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낸시가 건넨 종이를 펼쳐본 이시어스 조직원이 곤란하다는 듯 제 턱을 매만졌다.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의뢰로군요. 저희 마스터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의뢰비는 원하는 대로 줄게.”
낸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의뢰비 때문이 아닙니다. 설마 의뢰 대상자를 누가 보호하고 있는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역시 카밀라를 죽여 달라 의뢰한 모양이었다.
이시어스가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상대는 황가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자신 없다는 거야? 업계 최고라는 명성은 허명이었나 보네.”
“저희는 의뢰를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이후에 발생할 일들까지 고려하는 것입니다. 레이디께서 저희를 보호해 주시진 않을 테니까요.”
“내가 너희를 보호해야 할 의무는 없지. 의뢰비만 잘 지급해주면 내 할 일은 다 한 거 아닌가?”
낸시가 부채를 팔락거리며 오만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만약 너희들이 일을 잘 끝내준다면 사건이 금방 종결되게 해 줄 순 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희들이 적당한 범인을 만들어 놓으면 조사가 빨리 끝날 거라고.”
나는 낸시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만약 의뢰가 성공해서 카밀라가 죽게 된다면 체임버 공작이 바로 나서서 수습할 것이란 뜻이었다.
낸시를 황태자비로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선 카밀라의 죽음이 계속 언급될수록 손해가 될 테니.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이긴 한데 낸시가 확신에 차서 말하니 뭔가 찜찜한데?’
설마 체임버 공작도 의뢰 사실을 알고 있는 건가?
순간 폐기 처분도 안 될 쓰레기력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럼, 지난 회차 때 낸시가 나를 죽이려 한 것도 공작이 알고 있었던 걸까?
그 생각을 떠올리자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분노가 치솟았다.
‘하,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내가 말이지, 당한 만큼 되갚아 주자는 주의라서.
지난 회차에서 낸시는 죗값을 치르게 했지만 공작은 손대지 않았었단 말이지.
‘이 문제는 좀 더 알아봐야겠어.’
내가 간신히 분노를 삭이고 있는데 조직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군요.”
“그 애 약혼자는 그 애를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죽는다 해도 별 관심이 없을 거야.”
“뭐, 일단 레이디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의뢰를 받아주는 거야?”
“네. 의뢰비 협상만 잘 끝난다면 말이죠.”
낸시가 금액을 제시해 보라며 손을 팔랑거리자 조직원이 종이에 뭔가를 적어 건네었다.
“되게 비싸게 구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위험수당이 필요한 일이라고.”
“알겠어.”
“사흘 내로 이 조각상 안에 의뢰비를 넣어놓으시면 일주일 내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직원이 그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아기천사 조각상을 툭툭 건드렸다.
낸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이곳을 벗어났다.
조직원도 곧 자리를 떠났다.
나는 조직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암살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조직원은 가면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본관을 지나 안쪽 깊숙이 자리한 별관 건물로 들어갔다.
별관 건물에는 아무도 없는 것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별관 안으로 들어가니 미술관처럼 다양한 종류의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면무도회 고객들이 올 만한 곳은 아닌데 왜 여길 온 거지?’
의문을 가지고 조직원을 따라가자 그가 전시실 구석에 있는 어느 그림 앞에 섰다.
관중들 앞에서 소녀와 광대들이 묘기를 부리는 평범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조직원이 액자 프레임에 장식된 나뭇잎 문양을 일정한 순서대로 누르자 달깍 소리와 함께 벽이 열리는 게 아닌가.
‘뭐야? 여기 비밀 공간이라도 있었던 거야?’
달빛 저택에 은밀한 공간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숨겨놓은 곳은 처음 봤다.
‘단순히 손님들의 유희로 만들어 놓은 공간은 아닌가 보군.’
나는 긴장한 채 조직원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을 따라 설치된 등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더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끝에는 하얀색 문이 하나 있었다.
조직원이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우람한 체격의 사내들이 조직원의 가면을 보고는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긴 복도를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돌자 공연장 같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 끝에는 무대가 하나 있었고 가면을 쓴 사람들이 관중처럼 앉아 있었다.
2층과 3층에는 박스석이 빙 둘러 있었는데 모두 얇은 커튼으로 앞이 가려져 있었다.
‘여긴 뭐하는 곳이야?’
어리둥절하게 주위를 돌아보다 무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는 몸을 굳혔다.
“자, 오늘의 네 번째 상품입니다. 얼마 전 망국이 되어버린 하벤 왕국의 귀족입니다.”
거리가 멀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무대에 올라오는 게 보였다.
그는 사지가 결박된 것도 모자라 목에 구속구까지 차고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지성까지 갖춘 데다 온순해서 길들이기 수월하실 겁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관객석에서 경매에 사용되는 패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노예 경매?’
아카르트 제국은 노예 거래가 불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노예 경매가?
‘샤밀란 백작가에서 불법 경매를 하고 있었다니.’
단순히 사교와 유희를 위해 가면무도회를 주최하는 줄 알았더니 더러운 짓거리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던 건가.
