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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7)화 (77/140)

77화

중앙에는 조금 전 감방을 나간 간수들과 죄수들이 모여 있었다.

간수들이 죄수들을 꿇어앉히자 그들에 의해 가려졌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

그 순간 나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던, 꿈에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제단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저게 왜 여기에…….’

벽을 따라 꽂혀 있는 횃불의 매캐한 냄새와 진동하는 썩은 내. 소름끼치게 차가운 돌의 감촉.

제단은 또다시 나를 악몽으로 끌고 들어갔다.

“미안해. 이 방법밖에는 없었어.”

내게 사과를 건네던 애런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뒤이어 그 목소리 위로 클로디안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이 차갑게 식었다.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떠나고 하나씩 꺼지던 횃불, 발끝부터 차례로 나를 잠식해 오던 한기.

마치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생생했다.

‘정신 차려! 이건 환상이야. 악몽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쳐 봐도 공포에 잠식된 육체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손바닥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제야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정신이 돌아온 틈을 타 입안의 살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과 함께 몸의 통제권이 점차 내게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붙들며 제단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공포 탓에 심장은 여전히 폭주 기관차처럼 뛰고 있었다.

“자, 저기 올라가.”

간수들이 죄수들을 제단으로 데리고 올라가더니 한 사람씩 제단에 묶기 시작했다.

인원수가 많았기 때문에 몇 명만 제단 위에 묶고 나머지는 제단 아래에 꿇어 앉혀 제단과 연결된 쇠사슬에 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려 달라 울부짖던 죄수들은 더는 소용없다 여긴 것인지 반항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저들도 제물로 바쳐지는 건가? 무슨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서?’

두려움과 혼란으로 뒤섞인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각선 방향,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기둥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가 있었다.

검은색 로브를 두른 자는 후드를 깊게 쓰고 있었지만 실루엣이 익숙했다.

‘설마 그는 아니겠지.’

당장 쫓아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단에 대한 공포가 가시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일까 봐.

마침내 열어 보게 된 판도라의 상자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들에게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나를 버리려던 건 아닐 거라고.

미련스럽게 붙들고 있던 한 줌의 기대마저 부서지면 나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하고 있을 때.

휘이익.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시선을 끌었다.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알 수  없는 바람은 점점 차갑고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때와 똑같아.’

나를 버린 사람들이 떠난 직후.

제단 맞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 횃불을 꺼뜨리고 제단을 휘감았었지.

바람이 스쳐지나간 자리마다 악몽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린 이만 가자고.”

“어휴, 여긴 올 때마다 섬뜩하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가자고.”

간수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공간을 떠났다.

우웅.

바닥이 진동하는 느낌과 함께 제단 주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건 나와 다른데.’

그 당시 검은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았었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이 나를 짓눌렀을 뿐.

그때까지 기둥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염탐꾼이 제단으로 향했다.

그는 검을 꺼내들고서도 막상 검은 연기에는 다가가지 못했다.

“아아악!”

그사이 검은 연기가 제단 주변에 묶인 사람들을 하나둘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죄수들의 비명이 음습한 공간을 울렸다.

죄수들이 하나둘 죽어가자 남은 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은 연기를 피하고자 발버둥 쳤지만 결코 제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내 검은 연기들이 남은 죄수들을 모두 뒤덮자 새까만 어둠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로브를 쓴 염탐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죄수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고 이내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뼈에 아로새겨진 고통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암흑에 짓눌려 뼈가 으스러지던 통증, 혈관이 쥐어 짜이고 손끝을 따라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던 감각까지.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혀 왔다.

“컥, 컥!”

아무리 숨을 내뱉어 보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 기도가 막히고 폐가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이대로 있다간 악몽에 먹혀 버리고 말 것이다.

하나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호흡도 돌아오지 않았다.

『경고! 플레이어의 HP가 하락하기 시작합니다.』

시스템창이 붉게 깜박거렸지만 점점 흐려지는 의식 탓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고작 악몽도 이기지 못하고 여기서 주저앉는 거야? 내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어?’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억울함과 분노가 치솟았다.

내가 왜 여기서 허망하게 무너져야 해? 저들은 멀쩡히 잘만 살고 있잖아.

나는 제단 앞에 망연히 서 있는 염탐꾼을 노려보았다.

‘살고 싶어. 살아서 반드시 내 세계로 돌아갈 거야.’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 한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절대 지지…….’

“않아!”

굳었던 입술이 움직여지며 울분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덩달아 막혔던 숨도 토해졌다.

“윽.”

순간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허억, 허억.”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에 허리를 숙이며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던 찰나.

탄탄한 품이 나를 받쳐왔다.

