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대공이 황태자와 이야기를 잘 끝낸 것인지 황태자는 나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며칠 동안 외출도 하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지만 황가의 그림자나 그 외의 추격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다시 외출하기 시작했다.
딸랑.
출입문에 달아 놓은 종이 맑게 울리자 남색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재빠르게 달려 나왔다.
“나오셨어요?”
손님이 아니라 나인 걸 확인하고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카밀라는?”
“사무실에 계세요.”
“고마워요. 사무실로 바로 올라갈 거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일 봐요.”
점원을 보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안내를 맡고 있는 점원을 제외하고는 쉬고 있는 점원이 없을 정도로 모두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진열대의 반대편에 마련된 대기실에도 자리가 꽉 차 있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은 여인들이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몇몇이 나를 보고는 힐끗 거렸다.
“정말 로벨라의 소유주가 케인 영애인가 봐요.”
“체임버 공녀와 벨라인 상단과 함께 동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 중에서 케인 영애의 지분이 제일 크다던데요?”
“돈은 많으니 투자를 많이 했나 보죠.”
“상단주에게 사업을 제안한 것도, 뛰어난 세공사를 찾아낸 것도 모두 케인 영애라던데요?”
“여기 인테리어도 모두 케인 영애가 구상한 거래요.”
“설마요.”
“체임버 공녀가 직접 말하는 걸 들었어요.”
빠르게 흔들리는 부채들 사이로 나를 훑어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대부분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이었지만 개중에는 나를 향한 호기심 어린 눈빛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2층은 VIP 고객들만 응대하는 공간이고 3층은 사무실과 휴게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객용 계단과 직원용 계단을 따로 구분해 놓은 터라 나는 편안하게 3층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계단을 오르며 명성을 확인한 결과.
『명성 : 43』
그사이 또 올라있었다.
‘드디어 마이너스를 탈출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방방 뛰고 싶은 충동을 애써 내리누르며 3층에 다다랐다.
똑똑.
“들어오세요.”
사무실 안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왔어요. 어머, 벨라도 있었네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밀라가 벨라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동안 뜸하시더니.”
벨라가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자주 나오면 점원들이 불편해해요.”
“하긴 그렇죠.”
“뭘 또 그렇게 바로 인정하고 그래요? 점원들도 날 기다렸다고 말해주면 어디 덧나요?”
“사장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점원이 어디 있어요? 우리 상단 직원들도 제가 안 나오면 좋아하는 걸요.”
벨라가 당연한 거 아니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는 로웨나를 기다렸어요.”
카밀라가 밝게 웃으며 내게 차를 따라주었다.
“그래도 기다려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요.”
카밀라를 향해 마주 웃어주자 그녀가 볼을 붉혔다.
“저도 영애를 기다렸어요. 이제 만족하세요?”
벨라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네, 아주 만족스럽네요.”
내 대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아래층을 보니 사람들이 많던데요?”
“개업 초기보다 매출이 세 배로 올랐어요.”
카밀라가 홍조 띤 얼굴로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매출 보고서를 보니 계속 오르는 추세예요. 아마도 홍보 계획이 성공한 모양이에요.”
벨라도 흐뭇하게 웃으며 거들었다.
“이게 다 수확제 무도회 때 카밀라와 황태자 전하께서 애써 주신 덕분이지요.”
“계획을 세운 건 로웨나였잖아요. 저는 그저 목걸이를 하고 가서 보여줬을 뿐이에요.”
“그날 사람들이 카밀라의 얘기를 듣느라 정신없던 데요. 뭘.”
무도회에서 카밀라의 활약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그녀가 쑥스럽게 웃었다.
“페시나 의상실도 바쁜가 보더라고요.”
벨라가 창가를 향해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의상실 성공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아, 오전에 의상실 주인이 다녀갔었어요.”
“페시나가 직접이요?”
“네. 의상실이 알려지게 된 게 저희 덕분이라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더라고요. 우리 셋에게 드레스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거 영애 덕분에 저도 페시나의 옷을 입게 되겠네요.”
벨라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이제 조만간 여기 톨린 거리가 엘버나 거리보다 더 유명해질 거예요.”
“그렇겠죠. 우리 로벨라와 페시나가 있으니.”
“그러니 차기 사업을 구상 중이면 서둘러 자리를 선점해 둬요.”
조만간 이곳 땅값은 물론 가게 세도 오르게 될 테니.
“저는 당분간 새로운 사업은 벌이지 않을 예정이에요. 광산과 로벨라 일만으로도 바빠서.”
한동안 카라나이트 수요가 오를 테니 광산 관리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러는 영애야말로 자리를 선점해 두지 그래요? 뭐든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잖아요.”
“저는 이미 몇 군데 사두었죠.”
