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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5)화 (75/140)

75화

18살의 봄.

느지막한 저녁, 아버지께서 오직 그림자들만 대동한 채 자신을 데려간 곳이 있었다.

내궁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덤불만 무성한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왜 데려오신 걸까 의아하던 찰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몇 걸음 옮기자 갑자기 아담한 별궁이 나타났었다.

숨겨진 별궁, 판타시아를 보게 된 순간이었다.

“이곳에 내 사람이 있다. 아직까지도 건강하게 살아있지.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별궁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어느 한곳을 애틋하게 바라보셨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은발의 미인이 서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판타시아는 아버지의 연인을 숨겨놓은 곳이라는 걸.

“그러니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렇게 방법이 있으니.”

아버지는 결계를 만든 이가 누구이며 어떤 방법으로 그 여인을 지키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그저 때가 되면 알게 된다고 하실 뿐.

“만약 그 전에 네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내게 말하거라. 그때는 알려주마.”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 말을 듣고 클로디안은 자조했었다.

100년 전, 황가에 저주가 내렸다.

연정을 품으면 그 상대가 죽게 되는 저주.

축복이라 부르는 사랑이 한 순간에 죽음을 부르는 저주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언제부터 판타시아 궁이 생긴 것인지는 아버지도 모르신다고 했었다.

그 궁은 황제가 허락한 이들 외에는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 또한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진다.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황제의 연인은 그 궁에서 나오는 순간 죽는다.

평생 새장에 갇힌 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그 궁에서 나오지 않겠다는 종신 계약을 하고 들어간 자들이었다.

대개 가족이 없고, 삶의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이 그 제안에 응했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판타시아 궁에서 나올 수 없었다.

판타시아 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건 황제 그리고 황제의 전령새와 그림자들뿐이었다.

황족이 배우자를 맞이할 때 제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절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사랑을 줄 수 없는데 상대가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피곤한 일.

그렇기에 황족들의 혼인은 철저히 정략적으로 이루어졌다.

황족들은 사랑하는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판타시아 궁으로 데려오지.

‘평생 가둬두는 것이, 잊힌 존재로 만드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클로디안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평생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혹여 그 마음이 흔들릴까 봐 가볍게 연애를 하며 바람둥이처럼 굴었다.

솔직히 클로디안도 자신이 언제까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사랑은 소리 소문 없이 찾아오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 하지 않나.

자신이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에 그는 언제나 두려웠다.

‘그래서 대공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그는 제게 혼란만 던져주었다.

그래도 매달릴 곳은 대공뿐이라 그의 과제를 풀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 중 한 곳이 판타시아였다.

누가 그곳을 어떻게 만든 것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는지 해서.

‘대공이 먼저 헤집어 놓을 줄이야.’

그동안 솔직히 아버지와 대공 중에 누구의 말이 맞는지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대공이 저주를 내린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버지는 대공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별궁을 숨겼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공이 판타시아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도 정부는 아직 살아있었다.

대공이 찾아간 날 케인 영애의 말대로 위독했던 것 같긴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었다면 아버지께서 저리 멀쩡히 계시진 않겠지.

그러니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거였다.

“판타시아 궁에서 폴루티아와 같은 사악한 기운이 느껴져 찾아간 것이었다.”

궁 안에 들어가서야 황제가 저주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대공은 그리 말했었다.

여태 판타시아 궁을 만들어 준 이가 누구인지 찾고 있었던 클로디안에게 대공의 말은 충격이었다.

지금껏 황제들이 폴루티아의 배후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던 것인가.

폴루티아는 제국은 물론 이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는 원흉인데 어째서.

그때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지금껏 황실이 폴루티아 정화와 마수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이유가 판타시아 궁 때문이었나.

아버지가 학자들에게 연구를 맡겼던 것도 그저 보여주기 식이었던 건가.

그 사실을 깨닫자 황족으로서의 자긍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한동안 자괴감에 빠져 있던 클로디안은 역대 황제들처럼 추락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억지로 정신을 차렸다.

‘결계를 만든 자부터 찾아야 해.’

그래야 저주를 받게 된 진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클로디안은 우선 아버지부터 찾아가 넌지시 떠봤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할 수 없이 아버지와 그 주변을 염탐하게 되었으나 그림자들 때문에 그마저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클로디안은 풀리지 않는 숙제들만 한가득 떠안은 느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똑똑.

“접니다.”

근위대장의 목소리에 클로디안이 들어오라고 허락했다.

