명이 아니었다.
“스승님.”
“알고 있다.”
걸음을 멈춘 대공이 우리가 들어왔던 문을 주시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발소리를 죽인 복면인들이 나타났다.
‘복면을 쓴 걸 보면 간수는 아닌 것 같고. 혹시 나를 납치했던 자들인가.’
데이먼이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보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긴장한 채 그들을 주시했다.
주위를 경계하며 빠르게 이동하던 이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멈춰 섰다.
선두에 서 있던 복면인이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놀란 듯 굳어버렸다.
나와 대공은 은신술로 몸을 숨긴 탓에 저들에겐 보이지 않을 터.
그럼에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라? 그런데 왜 시선이 비껴있는 것 같지?’
처음에는 우리를 쳐다본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와 시선이 어긋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우리를 넘어 제단이 있던 자리에 닿아 있었다.
‘아, 갑자기 제단이 없어져서 당황했던 거구나.’
그렇다는 건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누구지?’
복면인들을 한 명씩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여섯 명의 복면인들 중 절반이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선두에 서서 제단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클로디안.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은 근위대장 미첼 경.
그리고 제일 뒤에 서 있는 키 큰 사내는 애런이었다.
‘복면으로 가리면 뭐하냐고, 저 눈매며 눈동자 색은 그대로인데.’
게임 3회차 동안 지겹도록 본 인물들이니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클로디안이 근위대원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네.’
저 아래 감옥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된 건가. 그래서 구해주러 온 것일까.
경계하는 모습하며 근위대원들을 데리고 온 걸 보면 그런 것 같긴 한데 온전히 믿음이 가진 않았다.
“스승님, 황태자 전하가 근위대원들을 데리고 온 모양인데요?”
“그런 것 같군.”
대공도 클로디안을 알아본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먼저 선수 칠까요? 저들이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지도 모르잖아요.”
힐끗 나를 쳐다본 대공이 가볍게 손을 내젓자 금세 풍경이 달라졌다.
동시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쿰쿰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감옥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저도 여기에 갇혀 있었어요.”
내가 갇혀 있던 감방을 가리키자 대공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누가 이곳에 다녀갔는지 확실히 보여줘야겠군.”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랭한 음성이었다.
대공이 은신술을 거두자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향해 시선이 몰렸다.
우리 둘 다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대공만 얼굴을 드러냈다.
그가 손을 딱하고 튕기자 굳게 잠겨 있던 철문들이 동시에 열렸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공과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당신, 누구요?”
죄수들 중에 한 사내가 대공을 향해 물었다. 얼굴에 흉터가 크게 난 사내였다.
“내가 누구인지 그게 중요한가?”
“우,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사내 옆에 있던 다른 죄수가 겁을 먹은 채 물었다.
“이곳에서 나가게 해주지.”
“하,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라가나.”
얼굴에 흉터가 난 사내가 빈정거리자 대공이 또 한 번 손을 튕겼다.
“어? 이, 이게 왜?”
자신들을 구속하던 족쇄가 단숨에 풀려버리자 사람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시간이 없다. 감방에서 나오도록.”
사람들은 족쇄가 풀렸음에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설령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치더라도 도망가다 들키기라도 하면? 우리만 죽어나는 거야.”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 않나. 얌전히 지낸다고 해서 저들이 너희들을 살려줄 것 같나.”
대공의 말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지 침묵이 흘렀다.
“내가 책임지고 이곳을 빠져나가게 해 주겠다.”
“에이씨,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렇담 난 저 사람에게 걸어볼래.”
죄수들 중 한 사내가 벌떡 일어나 감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이들도 하나둘 감방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좁은 복도가 금세 사람들로 꽉 찼다.
그 순간 복도 끝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모여 있던 이들 모두가 숨을 들이켜며 긴장했다.
서둘러 감옥 안으로 들어오던 클로디안과 대원들이 우리를 보고는 멈칫했다.
특히 클로디안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대공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대공의 얼굴을 모르는 근위대원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들었다.
애런은 대공의 정체를 알면서도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후드에 가려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텐데 그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알아본 건가?’
내가 어디서든 애런을 알아볼 수 있는 것처럼 그도 나를 알아봤을지 모른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사이니까.
애런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또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클로디안이었다. 그도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흥미롭게 느끼는 것도 같았다.
이내 내게서 시선을 거둔 그가 대공에게 말을 건넸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여긴 무슨 일이지?”
“저들을 데려가기 위해 왔습니다.”
클로디안이 복도에 나와 있던 노예와 죄수들을 향해 눈짓했다.
대공은 클로디안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뒷수습을 감당할 수 있겠나.”
