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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80)화 (80/140)

80화

1회차 때 클로디안이 낸시와 혼인했던 걸 보면 카밀라가 제안했을 가능성이 컸다.

두 사람 중 지난 회차들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사람은 카밀라니까.

‘역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분명해.’

아무래도 카밀라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카밀라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1회차 때 낸시처럼 정략혼이더라도 천수를 누리게 될까 아니면 나처럼 제물로 쓰이게 될까.

‘절대 나 같은 희생자가 또 생겨나면 안 돼.’

카밀라는 내가 지켜야 해.

“스승님, 그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에 조건이 필요한가요?”

오늘 본 광경과 내가 겪었던 것과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죄수들은 검은 연기가 살라먹었지만 나는 암흑 그 자체가 덮쳐 왔었다.

또한 나를 제물로 이용하려 했다면 그냥 간수들에게 던져주었어도 될 텐데 애런과 클로디안은 제단까지 직접 확인하러 왔었다.

나와 죄수들이 달랐던 이유가 뭘까.

죄수든 노예든 정기적으로 제물로 쓸 사람들을 공급받고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를 희생시켜야 했을까.

애런과 클로디안이 나를 증오하기라도 했다면 이해라도 되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지 않나.

“생명력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생명력이 강한 제물일수록 효과는 더 크겠지.”

“생명력이 강하다는 건……?”

“젊고 건강한 사람일수록 더 좋은 제물이 된다는 말이다.”

단순히 내가 젊고 건강해서 선택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귀족이었고 제국의 금권을 장악한 케인 백작가의 외동딸이었다.

더구나 황태자의 약혼녀이지 않았나.

죄수나 노예처럼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를 죽인 건 뒷수습에 대한 위험 부담을 감수할 정도로 내가 가치 있는 제물이었다는 뜻일 터.

그 가치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되는 게 없었다.

또 하나 의문이 드는 건.

애런과 클로디안이 제단에 묶인 나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어떤 사내와 함께 왔었다.

그 사내는 누구였을까.

그 사내를 찾아내면 내가 제물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나는 일단 복잡하게 엉켜드는 생각들을 다 털어냈다. 그리고 나를 죽게 만든 범인들만 추려냈다.

애런, 클로디안 그들 배후에 있었던 황제와 요수 데이먼.

‘최종 보스를 잡으면 내 죽음에 대한 비밀도 밝혀낼 수 있겠지.’

겸사 카밀라도 지킬 수 있을 테고.

어차피 이미 데이먼의 눈에 띄어버렸고 황제 또한 나를 데이먼에게 바쳤다.

그러니 더는 숨어 다닐 필요가 없었다.

‘사냥감이 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지.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나잖아. 내가 사냥꾼이 되어야지.’

내 죽음의 비밀을 밝혀낼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메인 퀘스트 완수도 중요하지만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억울해서 잠을 못 잘 것 같았다.

“스승님, 황제와 데이먼에게 복수 하실 거죠?”

“해야지.”

“그럼, 저도 같이 해요.”

대공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그 두 사람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거든요.”

“로웨나, 그 둘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아무리 우리 가문의 위세가 크다 하여도 일개 귀족 영애인 내가 황제의 권력에 맞설 순 없겠지.

데이먼도 마찬가지.

이제 겨우 레벨 50을 넘은 내게는 버거운 상대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끝이 아니지 않나.

“저는 점점 더 강해질 거예요.”

만렙을 달성해야 하니까.

“그리고 저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스승님, 당신이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는 거였다.

그러니 날 도와줘요. 나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신뢰와 기대를 담아 대공을 바라보자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눈빛을 보내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그들에게 갚아야 빚이 무엇이기에 위험한 길에 뛰어들려는 건가?”

나는 물끄러미 대공을 응시했다.

동료라는 건 서로 등을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신뢰가 있어야 하는 법.

솔직하지 못한 관계는 어그러지다 못해 상처만 남는다는 걸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니 용기가 생겨났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어요.”

생각보다 차분한 음성이 흘러나와 내심 안도했다.

“첫 번째 삶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오늘 보았던 제단에서 죽임을 당했죠.”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사실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엄연히 살아있는 존재였고 이곳은 그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이었으니까.

그의 정체성을 흔드는 충격은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애런과 클로디안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번 회차의 그들은 아직 죄인이 아니니까.

“죽고 나서 눈을 뜨니 18살로 돌아와 있었어요. 두 번째 삶에서도 똑같이 제단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어요.”

그러고 보니 나 두 회차 모두 스무 살을 넘기지 못했구나.

씁쓸함이 입안에 감돌았다.

“억울했어요. 왜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두려웠어요. 또 다시 그렇게 죽게 될까 봐.”

오늘 보았던 제단이 다시금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따뜻한 기운이 손에 닿아왔다. 눈을 뜨자 내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자 지그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대공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엔 어떤 의심도 비웃음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아니, 고요한 수면 위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제 말을 믿으시는 거예요?”

“너는 평범하지 않으니까. 나를 신벌에서 깨운 존재이지 않나.”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믿어줄 줄 알았어. 이러니 어떻게 의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엔 그렇게 죽지 않을 거예요. 꼭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살 거예요.”

나를 죽였던 이들에게, 시스템에게 절대 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저 말리지 마세요. 혼자서라도 할 거니까요.”

“……혼자서는 그들을 대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그러면 너를 돕도록 하지.”

