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가면무도회는 좀 위험한 곳이지 않나요?”
카밀라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심하셔도 돼요. 여기는 다른 가면무도회와 달리 치안도 잘 되어 있고 예의를 지키는 곳이니까요.”
“벨라 말대로 저급한 곳은 아니니 걱정 말아요. 가면을 써서 상대를 모른다는 것 외에는 일반 무도회와 똑같아요.”
물론 여기도 할 건 다 한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놓고 하지 않을 뿐.
가면무도회의 장점인 스릴과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은밀한 장소들이 따로 제공되기 때문에 얼굴 붉힐 일은 없었다.
또한 상대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일 또한 없었다.
바로 퇴장 조치되니까.
경고를 세 번 받으면 영원히 달빛 저택에 들어올 수 없기에 불미스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는 이런 곳은 처음이라.”
그제야 긴장을 푼 카밀라가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기 낸시도 자주 오는 곳인데 설마 마주치진 않겠지?’
지난 회차에서 달빛 저택에 올 때마다 낸시를 마주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도 최대한 튀지 않게 꾸미고 갔었지만 낸시는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나 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화려하게 꾸미고 왔었다.
그녀의 목적은 딱 하나.
황태자를 만나 유혹하는 것.
나야 게임 정보를 가지고 황태자가 이곳에 온다는 걸 알았지만 낸시는 도통 어디서 정보를 얻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황태자비에 집착이 강한 그녀가 황태자가 약혼했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카밀라라면.
이곳의 밤은 얼마든지 상대의 눈을 가리고 애정을 탐할 수 있으니까.
‘흠, 가면을 쓰고 있으니 서로 알아보지 못하겠지?’
설령 카밀라가 낸시를 알아본다고 해도 낸시가 카밀라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애초에 카밀라가 이곳에 올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
“오늘 파티 장소를 가면무도회로 정한 건 공녀님 때문이에요.”
“저요?”
“네. 가면무도회는 처음이실 것 같아서. 원래 이런 곳엔 여자 친구들하고 같이 오는 거거든요.”
“여자 친구요?”
벨라가 장난스럽게 속삭이자 카밀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요. 우리 셋 친구잖아요. 안 그래요? 영애?”
벨라가 내 팔을 툭 쳤다.
“친구 맞죠.”
긍정해주자 카밀라의 얼굴에 기쁨과 감격이 어렸다.
“그러니 우리 오늘 재미있게 놀아요.”
“네, 그래요.”
벨라의 말에 카밀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외쳤다.
마차는 어느새 저택의 정문을 통과해 무도회가 열리고 있는 본관에 다다랐다.
“자, 가면을 쓰세요.”
우리는 가면이 잘 착용되었는지 서로 확인해 준 후에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 앞에는 연미복을 입은 젊은 사내들이 서 있었다. 그들 역시 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연회홀까지 에스코트해줄 거예요.”
나는 시종들을 보고 당황한 카밀라에게 속삭였다.
“아, 네.”
그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세 사람은 시종들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홀로 입장했다.
연회홀은 일반적인 무도회보다 조도가 낮았고 음악도 차분하고 조금은 끈적한 느낌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홀 양쪽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벽면을 따라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와, 이런 게 가면무도회군요.”
카밀라가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속삭였다.
은색 가면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괜찮죠?”
나는 홀 내부를 둘러보며 카밀라에게 물었다.
다른 곳이었으면 취해서 휘청거리는 사람은 물론이고 서로 한 몸으로 엉켜있는 커플들이 보이고도 남았을 텐데.
여기는 사람들이 우아하게 음료를 마시며 커플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홀 중앙에서 춤을 추는 커플들도 있었는데 서로 밀착되어 있긴 해도 못 볼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디, 마음에 드는 파트너가 없으시다면 저와 함께 춤을 추시는 건 어떠실지요?”
“이곳에 밤에만 피는 꽃이 있다는 거 아세요? 저와 함께 구경하러 가지 않으시겠어요?”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남자와 여자들이 각자 마음에 드는 이들에게 구애하는 광경도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목부터 좀 축일까요?”
