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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4)화 (74/140)

74화

“영애가 대공에게 학문만 배우는 건 아니라고 들었어.”

“아, 네.”

대공이 클로디안에게 어디까지 말했는지 알 수 없어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이해가 돼. 베히른 영지에서 그대가 아침 운동을 했던 게. 다 훈련의 일종이었지?”

“……네.”

“그대의 꿈이 기사였다니. 정말 의외였어. 땀 흘리고 힘쓰는 일은 질색할 것처럼 보였는데.”

클로디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하하, 네. 어릴 적부터 애런과 같이 다니다 보니 기사가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대공이 어떻게 둘러댄 것인지 빠르게 파악한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췄다.

‘애런이 기사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어.’

클로디안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공이 영애와 함께 마수를 토벌하러 다닌다던데. 사실 지금도 그 말이 믿기진 않아.”

클로디안이 곤란한 듯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흠, 스승님께서 거기까지 말씀하셨단 말이지.’

요수가 이미 내 존재를 알아챈 상황이니 폴루티아를 다닌다는 사실을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정화자가 나라는 것만 숨기면 될 테니.

그렇다고는 하나 판타시아 궁과 마수 토벌과는 관계가 없는데 어떻게 엮으신 거야?

일단 나는 클로디안의 물음에 답부터 했다.

“스승님께서 대부분 다 처리하시죠. 저는 그저 경험을 쌓는 중이에요.”

“대공과 판타시아 궁에 간 게 사실이라면 그 궁에 관한 비밀도 다 알겠군. 안 그런가?”

내용만 보면 심문하는 내용인데 클로디안의 음성에는 체념과 함께 이유 모를 자조가 배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무거운 감정에 잠시 들었던 긴장감마저 흩어졌다.

“저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대가 함구한다고 해서 판타시아 궁에서 보고 들은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클로디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미 내가 그 궁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 했다.

‘클로디안은 황제가 정부를 숨긴 이유를 알고 있나 보네.’

왠지 판타시아 궁을 파헤치면 지금껏 알지 못했던 클로디안의 비밀을 캐낼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죽임을 당해야 했던 이유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미약한 기대가 일기도 했다.

“우리 이렇게 하면 어떻겠나? 내 질문에 답을 해줘. 그러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주지. 어떤가.”

“대답은 반드시 해야 되는 건가요?”

“당연하지.”

“만약 제가 거짓말로 대답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영애라면 사실대로 말해줄 거라 믿어.”

나를 얼마나 봐 왔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정말 나를 믿는 것 같진 않고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평소처럼 장난스런 미소를 걸치고 있는 클로디안에게선 속내가 읽히지 않았다.

“송구하지만 전하의 제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요.”

클로디안의 의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질문을 주고받으면 불리해지는 건 나였다.

그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이미 감추고 있는 비밀이 많으니까.

“나에 대한 신뢰가 없군.”

클로디안이 곤란하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저를 위협하며 잡아가려 하셨던 분을 신뢰할 수 있겠어요?”

“그림자들로부터 구해준 건 잊은 모양이로군.”

클로디안이 서운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든 제 죄를 밝혀내 처벌하실 수 있는 분이니 제가 신중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 영애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어.”

클로디안이 무언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황가의 문양인 독수리가 새겨진 황금 패.

그건 사면패였다.

사면패라는 건 딱 한 번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오직 황족만이 발급해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단, 예외는 있었다. 황족 시해와 역모, 반란 같은 죄는 사면 받을 수 없었다.

“이걸 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가 하는 모든 말들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단지 그걸 위해서 사면패까지 가져왔다고?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그냥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조만 해도 될 일을.

“사면패를 내주는 건 오늘 대화만을 위한 건 아니야.”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클로디안이 말을 덧붙였다.

“혹여 부황께서 판타시아의 일로 인해 그대에게 죄를 물으실 때를 대비해 준비한 거야.”

“아…….”

왜 나를 보호하려는 거지?

별궁 근처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서 심문하려 했던 사람이.

“부황께서는 판타시아 궁을 어지럽힌 자에게는 절대 자비를 베풀지 않으시지. 대공은 처벌할 수 없으니 그 분풀이를 그대에게 할 수도 있어.”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판타시아 궁에 황제의 정부가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나는 물론이고 내 가문에게까지 황제의 분노가 닿을까 지금도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건가요?”

“나는 대공의 도움이 필요해. 잘 보여야 하지. 그런데 대공의 마음을 움직일 방도가 없지 뭔가.”

클로디안이 난감하게 웃었다.

“그러다 대공이 그대를 아낀다는 걸 알게 되었어. 그래서 그대에게 투자하는 거야. 대공에게 잘 보이려고.”

클로디안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대공이 나를 제자로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이겠지.

그건 대공이 나를 곁에 두는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면패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도 명확히 할 건 해야 했다.

“만약 이 사면패로 저를 옭아매시려는 거면 거절하겠어요.”

나는 클로디안과 대공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클로디안을 돕겠다고 대공을 배신할 생각도 전혀 없고.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유일한 희망인 대공을 저버릴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내 뜻을 알아들은 클로디안이 피식 웃었다.

