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흠, 이상한데?”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제대로 데려온 게 맞아?”
“네, 맞습니다. 이 여인이 버몬트 대공의 제자가 맞습니다.”
“다른 이가 또 있는 건 아니고?”
“대공저를 드나드는 사람은 이 여인밖에 없었습니다. 확실합니다.”
가물거리는 의식 너머로 누군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같은데 귀가 멍멍한 탓에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에 힘을 주자 서서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린 탓에 인상을 찌푸리자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났구나.”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가까이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이기도 하지만 순간 확 끼쳐온 악취 때문이었다.
‘설마…….’
눈앞의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자 시야가 점점 맑아졌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검은색 후드를 쓴 남자가 보였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날렵한 콧날과 미려한 입매 그리고 남자다운 턱선까지.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음에도 꽤나 미남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요수가 맞는 건가?’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긴 해도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그에게서 나는 지독한 악취를 제외하면.
나는 최대한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 애썼다.
악취를 맡을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는 대공의 당부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단 어디로 잡혀온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슬쩍 시선을 들자 텅 빈 공간이 보였다.
허름한 창고 같은 곳으로 데리고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반적인 방처럼 생긴 곳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장소를 특정 지을 만한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공간에는 오로지 나와 요수로 추정되는 남자, 그리고 나를 잡아온 복면인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머리색을 보니 맞는 것 같긴 한데 왜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그사이 나를 관찰하고 있던 요수가 매우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판타시아 궁에서 신력의 흔적을 확인한 모양이네.’
그곳엔 두 개의 신력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와 대공의 것.
대공이 내가 사고 친 걸 알자마자 판타시아에 신력을 뿌려 놓았다고 했었으니까.
대공과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으니 나부터 데려와 확인하려 했던 거겠지.
‘그런데 머리색은 왜 언급한 거지?’
……설마, 케루나에서 날 본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판타시아 궁에 관한 일은 내가 해머를 꺼내지 않는 이상 빠져나갈 여지가 있다.
내가 가진 신력이 워낙 미미한 데다 해머의 신력과는 다르니까.
하나 폴루티아가 엮이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정화를 한 사실을 모른다고 해도 대공과 함께 폴루티아를 망쳐 놓았다며 분풀이를 할 수도 있지 않나.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최대한 동요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손과 발이 밧줄에 묶인 터라 거동이 쉽지 않았지만 열심히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당신들, 누구야!”
“곱게 자란 철부지 귀족이라길래 무섭다고 울 줄 알았는데. 담력은 있네.”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카이스랑 같이 내 정원을 망쳐놓고 다니는 사람, 너지?”
분명 웃고 있는데 왜 내 팔엔 소름이 돋는 걸까.
“신력도 없는 널 카이스는 왜 데리고 다니는 걸까? 인간 따윌 챙길 놈이 아닌데.”
정말 궁금한지 그는 아예 내 앞에 철퍼덕 앉아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았다.
“혹시 카이스 좋아해?”
뜬금없는 질문에 얼굴을 찌푸리자 그가 쿡쿡거리며 웃어댔다.
“하긴 걔가 재미도 없고 성질머리는 더러워서 매력이 없지.”
추방당하기 전엔 대공과 친했던 건가. 되게 친근하게 말하네.
스승님은 요수를 언급하실 때마다 원수를 만난 것처럼 분노를 내보이셨는데.
“그놈에게 뭘 기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충성을 바쳐봐야 너만 손해야.”
그가 갑자기 내게 훅 다가오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바로 뒤가 벽이라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가 비밀 하나 말해줄까?”
그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못된 장난을 앞둔 악동과도 같은 미소였다.
“그놈은 어떤 여인도 마음에 품을 수 없어. 이미 심장을 바친 이가 있거든.”
귓가에 작게 속삭여지는 음성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사실이냐고, 진짜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간신히 붙들고 있던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아닌 척하더니 이미 마음을 준 모양이네.”
내 표정을 본 요수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도대체 그놈이 볼 게 뭐가 있다고 저러는 건지.”
요수가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그때까지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복면인이 요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요수가 나를 보며 턱을 매만졌다.
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상태라 그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신력이 없으니 쓸모는 없지만 카이스, 그놈이 데리고 다니는 계집이라 이대로 버리기는 아깝긴 한데.”
“주군께서 전하시길, 뜻대로 처리하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뒷수습은 저희가 맡을 것입니다.”
“그래? 제국의 금권을 쥐락펴락하는 가문이라 들었는데 괜찮겠어?”
복면인은 대답 대신 복종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났다.
복면인들이 요수의 수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요수가 ‘제국의 금권’을 들먹이며 떠 본 걸 보면 복면인의 주인은 제국의 권력자 중 하나란 뜻.
