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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9)화 (79/140)

79화

“스승님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생각보다 스승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나 봐요.”

고개를 도리도리 젓자 대공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게 심장을 내어준 이가 있다 한들 우리 관계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거다.”

지금처럼 계속 보호해주고 도와주겠다는 뜻으로 한 말일 텐데 왜 이렇게 서운하게 들리는 걸까.

앞으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제지간, 그 이상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 것 같잖아.

안 그래도 절망적인 미래가 더욱 암담하게 느껴졌다. 괜히 서러워져서 더욱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대공의 얼굴에 미미하게 당황이 어렸다.

나를 달래주려 한 말인데 내가 더 우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가 손수건을 소환해 내 뺨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내겐 반려가 있었다.”

반려란 단어에 명치에 뭔가가 탁하고 걸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이상함을 발견했다.

있었다? 왜 과거형으로 말하는 거지?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나에 대해서 먼저 말해줘야겠군.”

대공은 신의 사자와 반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반려가 죽고 신벌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히 말해주었다.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인을 잃게 되었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다만 황가와 데이먼에게 배신당했을 때의 그 심정만큼은 이해가 되어 내 마음도 뜨겁게 달구어졌다.

“데이먼 그놈이 네게 내 반려 이야기를 한 건 아마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일 거야.”

내가 그 자의 의도대로 움직인 덕분에 그 자는 목적을 달성했다.

내 물음으로 인해 애써 덮어두었던 상처를 헤집게 만들었으니.

대공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할 필요 없다.”

대공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도닥였다.

“에이바를 잃고 나서 다짐했다. 다시는 내 사람을 잃지 않겠다고.”

그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타올랐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킬 거다. 그러니 울지 말거라.”

울컥 감정이 복받쳐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를 지켜준다는 약속을 해 준 이도, 그 약속을 지켜준 이도 대공이 처음이었다.

지켜주겠다는 그 말 한 마디가 세상 어떤 사랑고백보다도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실레니아 호수에서도, 포인세티아를 선물해 주었을 때도, 눈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을 때도.

무뚝뚝하게 전하는 진심이 묵직하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었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시렸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우산 아래로 비껴 들어오는 빗물에 옷깃이 젖어들 듯 내가 애써 그어놓은 선을 넘어 그가 내 삶에 스며들었기 때문이었다.

퀘스트가 뜨면 자연스럽게 대공이 생각나고, 위험에 처했을 때는 어김없이 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전령새가 무사히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그뿐인가.

꽃을 보면 대공이 보여주었던 실레니아 호수가, 그가 선물해준 포인세티아가 생각이 났다.

언제 이렇게 내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걸까.

호감도를 위해 내가 대공의 삶에 파고드는 것만 생각했지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당혹스러웠다.

지난 회차의 경험으로 절대 공략캐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나를 지켜주겠다는 대공의 약속을 믿으니까.

반려가 죽었다고는 하나 백 년 동안 잊지 못한 사랑이다.

그러니 호감도 100%는 불가능한 목표일 지도 모르지.

그래도 끝까지 해보고 싶어졌다.

대공이라면 설령 메인 퀘스트를 실패한다고 해도 후회가 들진 않을 것 같아서.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상처 받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심으로 부딪쳐 보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을 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스승님, 저 한 번 안아주시면 안 돼요? 그러면 눈물이 그칠 것 같은데.”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내버려둔 채 대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숨을 내쉬며 외면할 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았다. 계속 두드려댈 테니까.

내 예상과 달리 그는 말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따뜻한 품에 안기자 안온감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나는 너른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도 그치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공은 내가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나를 놓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감사해요, 스승님.”

고개를 들고 뒤로 물러나자 대공이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그가 한 손을 뻗어 내 뺨에 대었다.

곧이어 붉은빛이 어리더니 이내 사라졌다.

띵하던 머리도, 뻑뻑하던 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나았다.

‘이봐, 이렇게 세심하다니까.’

표정만 보면 세상 무심한데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겠지. 저 무심함 뒤에 감춰진 자상함을. 어쩐지 웃음이 났다.

“이제 괜찮은가 보군.”

대공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게 느껴져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이렇게 차근차근 해 보는 거야.’

대공은 알 수 없는 각오를 다지며 그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봐도 되나?”

“네. 먼저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못한 것들부터 말씀드릴게요.”

나는 추모탑 지하에서 본 노예와 죄수들에 대해 얘기한 뒤 노예 경매장에서 본 것도 모두 말했다.

“이시어스와 샤밀란 백작가라. 다양하게도 얽혀 있군.”

“황제는 무엇을 위해 제물을 바쳤던 걸까요?”

그게 가장 의문이었다. 이리저리 퍼즐을 맞춰 봐도 그 부분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의문을 풀면 내 죽음의 이유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절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된다. 약속할 수 있나.”

잠시 고민하던 대공이 진지하게 물어왔다.