“어젯밤 추모탑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추모탑은 황궁의 가장 북쪽 끝에 있는 탑으로 역대 황제들의 영혼을 기리는 곳이었다.

“그곳엔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을 텐데?”

외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곳이라 제를 올릴 때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야심한 시각에 족쇄를 찬 이들이 추모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판타시아 궁 사건 이후로 황궁 전체에 감시 인력을 배치해 둔 상태라 잡아낸 것이었다.

“족쇄라…… 죄수들인가?”

“거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시 나온 이는 없었고?”

“아직까지는 없었다고 합니다.”

“미첼 경, 황궁 감옥과 바셀 중앙 감옥의 죄수 현황을 조사해 보게.”

“알겠습니다.”

근위대장이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족쇄 때문에 죄수들이 떠올라 감옥을 조사하라 지시하기는 했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추모탑에는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와 그들이 생전에 아꼈던 물건들만 전시되어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런 곳에 왜 사람들이 들어갔던 걸까.

그 많은 사람들이 다시 나오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다.

문득 얼마 전 달빛 저택을 다녀온 대원들의 보고가 떠올랐다.

특히 하퍼 경의 보고가.

‘노예들을 어디론가 정기적으로 보내는 것 같다고 했었지.’

설마 그곳이 황궁은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추측인데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클로디안이 야행을 나갈 날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 * *

“로웨나, 오늘도 고마워요.”

“뭘요, 카밀라와 함께 출퇴근하니 좋은 걸요.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고.”

카밀라의 인사에 웃으며 화답하자 그녀가 살짝 볼을 붉혔다.

“그럼, 내일 봐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마부에게 출발 신호를 주었다.

천천히 마차가 움직이며 카밀라가 점점 멀어졌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을 모양인지 그 자리에서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시어스의 암살 계획을 들은 다음날부터 나는 카밀라와 출퇴근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클로디안이 어련히 알아서 잘 지키겠느냐마는 이번 회차에는 변수가 계속 발생한 탓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시어스가 공작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벌일지도 모르지 않나.

그리하여 지금까지 카밀라와 함께 다니는 중이었다.

가면무도회를 다녀온 지 나흘째.

‘이제 슬슬 이시어스가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

창가에 몸을 기대자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가 보였다.

체임버 공작가를 떠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저, 아가씨. 앞에 마차 사고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길이 막혀서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부가 창가로 다가와 바깥 상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렇게 해.”

길이 막혔다는데 별 수 있나.

마부는 시내 초입에서 마차를 돌려 뒷길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통과한 마차는 이내 한적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노란색으로 물든 은행나무를 감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히이잉.

말들이 연기에 놀란 것인지 마차가 덜커덩거렸다.

“아가씨,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슐레만 경이 창밖 너머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평소에는 슐레만 경만 데리고 다녔지만 요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호위를 늘린 상태였다.

하여 슐레만 경을 비롯한 여섯 명의 호위 기사가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점점 차오르며 바깥이 잘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었다.

스르렁.

발검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슐레만 경의 목소리만 울려 퍼질 뿐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털퍼덕하며 육중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기점으로 호위 기사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검은 연기를 보며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하나, 둘, 셋 …….

근처에서 마차를 감시하고 있는 인원은 총 열 다섯.

내가 정신을 잃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바디슈트와 스킬을 이용하면 여기서 빠져나가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거란 직감이 들었다.

단순 강도 짓 같지는 않거든. 강도였다면 벌써 무기를 들고 덤볐겠지.

현재 나를 노릴 만한 세력은 이시어스, 황제, 요수 이렇게 셋.

저들을 보낸 이가 이들 중 하나라면 이런 일은 앞으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것이다.

‘누가 나를 노리고 있는지 알아야 나도 대응할 수 있겠지?’

어차피 내게는 사면패는 물론이고 해머와 스킬이 있으니 내 한 몸은 보호할 수 있었다.

게다가 대공도 있지 않나. 여차하면 그를 부르면 되었다.

나는 손수건을 내리고 검은 연기가 나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최대한 정신을 붙들며 문을 주시했다.

벌컥.

거칠게 문이 열리고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쪽에서 보낸 이들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들 중 하나가 마차 안으로 들어와 내 상태를 살폈다.

“아직 정신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곧 잃겠지. 어차피 반항하지는 못할 테니 데리고 나와.”

“알겠습니다.”

나는 손과 발이 묶인 채 복면인에게 짐짝처럼 들려졌다.

마차를 벗어나자 무언가 뒤집어 씌워지며 시야가 캄캄해졌다.

머지않아 내 의식도 퓨즈가 꺼진 것처럼 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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