나는 벨라와 카밀라를 데리고 간단한 음식과 음료가 마련된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서 먹을거리를 챙긴 후 근처에 마련된 스탠드형 테이블에 둘러섰다.
우리는 일단 허기진 배부터 채웠다.
“여기 음식이 맛있네요.”
“입맛에 맞아요?”
카밀라가 연어 카나페를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벨라가 흐뭇하게 웃었다.
“여기 주방장이 아마 포트란 레스토랑 수석 셰프였을 거예요.”
“어, 거기 저도 알아요. 엘버나 거리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이잖아요.”
카밀라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 주방장을 데려오느라고 저택 주인이 애를 많이 쓴 모양이더라고요.”
“역시 맛있는 이유가 있었네요. 저 음식 더 가져올 건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요? 오면서 가져올 게요.”
카밀라가 나와 벨라의 접시를 살펴보며 물었다.
“연어 카나페 좀 가져다 줄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저도 그거 가져오려고 했어요.”
싱긋 웃은 카밀라가 접시를 들고 음식 테이블로 향했다.
“저는 벨라 취향이 이런 쪽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카밀라가 멀어지자마자 벨라에게 속삭였다.
“아무리 다른 곳보다 건전하다지만 가면무도회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잖아요.”
“재미있잖아요. 새롭고. 축하파티를 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죠.”
“그래도 카밀라가 잘 적응하다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카밀라는 이곳이 가면무도회라는 것도 잊은 듯 소풍 나온 사람처럼 음식을 챙기고 있었다.
“공녀님이 계시니 이곳을 왔죠. 영애하고만 갈 거였으면 좀 더 가면무도회다운 곳으로 갔겠죠.”
벨라가 와인잔을 들어 올리며 내게 씨익 웃었다.
“정말 이런 쪽이 취향인 거예요?”
벨라의 잔에 내 잔을 가져다 대자 영롱한 소리가 울렸다.
“가면무도회만큼 다양한 정보가 도는 곳이 없죠. 세간에 도는 핫이슈부터 은밀한 이야기들까지.”
“그럴 줄 알았어요.”
“뭐, 겸사겸사 즐기기도 하고요.”
벨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평민이라 다닐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잖아요.”
“여기도 초대장을 얻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돈만 있으면 얻을 수 있는 다른 가면무도회와는 달리 이곳은 상당히 프라이빗하고 폐쇄적인 편이었다.
“상단을 운영하다보면 인맥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죠. 이래저래 다 연결되어 있거든요.”
벨라가 두루뭉술하게 설명하며 넘어가기에 나도 더는 묻지 않았다.
“여기서 얻는 정보들이 꽤나 유용해요. 영애도 잘 이용해 봐요.”
벨라가 다시 잔을 부딪치며 눈을 찡긋거렸다.
“자, 여기 연어 카나페가 왔습니다.”
때마침 카밀라가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금세 접시를 비웠다.
그사이 몇몇 남자들이 다가와 춤을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자, 우리도 춤추러 나갈까요?”
“우리들끼리요?”
카밀라가 자신과 우리들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만 하면 재미없잖아요.”
“그렇지만…….”
카밀라는 동성끼리 춤을 추는 게 낯선 모양이었다.
“제가 리드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들이 보면 커플끼리 추는 줄 알 거예요.”
벨라가 이걸 위해서 남성용 연회복을 입은 거라며 속삭였다.
“두 사람이 먼저 다녀와요.”
나는 망설이는 카밀라의 등을 떠밀어 벨라와 함께 보냈다.
어리둥절해하던 카밀라도 막상 춤이 시작되니 즐기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능숙한 벨라의 리드를 보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벨라의 말대로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정보를 얻어 볼 요량이었다.
‘낸시는 보이지 않는군.’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낸시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황금 깃털 가면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홀을 한 바퀴 도는데 익숙한 모양의 가면이 눈에 띄었다.
‘저건…….’
검은색 바탕에 은색 별 세 개가 새겨져 있는 가면.
저건 분명 암살 길드 이시어스를 상징하는 가면이었다.
