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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는 해머로 세상을 구한다 (72)화 (72/140)

72화

‘은의 망토’ 스킬은 내가 원하면 나와 접촉한 상대가 나를 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애런이 나를 알아본 것이었다.

또한 내 몸에 닿은 것들도 모습을 감춰주기 때문에 내가 손을 잡고 있는 이상 애런도 다른 이들에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수시로 타이머를 확인하며 있는 힘껏 달렸다.

최대한 사건 장소에서 멀어져야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았을 때 미리 보아두었던 건물 뒤로 숨어들었다.

5, 4, 3, 2, 1.

『‘은의 망토’ 스킬이 해제되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잡고 있던 애런의 손을 놓았다.

그제야 건물 외벽에 몸을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힐을 신고 달리는 건 정말 못할 짓이야.’

발뒤꿈치가 쓰라린 걸 보니 다 까진 모양이었다.

하필 꾸미고 나왔을 때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한숨을 푹 내쉬자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애런.”

“……정말 로나야?”

회색 가면 사이로 동그랗게 커진 벽안이 보였다.

나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서 얼굴을 보여주었다.

“진짜네.”

애런이 제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그 사람들은 왜 뒤쫓은 거고.”

내가 너 때문에 지금 무슨 고생을 한 줄 아니?

드레스를 입고 전력질주한 건 그렇다 쳐도 이제 이시어스는 물론이고 노예 경매 관련자들에게까지 쫓기게 생겼다고.

‘젠장. 황궁에서 사고 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쫓기게 생겼네.’

그나마 다행인 건 ‘은의 망토’ 스킬로 인해 저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러는 너는? 너는 왜 여기 있어?”

“나야 친구들이랑 가면무도회에 왔지.”

“거긴 무도회장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는데.”

“산책하다 보니 거기까지 가게 됐어.”

우연히 사람들이 보였는데 족쇄를 차고 있는 게 이상해서 숨어서 보다가 나선 거라고 설명했다.

“나는 어떻게 알아봤어?”

애런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계속 나를 추궁했다.

“뒷모습만 봐도 알겠던데. 너도 나 바로 알아봤잖아.”

“그거야 네 목소리를 듣고…….”

“나는 군중 속에 네가 숨어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애런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사람들이 쓰러지고 도망가길래 얼른 너 데리고 도망친 거야. 네가 들킨 것 같아서.”

내가 네 은인이라고. 이 친구야.

“고마워.”

애런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내게 미소 지었다.

“자,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넌 거기 왜 있었던 거야? 그것도 숨어서?”

“아, 뭐 좀 조사할 게 있어서.”

우물쭈물하는 거 보니 황명을 수행 중인 모양이었다.

‘황가에서도 샤밀란 백작가의 불법 노예 경매를 알고 있었던 건가?’

지난 회차에서 샤밀란 백작가가 처벌받는 일은 없었는데.

증좌를 알아내지 못했던 걸까?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일에 휘말린 것 같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발을 빼야지.

“비밀 수사 중인 모양인데 더는 묻지 않을게.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지?”

본관과 가까운 곳이니 저들의 눈을 피해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나는 카밀라하고 벨라와 같이 왔어. 무도회장으로 돌아가 봐야 해.”

내가 자리를 비운 지 꽤 시간이 흘러서 카밀라가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벨라가 잘 둘러대 줬으면 좋을 텐데. 내게 정보를 얻어 보라고 조언한 건 벨라니까.

“데려다줄게.”

애런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가면의 사내가 인기척을 느낀 건 애런 한 명이었다.

그러니 둘이 움직이는 게 어쩌면 의심을 덜 받을 지도 모른다.

가면무도회에서 커플들이 은밀한 곳을 찾는 일은 비일비재하니까.

우리는 가면을 다시 쓰고 여기서 만난 커플처럼 딱 붙어서 본관으로 향했다.

다행히 뒤를 쫓는 이들은 없었다.

* * *

로웨나를 무도회장으로 데려다 준 애런은 잠시 본관 주위를 돌며 분위기를 살폈다.

혹여 경매장 직원들이 이곳까지 수색하러 오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로웨나와 함께 도망칠 때 그 자들이 뒷모습을 봤을 가능성이 컸다.

건물 그림자 사이로 몸을 숨기며 달렸다고는 하나 드문드문 세워진 건물 탓에 그마저도 완전히 몸을 숨기진 못했으니까.

그들은 이미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한 명 이상이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추격하는 자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이제와 생각해 보니 로웨나와 함께 도망칠 때도 뒤를 쫓는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었다.

본관까지 달려와 수색을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이상한데.’

어째서 이렇게 반응이 없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로웨나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그전까지는 로웨나의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로웨나가 아무리 몰래 접근한다고 해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팔에 뭔가가 닿는 느낌과 함께 로웨나의 음성이 들리고 모습이 보였었다.

마치 눈앞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딱 그 순간 사라진 것처럼.

조금만 늦게 음성이 들렸어도 로웨나의 팔은 부러졌을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얼마나 아찔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선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아무리 자신이 노예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고 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문이 드는 또 한 가지.

로웨나는 왜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물론 정처 없이 걷다보면 거기까지 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노예들을 빼돌리고 있던 저택의 북문은 무도회가 열리는 본관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각각 저택의 양끝에 위치하고 있으니까.

