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그 데이먼이란 자가 왜 스승님을 괴롭히려는 건가요?”
“나 때문에 자신이 추방되었다고 생각하거든.”
뭔지는 모르겠지만 둘 사이에 아주 복잡한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왠지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슬쩍 화제를 돌렸다.
“스승님, 제가 어디에 잡혀 있었던 건지 아세요?”
“추모탑.”
추모탑이라면 선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모셔둔 곳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황족뿐.
그 외에는 황제의 특별 허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런 곳에 제단이 있다는 건…….
문득 이시어스 마스터가 한 말이 떠올랐다.
황제가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을 거라던 말.
이제야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아주 그냥 내가 범인이요, 라고 광고를 하는 꼴이네.’
클로디안은 황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까.
노예 경매를 조사하라고 근위대원을 움직인 걸 보면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아까 제단에 왔던 것도 노예들을 추적하다 들어오게 된 것일까?
‘지난 회차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을 텐데 그는 왜 내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못 미더워서?
새삼 나와 클로디안의 관계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제단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모든 일의 배후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제국을 사랑하고 황태자로서 책임감이 강한 그라면 충격과 함께 자괴감에 빠졌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죄책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지도.
제 잘못이 아닌 일로 괴로워할 클로디안이 안타까웠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난 회차에서 그는 그 제단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바쳤던 사람이 아닌가.
지금까지는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제 아비와 똑같은 짓을 하게 될 사람이었다.
동정도 연민도 가당치 않지.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애런은 1회차 때 어떻게 추모탑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아무리 황태자의 호위 기사라고 해도 제를 지내는 기간도 아닌데 추모탑에 출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런과 황제가 접점이 있었던가?’
곰곰이 1회차를 복기해 보았지만 두 사람의 연결 고리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용의자는 클로디안 뿐인데.
‘……!’
설마 두 사람이 공모한 일인 건가?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1회차 때 클로디안과 나의 관계는 황태자와 귀족 영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애런을 도와주었던 걸까. 그가 얻는 이득이 무엇이 있다고.
‘……판타시아!’
판타시아를 매개로 두고 애런과 황태자 그리고 요수를 연결시키면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도 같은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이마에 닿아 왔다. 그 바람에 애런에 대한 상념이 흩어져 버렸다.
대공은 평소에도 보통 사람보다 체온이 높은데 오늘따라 그 손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차갑군. 데려오기 전에도 그러더니.”
그의 손에 붉은빛이 어리며 따스한 기운이 이마에서부터 발끝으로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그제야 내 몸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공은 내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걸 확인하고서야 손을 떼었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게 있나.”
질책하는 투는 아니었으나 지그시 응시해 오는 눈빛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그도 이상했겠지.
주위에 위협하는 이 하나 없는데 떨고 있었으니.
아, 맞다.
나 그때 스킬을 사용해서 은신 중이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지?
“스승님. 저를 어떻게 발견하셨어요?”
“……제단에 요력이 발동되면서 내게 신호가 온 모양이야.”
대공이 평소답지 않게 한 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지금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그냥 넘겼다.
“제 위치에 관한 거 말고요. 제 모습이 제대로 보이셨어요?”
“너를 감싸고 있던 결계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인가.”
“아……. 그게 보이셨어요?”
당연한 거 아니겠느냐는 듯 무심한 눈빛이 닿아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신수님께는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냥 확 시스템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대공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내게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예전에 해머를 두고 끈질기게 추궁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처음 너를 경계했던 건 황제나 데이먼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럼, 이제는 경계하지 않는다는 건가?
“이젠 너를 믿는다.”
조금 기대하긴 했지만 바로 돌직구를 날릴 줄이야.
하긴 판타시아 궁과 이번 납치 사건만 봐도 내가 그들 편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을 테지.
지뢰 밟았다고 시스템을 욕했었는데 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래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대공은 아직 나에 대한 의문을 다 풀지 못했지 않나.
“제가 어떻게 스승님을 깨웠는지 아직 모르시잖아요. 그런데도 저를 믿으세요?”
“여전히 그 부분은 궁금해. 하나 네가 내게 위해를 가할 리 없지 않나. 그러면 된 거지.”
아, 내 진심을 알아준 거야?
그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이 떠오르며 코끝이 찡해졌다.
대공이 보여준 신뢰에 나도 조금 용기가 났다.
조금은 내 얘기를 풀어내도 되지 않을까. 대공이라면 믿어줄 것 같았다.
“스승님, 제가 고백할 게 있어요.”
대공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이미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담담히 나를 응시했다.
“대공저를 찾아왔던 것도, 스승님을 깨웠던 것도 모두 우연히 아니었어요.”
슬쩍 대공의 살폈지만 그는 별달리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게 안심이 되어 찬찬히 이야기를 풀어갔다.