“……설령 감당하기 어렵더라도 해야겠지요. 옳지 않은 일이니까요.”
순간 클로디안의 녹안이 깊게 침잠했다. 그러나 금세 갈무리 되었다.
“뭐, 죽진 않겠지요.”
금세 평소처럼 돌아온 클로디안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대꾸했다.
이 일의 배후가 황제라는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태도였다.
“만약 죽을 상황이 된다면 공께서 저를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공범이니까요.”
다른 이들이 있어 일부러 대공이라 칭하지 않는 듯 했다.
“이렇게 하면 단독범이 되겠군.”
그의 말을 부정하며 대공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붉은빛과 함께 그 많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
순간 근위대원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클로디안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쭙잖은 정의감을 내세우기 전에 이 일의 배후부터 확인하고 행동하는 게 좋겠군.”
대공은 충고인지 배려일지 모를 말을 던진 뒤 나와 함께 추모탑을 벗어났다.
순간이동 직전에 봤던 클로디안은 두 주먹을 힘껏 움켜쥔 채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대공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보낸 곳은 황도 외곽에 있는 숲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몇몇 사람들은 도망간 상태였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사람들에게 현재 위치를 알려주고 대공저에서 미리 준비해 온 돈을 나눠주었다.
사나흘 정도 여관에서 숙박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다.
돈을 받자마자 쌩하니 도망간 사람도 있고 감사 인사를 건네는 이도 있었다.
개중 몇몇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여전히 멍하게 서 있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제일 나이가 어렸던 소년도 있었다.
아이는 멍하니 제 손에 들린 돈을 쳐다보다가 함께 노예로 잡혀 있던 어떤 청년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걸어가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부디 다시 잡히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보았다.
“황태자 일행 중에 네 친우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네.”
“알아본 것 같은데 괜찮겠나.”
“뭐, 제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요.”
애런이 한바탕 걱정을 쏟아내겠지만 어쩔 수 없지.
황제와 데이먼에게 대적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주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럴 때마다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 클로디안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애런과의 관계도 달라지게 되겠지.
최악의 경우 적으로서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더는 원망과 분노를 늘리고 싶지 않은데.’
원래 세계로 돌아가든, 이곳에서 소멸되든 그들에 관한 건 부정적인 감정은 물론이고 즐거웠던 추억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널 곤란하게 한다면 말하거라. 내가 처리할 테니.”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너무 염려마세요.”
대공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더는 그 문제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가 사람들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는데도 왜 맡기지 않으셨어요?”
“네가 선수를 치자고 하지 않았나.”
“그거야 황태자 전하의 목적을 모를 때 한 말이잖아요.”
“황궁 안에서 그만한 인원을 이동시키면서 황제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황태자 전하를 보호해 주신 거군요. 근위대원들도.”
“내가 황태자를?”
대공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그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뿐이다.”
에이, 아닌 척 하시기는. 딱 봐도 클로디안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까 선수 치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이어진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네가 그들 모두 구하길 바라지 않았나.”
지금 클로디안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 사람들을 안전하게 빼내온 거라는 말이야?
나는 대공을 보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 언저리가 간질거리는 게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술법이 새겨진 제단을 부쉈으니 황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술법은 어디나 다시 새길 수 있지 않나요?”
꼭 그 제단이어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새로 새길 수는 있으나 많은 요력이 필요하겠지. 현재 데이먼의 상태라면 단번에 완성하긴 어려울 거야.”
“그러면 판타시아의 주인이 죽을 수도 있는 건가요?”
“다음 제물을 바칠 시기 전까지 완성되지 못하면 죽게 되겠지.”
“데이먼과 황제가 그리 두지는 않겠죠?”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력을 보충해야 술법을 빨리 완성할 수 있을 터. 요력을 모으려면……!
“폴루티아를 이용하겠네요.”
“아마 그럴 테지.”
폴루티아를 급격하게 확장시킨다거나 지난번 폭설처럼 특이한 자연 현상을 만들어 낼 지도 몰랐다.
‘이거 발에 불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거 아니야?’
폴루티아가 확장되면 퀘스트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니까.
뭐, 몸이 힘들긴 해도 레벨 업에 퀘스트 보상까지 얻게 되니 내게 손해될 건 없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다 정화시켜 주겠어.’
“내일 당장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내일이요?”
제가 오늘 얼마나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냈는지 아시면서. 내일은 좀 쉬게 해주시지.
장화 신은 고양이를 생각하며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전에 바로 저택으로 오도록.”
단호한 대답에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훈련은 대공의 바람과는 달리 미뤄지게 되었다.
이시어스가 드디어 의뢰를 수행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