이 세계에서 벌써 3회차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노예 경매와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는 여전히 용납하기 어려웠다.
나는 애써 무대에서 시선을 돌렸다. 이대로 있다간 조직원을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조직원을 따라가자 3층 박스석 중 한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똑똑, 똑, 또똑, 똑.
조직원이 일정한 박자로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이시어스의 상징과도 같은 은별 가면을 쓴 남자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마스터.”
조직원이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이 이시어스의 마스터?’
덥수룩한 잿빛 머리의 사내는 권태로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다.
“의뢰 내용은?”
“카밀라 체임버를 죽여 달랍니다.”
“의뢰자는?”
“낸시 체임버입니다.”
낸시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평소와 다른 가면에 가발까지 착용하고 왔던데 그걸 바로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다고 해야 하나. 정보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역시 이시어스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체임버 공작가의 공주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나 보군.”
“황태자의 약혼녀라 난색을 표했더니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마스터가 말해 보라며 고개를 까딱이자 조직원이 낸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암살이 일어나도 사건이 빨리 종결될 거란 얘기였다.
“재미있군.”
마스터가 피식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의뢰를 수락하긴 했습니다만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우리가 제시한 금액을 준비해 온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하지만 황태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황태자는 제 약혼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마스터가 다리를 꼬며 와인잔을 빙글 돌렸다.
“만약 황태자가 나선다고 해도 황제가 막을 것이다. 그에겐 우리가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의뢰비가 들어오는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황태자가 호위를 붙였을 테니 공작저 내에서 처리하도록 해.”
그래야 의뢰자의 협조도 얻을 수 있고 호위도 상대적으로 느슨해질 거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흔적 남기지 말고 깔끔하게 처리해. 적당한 범인도 하나 만들어 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조직원은 마스터에게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른 그를 따라 박스석을 나왔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스킬 사용 시간이 20여분 정도 지난 상태라 여기서 빠져나가는 데 집중해야 했다.
1층으로 내려가자 경매가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그때 앞서 걷고 있던 조직원이 근처에 있던 남자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우락부락한 체격의 남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아무 장식도 없는 검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오늘 경매에 낙찰되지 못한 상품들은 하급들과 함께 묶어서 그곳으로 보내도록. 급하다고 하니 빨리 움직여.”
“알겠습니다.”
그곳? 어디로 보내라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애써 관심을 끊었다.
들어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관객석 맨 끝에 앉아 있던 사람이 방금 조직원의 지시를 받은 사내 뒤를 몰래 쫓는 게 아닌가.
문제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굉장히 익숙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귓불이 아래로 늘어진 귀 모양이 딱 내가 아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머리색이 금발이 아니긴 했지만 이곳에 가발을 쓰지 않고 오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니, 쟤는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게다가 여기 직원을 따라가는 모양새가 아무리 봐도 미행하는 거였다.
애런은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만 은신술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보다 큰 키와 체격은 은신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며 애런을 따라갔다.
경매장 직원이 도착한 곳은 감옥을 연상케 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시큼한 냄새가 훅 끼쳐들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쇠창살로 만들어진 각각의 우리엔 노예로 보이는 이들이 결박된 채 갇혀 있었다.
“야, 여기 있는 놈들 다 끌어내.”
직원이 소리치자 간수로 있던 이들이 우리 안에 있던 노예들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따라가다 어떤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갔다.
‘여기는 어디지?’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는 건물이 보였다.
가면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본관이었다.
본관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곳은 달빛 저택의 북쪽, 후원 끝자락인 것 같았다.
“꾸물대지 말고 서둘러.”
간수들이 바닥에 채찍을 내리치며 노예들을 재촉했다.
노예들이 움직일 때마다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무사히 지하를 빠져나온 애런은 건물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도 그를 따라 몸을 숨기며 타이머를 바라보았다.
『 00 : 09 : 47 』
‘시간이 별로 없네.’
나는 애런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건물 외벽에 바짝 몸을 붙인 채 간수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걸 보면 괜찮지 않을까?
노예들이 저택을 빠져나가고 나면 애런도 돌아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억지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애런이 갑자기 담벼락을 향해 움직였다.
노예들이 향하는 뒷문 너머를 살펴보려 한 것 같았는데 불행히도 나뭇가지를 잘못 밟는 사람에 소리가 나고 말았다.
“거기 누구냐!”
경매장 직원이 애런이 있는 곳을 향해 소리치자 다른 직원들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들 모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었다.
애런에겐 퇴로가 없었다. 체격도 큰 탓에 몸을 숨길 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럴 줄 알았어.’
바로 해머를 소환한 뒤 열 명이 넘는 노예들의 족쇄를 다 부숴버렸다.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당황하던 노예들이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붙잡으려던 간수 몇 명도 해머로 날려주었다.
“노예들이 도망간다. 어서 잡아라!”
애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던 직원들이 노예들을 붙잡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나는 그 틈에 애런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속삭였다.
“나야.”
반사적으로 손을 뿌리치려던 애런이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움찔했다.
뒤이어 내 모습이 보이자 그가 크게 눈을 떴다.
나는 애런이 나를 알아본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