이시어스는 원작 게임에서 황태자와 제페스를 공략할 때 반드시 한 번은 언급되는 조직이었다.
카밀라가 이시어스의 공격을 받는 에피소드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카밀라의 암살을 의뢰한 인물은 공략하는 캐릭터에 따라 달라진다.
제페스를 공략하면 로웨나가, 황태자를 공략하면 낸시가 암살의 배후가 된다.
이시어스는 단지 컴퓨터 화면으로만 만난 것은 아니었다.
‘지난 회차 때 저놈들 때문에 죽을 뻔 했었지.’
황태자와 약혼을 하고 얼마 후 이시어스가 나를 찾아왔었다.
다행히 황태자가 보낸 비밀 호위들 덕분에 무사했었지만 상당히 당혹스러웠었다.
이시어스의 암살은 카밀라와 관련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었으니까.
이후 원작 게임의 정보를 이용해 범인이 낸시라는 사실을 밝혀내고서야 깨달았다.
낸시는 카밀라가 아니더라도 황태자와 약혼한 이라면 누구에게든 똑같은 짓을 할 사람이라는 걸.
‘오늘도 고객과 접선이 있는 모양인데 어찌하면 좋을까.’
조용히 홀을 빠져나가는 이시어스의 조직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시어스에 의뢰를 넣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시어스의 비밀 사무실에 찾아가거나 달빛 저택을 찾아오거나.
귀족들은 더러운 뒷골목에 자리한 비밀 사무실을 찾아가는 대신 달빛 저택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오늘 낸시가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카밀라가 위험에 처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비밀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단 말이지.
황태자가 어련히 잘 지키고 있겠느냐마는 이미 이시어스를 본 이상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바람을 쐬러 나가는 척하며 조직원의 뒤를 따라 나갔다.
홀을 나온 조직원은 정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 느릿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던 나는 본격적으로 조직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점점 인적이 뜸한 곳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은의 망토’를 시전했다.
시스템창이 열리며 바로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45분.
그 안에 정보를 캐내야 했다.
달빛 저택은 가면무도회 특성상 가로등을 설치해 놓지 않았다.
단지 정원을 구분하기 위해 입구에만 서너 개의 조명을 달아놓았을 뿐이었다.
그로 인해 정원 안쪽, 나무들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니 사위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앞만 보며 부지런히 걸어가던 조직원이 석상 여러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타닥, 탁, 타닥, 탁.
그가 일정한 리듬에 따라 석상을 두드리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나타났다.
드레스를 입은 모양새를 보니 여자였다.
‘설마 낸시?’
그러나 구름이 걷히고 희미한 달빛 아래 드러난 가면은 하얀색 반가면이었다.
낸시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발걸음을 돌리려다 멈추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일인지는 확인하는 게 좋겠지.’
암살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유용할 테니.
“별 구경을 나오셨나 봅니다.”
그때 조직원이 하얀 가면의 여인에게 말을 건넸다.
의뢰자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해진 암호문을 묻는 것이었다.
“이곳에 있으니 세 개의 은빛 별이 선명하게 보이더군요.”
여인은 정확하게 이시어스의 암호문을 대답했다.
그녀가 제대로 답했다는 점은 별로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당연히 그 암호문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저 여인의 목소리였다.
카랑카랑하고 톤이 높은 음성.
낸시였다.
‘이시어스를 만나러 올 때는 가면을 바꿔 쓰는 모양이군.’
원작 게임에선 낸시가 의뢰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으니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마터면 중요한 정보를 놓칠 뻔 했어.’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주시했다.
“레이디, 은빛 별에게 빌고 싶으신 소원이 있으십니까?”
“있으니까 여기 왔겠지. 안 그러면 내가 다리 아프게 여길 왜 왔겠어?”
낸시가 투덜거리며 부채를 펼쳐들었다.
“소원을 말씀해 주시지요.”
조직원은 불쾌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물었다.
주위를 힐끗 둘러본 낸시가 부채로 손을 가린 채 쪽지를 건네었다.
“이 사람을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