긴장한 것도 잠시, 따뜻한 햇볕을 연상케 하는 익숙한 체향에 힘을 빼고 기대었다.

“……스승님, 저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더는 이 악몽 속에 있고 싶지 않아. 여긴 너무 추워.

힘없이 중얼거리자 나를 안아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맞닿아 오는 뜨거운 체온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붙였다.

일순 나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부드럽게 밀려들어오는 온기에 뼛속까지 파고들었던 한기가 점차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아.”

깊은 안온감에 그제야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며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눈꺼풀이 스르륵 내리 감겼다.

『‘은의 망토’ 스킬이 해제됩니다.』

귓가에 알림음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 * *

따뜻해, 포근해.

폭신폭신한 구스 이불을 둘둘 만 채 온수매트 위에 누워 있는 기분에 몸이 나른해졌다.

‘너무 좋아.’

이대로 계속 자고 싶단 생각이 들던 차, 갑자기 몸이 흔들렸다.

“엄마, 조금만. 조금만 더 잘래요.”

이불에 얼굴을 묻으며 습관적으로 투정을 부렸다.

일어나기 싫어. 그냥 침대와 한 몸이 되고 싶다.

토……닥, 토……닥.

뭐지? 뭔가 굉장히 어색한 이 움직임은?

엄마는 늦잠 자는 내게 토닥토닥해 주실 분이 아니었다.

이불을 뺏으며 당장 일어나라고 호통을 치시면 모를까.

뭔가 이상한 느낌에 억지로 눈을 뜨자 이불이 아닌 새하얀 천이 보였다.

더불어 탄탄하고 광활한 무언가도.

그를 따라 죽 시선을 올리자 손을 대면 베일 것 같은 날렵한 턱선이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순간, 태양을 닮은 금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헉!”

그제야 대공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여기가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자 매우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저였다.

‘그곳에서 나왔구나.’

제단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 침대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도 대공은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있었다.

“제가 왜 스승님께 안겨 있었어요?”

“네가 정신을 잃어서.”

“침대에 눕혀 주시면 되었을 텐데.”

굳이 안고 있을 이유는 없었잖아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세요.

“네가 나를 놓지 않아서.”

대공이 제 가슴께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꼭 쥐고 놔주지 않았는지 셔츠 자락이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찮나.”

내 머리 위로 나지막한 물음이 떨어졌다.

“아, 네.”

“아픈 곳은?”

대공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분명 아릿할 정도로 통증이 있었는데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해져 있었다.

밧줄이 묶여 있던 손목도 깨끗해져 있었다.

“손을 혹사시키는 버릇이 있더군.”

힐끗 내 손에 시선을 던진 대공이 건조하게 말했다.

‘아, 스승님이 치료해 주셨구나.’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감사드려요.”

상처 치료해 주신 것도, 그곳에서 구해주신 것도.

내가 삼킨 뒷말도 다 알아챘는지 대공이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왜 피리를 사용하지 않았나.”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바로 힐난의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어떻게 그게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냐는 대공의 눈빛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트라우마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은 건 사실이니까.

“……실은 일부러 스승님을 부르지 않았어요. 요수가 바라는 일일 것 같아서.”

요수는 나를 탑으로 보내라 명령을 내릴 때 대공의 반응을 무척이나 기대하는 눈치였다.

마치 나를 이용해 대공을 자극하려는 사람처럼.

대공이 어찌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 처분도 달라질 거란 직감이 들었었다.

“데이먼을 직접 만난 건가?”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대공이 내게 바짝 다가왔다.

“얼굴을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스승님을 알고 있었고, 악취가 많이 나서 요수라 생각했어요.”

나는 납치당한 순간부터 탑에 갇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대공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큼 매서운 분노였다.

처음 대공을 깨웠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에 절로 뒷걸음이 쳐졌다.

그가 분노를 억누르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에도 갈무리 되지 못한 분노가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늦어서 미안하다.”

무표정한 얼굴을 자주 봐 온 탓인지 굳은 표정에 어린 자책을 읽어낼 수 있었다.

솔직히 요수를 마주했을 때 대공이 바로 나타나지 않아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그가 자책할 이유는 없었다.

언제 어디서 요수가 나타날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또한 나를 보호해 준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가 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지 않나.

“보호술은 그놈의 요력에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놈은 네게 손대지 않았지. 요력도 사용하지 않았고.”

그러고 보니 요수는 나를 관찰하기만 했었다.

나머지는 모두 복면인들을 시켰지.

와, 요놈 봐라. 영악한 놈일세.

“내가 애를 태우며 너를 찾아다니길 바랐던 거겠지.”

역시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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