‘노예를 봤음에도 침착하던 그 태도도 이상했지.’

로웨나가 원래도 담력이 큰 편이지만 담담해도 너무 담담했다.

의문을 표할 만도 한데 노예에 관해선 묻지도 않았고.

‘내가 수사 중이라는 것도 바로 알아챘지.’

원래 그렇게 눈치가 빠른 아이가 아니었는데.

사실 근래에 로웨나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상대를 배려할 줄도 알고, 화도 잘 안 내고.

무엇보다 많이 영민해졌다.

그녀의 보석점에 갔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카밀라 공녀가 로웨나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해주는데도 솔직히 믿기지 않았었다.

그 순간 로웨나가 조금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불안하거나 걱정이 드는 건 아니었다. 로웨나에겐 긍정적인 변화들이었으니까.

오히려 어릴 적 괴롭히는 아이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주었던 꼬마 로웨나가 생각나 반가웠었다.

그런데 오늘은 로웨나의 낯선 모습이 당혹스러웠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들로 마음도 불편했다.

이걸 파헤쳐서 해답을 얻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덮어야 하는 것인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다수의 다급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애런은 상념을 털어내고 기감을 세웠다.

검은 가면의 사내들이 본관 주위를 수색하는 게 보였다.

애런은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을 주시했다.

그들이 본관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애런도 주저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자신이 시선을 끌어 로웨나를 보호할 셈이었다.

다행히 애런이 나설 일은 없었다.

검은 가면의 사내들은 로웨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그들이 빠져나가고 얼마 뒤 로웨나도 일행과 함께 달빛 저택을 떠났다.

그제야 애런은 안도하며 저택을 벗어났다.

왜 그들이 로웨나뿐만 아니라 자신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은 채.

애런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공용 마차를 타고 달빛 저택을 빠져나왔다.

한적한 뒷골목에 내린 그는 옷을 갈아입고 흔적을 지운 다음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야심한 시각이라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지만 황태자의 집무실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하, 임무를 수행하고 왔습니다.”

“자네가 제일 늦었군. 걱정했어.”

“송구합니다.”

이번 임무에 투입된 인원은 총 네 명.

두 명은 달빛 저택의 본관을 중심으로, 나머지 두 명은 노예 경매장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개별적으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다른 이들은 이미 보고를 마친 모양이었다.

“정말 그곳에서 노예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던가?”

“네. 하벤 왕국의 귀족부터 다양한 출신의 노예들이 상품으로 올라와 있었습니다.”

“샤밀란 백작가가 겁을 상실했군. 이 아카르트에서 노예 경매라니.”

황태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황태자는 오래 전부터 샤밀란 백작가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 했다.

이번에 함께 임무를 맡은 선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그 노예들을 공급하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는가?”

“이시어스 암살 길드의 조직원이 경매장 직원에게 자연스럽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시어스 암살 길드에 대해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근위대에 들어와서 몇 가지 임무를 하면서 알게 되었으니까.

“샤밀란과 이시어스라. 재미있는 조합이군.”

황태자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냉랭하게 얼어붙은 눈빛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황태자가 말해보라며 눈짓했다.

“경매에서 팔리지 않은 노예들과 하급이라고 판명된 노예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송구합니다.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애런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로웨나를 만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황태자의 명이었다고는 해도 로웨나가 곤란해질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것인지 황태자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그곳’이라 칭한 것을 보면 자주 거래하는 곳인 듯 했습니다.”

애런은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수고했다. 다친 곳은 없는가?”

“없습니다.”

“오늘 본 것들은 모두 함구하도록.”

“존명.”

애런이 주먹을 쥔 손을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서 쉬도록.”

애런은 황태자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로나는 집에 잘 도착했을까?’

지금 당장 백작저로 찾아가 보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 망설여졌다.

밤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애런이 무언가 결심을 하곤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마구간에서 자신의 말을 꺼내와 무작정 달렸다.

마침내 애런이 도착한 곳은 케인 백작저였다.

그는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놓은 뒤 훌쩍 담을 뛰어넘어 로웨나의 침실로 향했다.

나무와 벽을 타고 발코니에 착지한 그가 방안의 인기척을 확인했다.

“나 너무 졸려.”

“아가씨, 이제 다 됐어요. 얼른 주무세요.”

“고마워, 조이.”

방 안에서 로웨나와 조이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목욕한 후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는지 조이의 손에 수건이 들려 있었다.

조이가 방을 나가기도 전에 로웨나가 풀썩 침대에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애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피곤했겠지. 그렇게 달렸으니.’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의혹들은 어느새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대신 그 자리에 안도가 차올랐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어쨌든 오늘 그는 로웨나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로나가 아니었다면 아주 곤란했겠지.’

어릴 적 언제나 저를 지켜주던 작고 가녀린 등이 생각났다.

오늘 그를 이끈 손도 그에 비해 턱없이 작았었다.

애런은 가만히 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아직도 로웨나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방의 불이 꺼지고 로웨나가 깊이 잠들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러고 나서도 침입자들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서야 발걸음을 돌려 황궁으로 향했다.

그의 머리 위로 호감도 38%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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