또한 복면인들이 있는 곳에서 요수가 신력 운운한 걸 보면 대공이 신수인 것도 아는 자들이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황족밖에 없다고 했었어.
그럼 답은 하나.
황제가 복면인들의 주인이었다.
황족 중에서 요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만한 사람은 황제밖에 없으니까.
‘지금 황제가 나를 요수에게 판 거야?’
이 미친. 케인 백작가를 뭘로 보고.
우리 가문이 손을 쓰면 이 제국의 경제가 무너지고 황실 재정 또한 크게 타격을 입을 텐데 무슨 배짱인 거지?
제국이 흔들리는 것보다 자신의 정부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건가?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솟아올랐다.
“좋아. 그럼 탑으로 보내. 숨긴 게 있다면 드러날 테니. 겸사겸사 카이스의 반응도 떠 보고.”
“알겠습니다.”
복면인들이 내게 다가왔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그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사지가 묶인 상태라 도망갈 방도가 없었다.
순간 해머를 꺼내 처리할까 싶었지만 요수 앞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참았다.
‘일단 탑이라는 곳에 가서 상황을 봐야겠다.’
나는 복면인에게 들쳐 업히고 나서도 일부러 몸부림을 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목 뒤를 가격당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두컴컴한 곳이었다.
뺨에 닿은 차가운 돌의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긴 어디지?’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위를 둘러싼 창살들이 보였다.
‘감옥?’
쿰쿰한 냄새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내부가 꼭 지하 감옥 같았다.
그나마 저 멀리 벽에 꽂혀 있는 횃불 덕분에 어스름하더라도 주변이 보이는 것이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차가운 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던 것인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팔다리는 여전히 꽁꽁 묶여 있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찰그락 찰그락.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인영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사람들?’
밧줄에 묶인 나와 달리 옆방에 있는 이들은 손과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정말 감옥인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꿈틀꿈틀 움직여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그곳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으나 어두운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근처 창살에 기대고 있는 이들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별생각 없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던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저 아이는.’
힘없이 창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년은 분명 달빛 저택에서 보았던 아이였다.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던 하급 노예 중 하나였다.
다들 성인인데 저 아이만 나이가 어려서 유독 눈에 들어왔더랬다.
‘도망에 실패한 모양이네.’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소년은 그 사이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볼이 쏙 들어가 있었다.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저 소년만 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확인해 보자.’
‘은의 망토’를 활성화하려던 순간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바닥에 누운 채 실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들은 서너 명 정도의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소년이나 내가 있는 감방이 아니라 다른 감방에서 사람들을 꺼냈다.
“자, 오늘은 너희가 당첨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몇 명은 울며 매달렸고 또 몇 명은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기도 했다.
개중에는 이미 체념한 것인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들인 주제에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야?”
“목숨이 소중했으면 애초에 죄를 짓고 살지 말았어야지.”
순간 사내들이 한 말에 의문이 들었다.
‘죄를 지었다고? 저들은 노예가 아닌가?’
간수로 보이는 사내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문밖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더 지체하다간 나도 저들처럼 끌려갈 것 같아 얼른 ‘은의 망토’를 사용했다.
『‘은의 망토’ 스킬이 활성화 됩니다.』
『00 : 45 : 00 』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몸이 투명해지며 주변 배경에 동화되었다.
동화가 끝난 걸 확인한 나는 아이템 창을 열어 무기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곳엔 해머 외에 게임이 시작되면 기본 아이템으로 주어지는 싸구려 철검이 들어 있었다.
철검을 꺼내 손과 발의 밧줄을 잘라냈다. 그리고 감방 문의 자물쇠도 제거해 버렸다.
문이 열리는 걸 보았는지 옆 감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차피 내가 보이지 않을 테니 걱정되진 않았다.
철검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빠르게 감방을 나갔다.
앞으로 걸어가자 서너 개의 감방이 더 보였는데 모두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간수들이 들어왔던 문을 열고 나가자 제법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한쪽 벽면을 따라 꽂혀 있는 횃불을 따라 걷자 이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또 하나의 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표범인지 사자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이 새겨진 문을 살짝 열자 사람들의 목소리와 함께 썩은 내가 확 끼쳐왔다.
‘요수가 이곳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건가?’
소매로 코를 가린 채 문틈 사이로 주위를 살폈다.
근처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썩은 내가 후각을 강타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저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둥근 형태로 된 상당히 넓은 공간이었다.
굴곡진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이 꽂혀 있었고 중앙은 탁 트여 있었다.
‘설마……!’
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공간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들어 중앙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