“해머를 얻게 된 이후부터 꾸게 된 계시몽은 폴루티아에만 한정된 건 아니에요.”
주로 폴루티아를 정화하라는 계시가 내려오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계시도 내려온다고 덧붙였다.
“그날도 계시를 받고 간 거였어요. 대공저의 위치를 알려주며 스승님을 깨우라고 했었거든요.”
그 외에도 해머를 비롯한 아이템과 스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계시몽을 꾸고 나면 계시를 이행하는데 필요한 물품들이 팔찌에 생긴다고.
더불어 해머의 신력이 높아지면서 결계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은의 장막’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은신 결계인데 시간제한이 있다고.
“해머를 갖게 된 이후로 늘 두려웠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거든요.”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하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다.
매 순간 호감도에 전전긍긍하는 것도 모자라 퀘스트에 끌려 다녀야 했으니까.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늘 나를 괴롭혔다.
이번 회차는 매 순간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하는 마수 토벌 때문에 더욱 긴장하며 살았었다.
“이 팔찌는 왜 제 눈에 띄었을까요? 이걸 집는 게 아니었는데.”
왜 ‘리라이트’라는 게임을 했을까요? 왜 히든 스토리를 보겠다고 ‘예’를 눌렀을까요?
그 모든 순간이 후회돼요.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져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도로록 흘러내렸다.
얼른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울고 싶지 않았다. 꼭 시스템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만 같아서.
‘스승님, 그거 모르시죠? 제가 그 제단에서 두 번이나 죽었다는 걸요.’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을 삼키며 대공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폴루티아를 누비고 마수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겠지.
곪아 들어가는 상처를 외면한 채 애런과 클로디안 그리고 제페스를 향해 거짓 웃음을 지어야 했을 테고.
요수에게 쫓겨도, 황제의 위협에도 혼자 맞서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혀왔다.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었을까?
이미 두 회차로 금이 가고 부서진 정신으로?
대공이 없었다면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을까?
“스승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혼자였으면 정말 외로웠을 거예요.”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새삼 내가 얼마나 대공을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안도와 고마움이 교차되던 순간, 갑자기 요수 데이먼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놈은 이미 심장을 바친 이가 있어.”
대공이 내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런가.
처음 그 말을 들었던 때보다 더욱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속단하긴 일러. 그 자가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잖아.’
대공을 곤란하게 만드는 걸 즐기는 것 같았는데 이것도 그의 장난 중 하나일지도 몰라.
‘우선 스승님께 사실 확인부터 하자.’
그러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입술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물음을 건네었다.
“스승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대공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대공이 입을 열었다.
“말해 봐.”
“혹시 마음에 담은 분이 계신가요?”
느리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일순 굳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답이 된 것 같았지만 확실히 하고 싶었다.
“심장을 바친 분이 계신 건가요?”
“……그건 왜 묻는 거지?”
“데이먼이라는 그 요수가 말해줬는데 정말인지 알고 싶어요.”
데이먼을 언급하자 대공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얗게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준 주먹이 잘게 떨렸다.
그가 왜 분노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하던 찰나.
머리 위에서 낮게 깔린 음성이 들려왔다.
“……있다. 내 심장을 내어준 이가.”
‘아…….’
나는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공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안다. 그건 호감도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 배신감이나 원망이 드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절망이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끊어졌으니까.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호감도가 올라갈지 여부는 둘째치고 이대로 대공의 호감도를 올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도 애런과 클로디안처럼 심장을 바친 그 여인을 위해 나를 제단 위에 세우게 되는 건가.
어쩌면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이곳을 나갈 수 없었던 것일지도.
문득 허탈해졌다. 지금까지 살아남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친 것이.
뺨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울고 싶지 않아. 이러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 같잖아.’
거칠게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닦고 또 닦아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눈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어 보아도 둑이 터진 것처럼 계속 흘러나왔다.
“스승님,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저 어떡해요.”
딱히 대공에게 뭘 기대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통제되지 않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흘러나오는 대로 뱉은 것뿐이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감싸왔다.
눈물을 닦아내는 손길이 서툴렀지만 그는 묵묵히 내 눈물을 받아냈다.
어느새 대공의 손도 흥건히 젖어 들었다.
“내가 너를 슬프게 한 건가?”
대공이 나를?
그는 나를 기만하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는 사랑이란 감정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저 사제지간의 정이나 동료애를 쌓았을 뿐. 그마저도 내 일방적인 감정일 가능성이 컸다.
그는 필요에 의해 나를 곁에 두고 지키는 것이니까.
그러니 그는 잘못한 게 없다. 그 때문에 슬픈 게 아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억울하고 절망적이어서 슬픈 것이지.
그런데 왜 마음이 시린 걸까.
일렁이는 금빛 눈동자를 마주 보는데 가슴 한편에 구멍이 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