나는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단에 새겨진 술법은 죽었어야 할 사람의 수명을 강제로 연장시키는 것이다.”

죽었어야 할 사람?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판타시아 궁의 주인.

설마……!

경악하는 나를 보며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추측이 맞는다는 듯.

‘하, 세상에.’

아무리 제 연인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제 사람을 살리고자 다른 이들을 죽일 수 있나.

다른 누구도 아닌 법과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할 황제가.

그럼, 나도 판타시아 궁의 그 여인을 위해 희생된 거란 말인가.

숭고한 희생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황제의 정부를 살리기 위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허탈하다 못해 분노가 일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황태자는 황제와 연관되어 있으니 이해가 되지만 애런은 왜 나를 바친 거지?

살려야 할 여인이 황제의 정부였다?

그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둘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애초에 그 여인은 황제가 이미 잘 보호하고 있지 않나.

굳이 애런이 나서지 않아도 그 정부가 죽을 일은 없었다.

더구나 애런은 판타시아 궁을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을 텐데 언제 정부를 보고 사랑에 빠진단 말인가.

제단만 찾아내면 모든 의문이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엉키는 느낌이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나는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차근히 나열해 보았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판타시아 궁은 언제부터 세워진 걸까?

데이먼이 요수라면 대공처럼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터.

과연 황가와 관계를 맺은 게 이번 대 황제가 처음일까?

“스승님, 판타시아 궁의 주인이 이미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의 병명이 무엇인지 아세요?”

“……병이 아니다.”

“혹, 스승님의 신벌과 관계가 있는 건가요?”

대공의 이야기를 통해 황가에 대한 그의 증오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공에 대한 황제의 태도는 이해는커녕 의문만 들었다.

먼저 사죄하러 와도 모자랄 판에 그는 대공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으니까.

더구나 그는 대공의 원수나 다름없는 데이먼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지 않나.

그 일련의 행동들을 볼 때 황제가 대공을 적대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은 신벌.

백 년 전, 그 당시 황제는 신이 내린 신수를 제 손으로 죽였다.

자신이 아끼는 대공에게도 벌을 내린 신이 일개 인간인 황제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을 리 없지.

황가에 신벌이 내렸다고 생각하면 대공을 적대하는 황제의 태도도 납득이 되었다.

“황가도 그때 벌을 받은 거죠? 판타시아 궁을 만든 건 그 때문이고. 맞죠?”

내가 정곡을 찌른 것인지 대공이 난감하다는 듯 입가를 매만졌다.

잠깐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신벌을 받았을 때 황가에도 저주가 내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저주.”

생각지도 못한 저주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제국 역사를 배울 때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역대 황족의 배우자들 중에 단명한 이들이 많아서.

그게 다 저주 때문이었다니.

“데이먼이 아마 저주를 피할 방법을 찾은 모양이야. 그래서 판타시아 궁을 만들어 준 것이겠지.”

이제야 그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럼, 황태자도 그 저주에 대해 알고 있겠네요.”

“알고 있지. 하지만 데이먼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더군.”

아, 그래서 판타시아 궁을 조사하고 추모탑에까지 들어오게 된 거였구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2회차 때, 나는 클로디안의 연인이 되고 약혼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멀쩡했다. 그 말인즉슨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클로디안이 살리고 싶어 하던 그 여자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겠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마음이 아려왔다.

그래도 조금쯤은 내게 진심이었을 거라고 애써 위안을 삼아왔는데 그것마저 부질없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으니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배신감이 드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나를 기만하지는 말았어야지.’

나도 그에게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이기적이게도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이 흘러나왔다.

스스로의 모순적인 행동에 자괴감이 들었다. 비참했다.

그럼에도 내 원망은 멈추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우리 사이에 우정도 신의도 없었던 거야?

나와 함께 보낸 몇 년의 시간이 네겐 아무것도 아니었니?

생판 남에게도 하지 못할 일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게 저지를 정도로?

호감도 93%는 도대체 무엇을 나타낸 수치였던 건가.

아니, 애초에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도 되는 건가?

원망과 분노, 비참함과 허탈함이 한데 뒤섞여 가슴이 들끓었다.

“지금까지 황제의 혼인은 철저히 정략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다. 그건 황태자도 마찬가지겠지.”

그랬겠지. 사랑하는 사람은 판타시아 궁에 데려다 놓아야 살릴 수 있었을 테니.

잠깐, 그럼 카밀라는?

황족의 혼인은 정략혼이다.

카밀라는 클로디안과 약혼했으나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있다.

이 두 가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위화감을 느낀 이유가 이거였어.’

클로디안이 말했던 ‘그날의 대화’, 클로디안 앞에서 긴장하던 카밀라.

하, 둘이 정략 관계였어?

아주 제국민들을 상대로 거하게 사기를 치고 있었구나.

기가 막혀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누가 먼저 제안을 했느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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