“서로 돕는 거지요. 목표가 같잖아요.”

대공이 말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라는 듯 눈빛으로 나를 압박했다.

“약속 드려요. 혼자 나서지 않을 게요.”

“계시몽은 물론이고 그들과 관계된 일은 무엇이든 사전 보고하겠다고도 약속해.”

“계시몽은 그렇다 쳐도 다른 것도 꼭 그렇게 해야 해요?”

일반적인 조사를 나갈 수도 있는 거고, 달빛 저택에서처럼 우연히 사건에 엮일 수도 있는 건데.

“대답.”

“……네.”

“내가 제자를 들인 건지 사고뭉치를 들인 건지.”

“사고뭉치라니요! 제가 스승님도 깨워드리고 마수도 처리하고 폴루티아도 정화하고! 심지어 오늘은 중요한 정보도 알아왔잖아요. 이렇게 도움이 되는 사고뭉치가 어디 있어요.”

씩씩대며 항변하자 대공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훈련의 강도가 높아질 거다. 앞으론 봐주지 않을 거야.”

“언제는 봐주셨나요.”

입을 삐죽거리자 대공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각오하고 있어요. 열심히 할 거고요.”

순순히 대답하자 대공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지금쯤 데이먼도 알게 되었을 거다. 내가 너를 데려온 걸.”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스승님의 애제자로 판명 났으니 당당하게 다닐 생각이에요.”

“애제자?”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대공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맞잖아요. 스승님의 유일한 제자이자 아끼는 제자.”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펴자 대공이 어이없게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어? 웃으셨다.”

대공이 웃는 건 처음 보는 지라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웃었다고 하기에는 미미한 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무표정한 얼굴이 단숨에 화사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은 금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쉬워라. 예뻤는데.”

작게 중얼거리자 대공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머, 우리 스승님도 부끄러워하실 때가 다 있네.’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대공이 다시 고개를 돌려 진지하게 나를 응시했다.

“해머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널 데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데이먼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그렇겠지. 그는 대공의 소중한 것이라면 무조건 빼앗고 망가뜨려야 직성이 풀릴 테니.

단지 제자라는 이유로 내가 타깃이 된 건 좀 억울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이용해 주지.

“덕분에 데이먼을 찾기 쉬워지겠지요. 우리는 그 기회를 노리면 돼요.”

“네가 위험해지지 않나.”

“무려 신의 사자였던 자를 잡는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죠.”

“필립에게 네 호위를 맡길 생각이다. 어떤가.”

“필립 경은 스승님의 보좌관이자 호위 기사잖아요.”

아니, 필립 경이 맡고 있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스승님은 어쩌시려고요?

“지금은 너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시는지.

“감사드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대공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스승님과 저, 한배를 탄 동지죠?”

뜬금없는 물음에 대공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절 납치하고 감금했으니 응징해줘야죠. 동지로서 좀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호구 취급 받거든요.

“그쪽에서 먼저 도발했으니 응해줘야겠지.”

“역시, 스승님이랑은 말이 통한다니까요. 그럼, 가요.”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간단히 몸을 풀었다.

대공은 은신술로 자신은 물론이고 나까지 모습을 감출 수 있도록 해주었다.

우리는 그대로 추모탑으로 들어갔다.

대공이 바깥에서 지하로 바로 통하는 문을 알고 있던 덕분에 금방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제단이 있는 지하 1층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클로디안이 여태 남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 제단부터 부수고 가요.”

제단을 보니 다시 손끝이 차가워졌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시는 꿈에도 나타나지 못하게 완전히 부숴버리려고 마음먹었건만.

막상 제단 앞에 서니 손이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괜찮나.”

 말없이 제단 앞에 서 있기만 하자 대공이 나지막하게 물어왔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그의 금안엔 나를 향한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에 겨울 호수처럼 얼어붙어가던 심장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네.”

대공을 마주 응시하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회차는 절대 여기서 죽지 않을 거니까.

해머를 소환하자 미스릴의 서늘한 감촉이 손에 감겨왔다.

“스승님, 저 혼자 처리해도 될까요?”

나를 옭아매던 공포와 악몽을 내 손으로 직접 끊어버리고 싶었다.

대공은 대답 대신 제단에서 몇 걸음 물러났다.

“후우.”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제단을 향해 해머를 내리쳤다.

지이잉.

손으로 진동이 전해짐과 동시에 제단의 둥근 모서리가 부서져 내렸다.

‘이게 이렇게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이었나.’

제단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 카타르시스라도 느낄 줄 알았는데 제일 먼저 든 감정은 묘한 허탈함이었다.

그러나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나는 다시 해머를 들어올렸다.

순간 제단 위로 배신감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나를 집어삼키며 즐거워하던 암흑도.

그대로 해머를 내리쳤다. 그리고 또다시 해머를 들어 힘껏 내리쳤다.

암흑이 사라질 때까지. 제단 위의 내 모습이 지워질 때까지.

내려치고 또 내려치며 쉼 없이 팔을 움직였다.

무아지경에 빠져 해머를 휘두르던 나는 어느 순간 대공에게 팔을 붙잡혔다.

“그만.”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이미 제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얼마나 정신없이 해머를 휘두른 것인지 제단이 사라진 자리가 폭탄이 터진 것처럼 헤집어져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내며 제단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투툭.

어디선가 사슬이 끊어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해일처럼 밀려든 해방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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