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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3)화 (73/140)

73화

어제 무도회장으로 돌아갔을 때 카밀라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서운해 하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한 반응이었다.

알고 보니 벨라가 적당히 둘러대 준 덕분이었다.

카밀라 몰래 벨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자 그녀가 눈을 찡긋거렸었다.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무얼 하다 왔는지 묻지 않는 배려가 고마웠었다.

‘흠, 어제 얻은 정보들을 어떻게 써 먹어야 할까.’

어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정보들을 많이 얻었었다.

“일단 카밀라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

나는 그 길로 로벨라 보석점으로 향했다.

“카밀라, 출근했어요?”

“네. 지금 사무실에 계실 거예요.”

점원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3층으로 올라갔다.

‘어제 늦게까지 놀았는데 성실하게도 일하고 있네.’

하루쯤 쉰다고 해서 가게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럴 줄 알고 공작저가 아닌 가게로 온 것이지.

나는 기감을 세워 황태자가 보낸 호위들이 어디에 숨어 있을지 찾아보았다.

사무실 앞에 있는 조각상 뒤, 반대편 복도 끝에 각각 한 명씩 그리고 옥상에 두 명.

슬쩍 창문 아래를 내려보니 1층 건물 주변에도 네댓 명이 있었다.

황태자에게 알현 신청을 하고 찾아갈 수도 있지만 그건 여러 모로 좋지 않았다.

판타시아 궁 일부터 달빛 저택의 노예들을 풀어준 일까지.

내가 범인이라는 걸 상대가 모를 지라도 눈에 띄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행적이 남는 일은 더더욱.

그리하여 카밀라의 비밀 호위들을 통해 연락을 넣으려는 것이었다.

사무실 앞에 있는 조각상으로 향하자 비밀 호위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저기, 황태자 전하께 제가 조용히 뵙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카밀라의 안위에 관한 일이니 최대한 빨리 전해주셔야 해요.”

상대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무실로 향했다.

하루 이틀 내로 반응이 없으면 내가 움직이면 되니까.

* * *

“여기는 외부인 출입금지구역입니다.”

카지노 레드빅에서 검은 장막이 내려진 곳은 카지노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나는 입구를 막아선 경비병들에게 금박이 입혀진 조커 카드를 내밀었다.

오늘 오전에 황태자의 비밀 호위로부터 전해 받은 것이었다.

카드를 확인한 경비병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내주었다.

그러나 함께 온 슐레만 경은 들어오지 못했다.

“초대 받으신 분은 아가씨 한 분뿐이십니다.”

“경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슐레만 경은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기에 알겠다며 물러섰다.

경비병을 따라 도착한 곳은 2층에 있는 사무실이었다.

그곳엔 클로디안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디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는 본래의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평소보다는 수수한 차림이었다.

“아카르트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와서 앉게.”

클로디안이 제 앞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영애가 먼저 만나자고 청해올 줄은 몰랐어. 그것도 내 호위들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알현을 청하면 이목이 쏠릴 테니 그 방법이 최선이었어요.”

“그대의 연락을 받고 내 호위들에게 벌을 내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었지.”

클로디안은 빙긋 웃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리하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판타시아 궁 일도 그렇고 은신에 뛰어난 비밀 호위들의 위치를 찾아낸 것도 의심스럽겠지.

사실 별궁 일 때문에 당분간 클로디안과의 만남은 피하고 싶었으나 카밀라를 보호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카밀라가 신분을 숨기고 벨라를 찾아왔을 때 전하께서 카밀라를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호위들이 스스로 나서서 황태자가 보냈다고 말을 했었으니 클로디안도 이에 대해선 반박할 말이 없을 것이다.

“전하께서 보내신 호위들이 항상 카밀라를 지키고 있을 테니 허공에 대고 말해본 거였어요.”

비밀 호위들의 정확한 위치는 몰랐다는 걸 에둘러 전했다.

나 의심하지 말라고.

클로디안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에 관해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만약 호위가 없었거나 그대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어쩌려고 했나?”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전하를 직접 찾아갔겠죠.”

황궁이 아니라 카지노의 디안을 찾아 정보를 전달했겠지.

나는 내뱉지 못할 말을 삼키며 클로디안을 보며 웃었다.

그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이 이상 추궁해봐야 얻을 게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카밀라의 안위에 관련된 일이라고?”

“네. 낸시가 카밀라를 암살하려고 해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클로디안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다.

“낸시 체임버가?”

“네. 낸시가 어떤 사람에게 카밀라를 죽여 달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사흘 안에 돈을 지불하면 일주일 내로 처리해 주기로 약조도 받았다고 덧붙였다.

클로디안의 길쭉한 손가락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암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던 것인지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정보지?”

클로디안의 눈빛이 나를 속속들이 파헤칠 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달빛 저택의 가면무도회에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어요.”

“우연히?”

클로디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판타시아 궁 사건으로 신뢰를 잃은 모양이네.’

지난 회차들을 통틀어 이런 식으로 의심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네. 우연히요. 체형이나 목소리가 딱 낸시로 보이는 사람이 있지 뭐예요. 그래서 따라갔었어요.”

평소 달빛 저택에서 낸시를 알아보지 못한 이는 없었으니 내 말을 의심하는 않을 것이다.

“낸시가 카밀라에게 위해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 따라갔던 건데 그런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아, 그날 카밀라와 벨라도 함께 갔었거든요.’ 하고 덧붙이자 클로디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달빛 저택에 갔었다는 걸.

비밀 호위들에게 보고를 받았겠지.