“그대에게 바라는 건 없어. 그대를 돕는 것만으로도 대공에게 충분히 눈도장을 찍는 거니까.”

도대체 대공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희박한 가능성에 이리 크게 베팅하는 것일까.

새삼 내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았단 생각이 들었다.

클로디안과 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얄팍했던 것인지 확인하고 나니 허탈함이 들었다.

나는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클로디안에게 말했다.

“지금 하신 말씀을 번복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황태자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좋아요. 전하를 믿고 거래에 응할게요.”

“흔쾌히 승낙해줘서 고마워.”

클로디안이 가볍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세부 규칙을 정하도록 하죠. 전하의 질문을 무한정으로 답해 드릴 수는 없으니까요.”

“내가 할 질문은 총 다섯 개야. 그 정도는 괜찮겠지?”

사면패까지 걸어놓고 그것밖에 안 한다고?

그 다섯 개의 질문 아래 하위 질문이 몇십 개씩 포함된 건 아니겠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클로디안이 마치 내 생각을 읽은 듯 작게 웃었다.

“정말 다섯 개만 질문할 거야.”

미심쩍긴 했지만 황태자가 두말 하겠나 싶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하문하세요.”

“판타시아 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스승님께 들었어요. 황제 폐하의 정부이시라고.”

“부황의 정부가 왜 그곳에 있는지는 알고 있나?”

“아프시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어요.”

클로디안은 내가 정말 사실대로 말한 것인지 가늠하려는 듯 잠시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었다.

“대공이 판타시아 궁내에 있던 검은 돌을 제거했다더군. 사실인가.”

“네. 궁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검은 돌이 박혀 있었어요.”

“그 돌을 제거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나?”

“그분의 병세가 악화된 것 같았어요.”

클로디안이 잠시 뭔가를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그대에게도 신력이 있나?”

마지막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당황한 나머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클로디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나는 금방 당황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스승님이 확인해 보신 결과 신력이 있긴 하다고 하시더라고요.”

클로디안의 녹안이 긴장과 기대로 살짝 부풀어 올랐다.

그런 그를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런데 그게 밀 한 톨 정도라 그 정도면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하셨어요.”

나는 한 치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신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신력 보유량이 많아서가 아니라 해머 때문이니까.

‘내가 신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왜 궁금했던 것일까.’

대공이 폴루티아는 물론이고 판타시아 궁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니 신술을 사용할 수 있나 의심한 건가?

그게 클로디안과 무슨 상관이지?

황가는 폴루티아에 철저히 무관심하지 않았나.

나는 언뜻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 클로디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전하, 저는 이제 그만 가 봐도 될까요?”

“어, 그래. 오늘 여러 모로 고마웠어.”

“저도 감사드려요.”

나는 사면패를 손에 꼭 쥐며 클로디안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젠 쥐도 새도 모르게 황제의 그림자들에게 잡혀갈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오늘부터 발 뻗고 푹 잘 수 있겠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카지노를 떠났다.

* * *

로웨나를 배웅하고 돌아온 클로디안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로웨나 케인에게 신력이 없다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화병에서 국화 한 송이를 빼내었다.

거짓말을 감별하는 마도구로 거짓을 말할 경우 꽃줄기의 색이 검게 변해버린다.

로웨나가 대답할 때 마도구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었다.

대공이 폴루티아에 로웨나를 데리고 다닌다고 했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었다.

그저 로웨나가 판타시아 궁에 들어간 일을 무마하기 위해 둘러대는 변명일 거라 생각했었다.

로웨나가 체력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으니까.

기사들도 상대하기 어려운 것이 마수인데 고작 몇 개월 훈련 받은 귀족 영애가 마수를 처리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나.

그러면 대공은 왜 그런 핑계를 댄 것일까? 판타시아 궁에는 왜 데려간 것이고?

안 그래도 대공이 로웨나를 싸고도는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지다 신력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었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만약 로웨나에게 신력이 있다면?

그렇다면 그토록 폐쇄적인 대공이 로웨나를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되었다.

판타시아 궁에 데려간 것도.

그래서 확인하려 했던 것이었다.

‘신력이 없다니. 그럼, 또 퍼즐이 비게 되는데.’

클로디안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까지 대공의 행동들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로웨나가 판타시아 궁에 찾아간 이유 또한 오리무중이 되었다.

‘해리가 가져온 자료에서도 별 게 없었고.’

대공저를 꾸준히 다니는 것 외에는 특별한 행보가 없었다.

‘로웨나 케인.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클로디안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 대공이 준 숙제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로웨나까지 의문투성이이니 머리가 아파왔다.

‘하필 수확제 때 거기서 마주칠 건 뭐람.’

봄의 연회, 여름의 장미 축제, 가을의 수확제.

이 3대 행사에는 황제가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부득이한 사정이 없는 한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관례였다.

아버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판타시아 궁으로 향했던 것인데 거기서 로웨나를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판타시아 궁.

그 궁에 대해 알게 된 건 18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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