“상대가 누구인지도 보았나?”

예상대로 그는 카밀라와 정말 같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았다.

“검은 가면에 은빛 별 세 개가 그려진 가면을 쓴 남자였어요.”

나는 낸시와 그 남자가 서로 주고받은 암호문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클로디안이라면 이시어스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니 이 정도 힌트만 줘도 알아차릴 것이다.

역시나 은빛 별이 언급되자 클로디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낸시가 그 남자에게 공작저에서 처리하는 게 수월하지 않겠느냐며 제안도 했었어요. 자신이 도와줄 수 있다고.”

공작저를 언급한 건 이시어스의 마스터였지만 마스터를 언급할 수 없으니 낸시 핑계를 댄 것이었다.

“공작저라…….”

클로디안의 입매가 살짝 비틀어졌다.

“카밀라를 지켜주세요.”

“내 약혼자니 당연히 지켜야지. 걱정하지 마.”

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다급하게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문득 이시어스의 마스터가 한 말이 생각났다.

“황태자는 제 약혼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무척 확신에 찬 어투였는데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것이었을까.

지금도 봐라. 카밀라가 위험하다고 하니 흉흉한 기세를 풍기며 다급하게 나가는 걸.

사랑하지 않는데 저러겠는가.

당연히 마스터의 헛소리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찜찜했다.

클로디안 앞에서 카밀라가 보이던 긴장과 ‘그날의 대화’ 같은 의미심장한 말들 때문에.

나는 관점을 달리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두 사람이  정략혼을 맺어놓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했다고 치자.

클로디안이 정략혼의 상대로 카밀라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그는 바람둥이처럼 행동하고 다녀도 무척 계산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1회차 때 낸시를 선택한 것도 순전히 정치적 이유였으니까.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낸시가 아니라 카밀라를 선택했을까.

그녀를 선택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 있다고?

순간 카밀라가 벨라에게 세공사에 관한 편지를 보냈던 일이 떠올랐다.

황실에서 베히른 영지로 보낸 구호팀의 구성과 파견 일자가 지난 회차들과 달라졌었던 것도.

‘설마 카밀라가 베히른 홍수에 대한 정보를 준 것인가?’

앞날을 예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나처럼 빙의자이거나 회귀한 게 아니고서야.

‘설마 카밀라도……?’

만에 하나 카밀라가 빙의나 회귀를 했다면 지금까지의 정황상 빙의자일 가능성은 적었다.

원작 게임에 아이작은 언급되지 않으니까.

게다가 카밀라는 달빛 저택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연기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이전 회차들에서 그녀가 일찍 결혼했고 사교계에 잘 나오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회귀가 더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건가?’

플레이어는 난데? 설마 3회차에 플레이어가 두 명이 된 건 아니겠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머리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그때 클로디안이 볼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영애가 알려준 정보들을 모두 전달했으니 카밀라는 안전할 거야.”

“감사드려요.”

일단 복잡한 의문들은 뒤로 미뤄둔 채 클로디안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내가 고마워해야지. 카밀라를 지킬 수 있게 해줬으니.”

“카밀라 곁에 전하께서 계셔서 다행이에요.”

“운명이 나를 카밀라에게 이끌었지.”

클로디안이 능청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클로디안과 카밀라의 사이를 떠 보기 위해 던진 말인데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무래도 카밀라 쪽을 더 파봐야겠네.’

제 속내를 감추는 데 워낙 능숙한 사람이라 클로디안에게서 뭔가 알아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전하, 전해드릴 말씀은 다 했으니 저는 이만 일어나 볼게요.”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클로디안이 붙잡았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내게 시간을 조금 더 내줄 수 있겠나?”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이 돼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황태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할 말을 정리한 듯 클로디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날 별궁에서 만났던 일 말이야.”

역시나 그 문제에 대해 물으려는 모양이네.

두근두근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스승님과 이미 이야기를 끝내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래, 대공이 그날의 상황에 대해 말해줬었지.”

“그렇다면 저는 그 일에 대해 더는 드릴 말씀이 없어요.”

클로디안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미소가 사라진 얼굴은 무척이나 건조했다.

“그날 나는 판타시아 궁을 조사하러 가던 길이었어. 그 궁은 내게도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황제가 클로디안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나 보네.

그건 좀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정부이길래 아들에게도 내보이지 않는 것일까.

“저도 그 궁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이름도 그날 스승님으로부터 처음 들은 걸요.”

“대공은 그날 그 궁을 정화하러 갔었다고 했어. 궁에서 사기(邪惡)가 흘러나오는 걸 감지해서.”

아, 그렇게 설명하셨구나.

대공은 사실대로 말한 것이었다. 주체가 대공이 아니라 나였다는 점만 빼면.

“그대는 훈련을 위해 데려갔다고 하더군.”

좀 더 창의적인 변명을 해주길 바랐는데. 뭐, 나 같아도 마땅히 댈 변명이 없을 것 같았다.

길을 잃었다고 할 수도 없고, 구경을 시켜 주러 들어갔다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그날 클로디안과 부딪힌 내 잘못이지 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을 텐데요. 저를 심문하거나 추궁하지 말라고.”

“그래, 그리 말했지. 내가 약조도 했고.”

“그런데 어째서 제게 그날 일에 대해 물으시려는 겁니까?”

“거래를 하려고.”

“네?”

“그대와 거래를 하고 싶어서. 이건 추궁도, 심문도 아니니 대공과의 약조를 어긴 게 아니지 않나.”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당황스럽게 클로디안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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