로벨라를 오픈하기 전에 이미 매튜를 통해 구입해 놓은 상태였다.
그때만 해도 톨린 거리가 내리막길을 걷던 때라 가게를 내놓는 경우가 꽤 있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었다.
“역시 빠르시네요.”
“이게 다 벨라가 잘 가르쳐준 덕분이죠.”
“어머, 갑자기 훅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가슴 떨리게.”
벨라가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카밀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카밀라는 다른 거 해 보고 싶은 거 없어요?”
“이 분은 조만간 황태자비가 되실 텐데 사업을 또 하시겠어요? 지금도 매일 같이 출근하느라 바쁘신데.”
벨라가 괜히 바람 넣지 말라며 나를 툭 건드렸다.
사실 나도 별 기대 없이 물은 것이었다.
황태자와 약혼했으니 머지않아 결혼도 하게 될 터.
황태자비로서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 배우고 갈고 닦아야 할 것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황태자와 약혼하면서 따로 수업을 받았는데 가문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카밀라는 오죽하겠나.
더구나 그녀는 사교계 입지도 미약하지 않나.
지금도 사실 사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할 때였다.
그러나 카밀라에게선 예상과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함께 사업을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저는 언젠가 저만의 사업을 해 보고 싶어요. 오랜 꿈이었거든요.”
“로벨라를 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쌓으셨으니 못 하실 것도 없죠.”
벨라가 금세 의아한 기색을 지우고 카밀라를 격려했다.
“지금 당장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아직은 경험도 부족하고 돈도 많이 모으지 못했으니까요.”
카밀라가 당황하며 작게 손사래를 쳤다.
“돈이야 이제 금방 모일 테고. 경험도 로벨라를 운영하다 보면 쌓일 테니 머지않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벨라에 이어 나도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자 카밀라의 회색 눈동자에 기대감이 어렸다.
‘카밀라는 무슨 생각인 걸까?’
단순히 가문에서 억눌려 온 탓에 꿈에 대한 열망이 큰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공작가의 천덕꾸러기라는 이미지를 지우고 능력 있는 면모를 보이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직 황태자와 혼인을 한 것이 아니니 미래에 대한 보험을 들어놓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지.
‘황태자와의 관계에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건가?’
황태자 앞에서 긴장하는 모습들도 그렇고 뭔지 모르게 찜찜했다.
“카밀라, 혼자 사업을 하게 된다면 무슨 사업을 하고 싶어요?”
황태자비나 황후는 평판을 위해 자선 사업을 많이 하니 혹시 그런 쪽은 아닐까 싶어 물은 것이었다.
“저는 찻집을 하고 싶어요. 향긋한 차향과 온화한 분위기가 정말 좋거든요.”
카밀라가 두 손을 모은 채 허공을 보며 꿈꾸듯 말했다.
“누구나 와서 지친 심신을 달래고 편안하게 쉬어 갈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어요.”
나와 벨라는 카밀라 몰래 슬쩍 눈빛을 주고받았다.
카밀라의 꿈은 소박하고 예뻤으나 황태자의 약혼자가 꿈꿀 만한 미래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 상단에서 찻잎도 유통하는데 공녀님이 찻집을 여신다면 찻잎은 저희가 유통해 드릴게요.”
“가게는 제 가게들 중에서 하나 고르세요. 제가 임대료 할인해 드릴게요.”
벨라와 나는 일단 내색하지 않고 카밀라의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
“두 분 모두 고마워요. 정말 두 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그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남겨두었을 거예요.”
카밀라의 눈가에 살짝 습기가 어렸다.
“공녀님이 독립하시겠다면 우리가 얼마든지 서포트 할 테니 결심이 서면 알려주세요.”
“그래요.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편하게 말해요.”
“고마워요.”
카밀라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자, 우리 로벨라의 개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축하파티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축하파티요?”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우리집으로 갈래요?”
“에이, 그건 너무 평범하잖아요.”
어리둥절하게 벨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 * *
“어? 벨라는 왜 드레스를 입지 않았어요? 머리도…….”
카밀라가 우리를 데리러 온 벨라를 보고는 당황했다.
벨라는 드레스를 입은 우리와 달리 남성용 연회복을 입고 짧은 머리 가발을 쓰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축하파티를 준비했기에 이러는 거예요?”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잖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알게 되실 테니.”
벨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오늘은 제가 두 분을 에스코트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즐겨주세요.”
나와 카밀라가 벨라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자 벨라가 뒤따라 올라탔다.
“우리에게도 가발을 쓰라고 한 걸 보니 신분을 숨겨야 하는 곳인가 보죠?”
내 물음에 벨라는 웃기만 할뿐 대답해 주지는 않았다.
대충 어디를 갈지 예상이 되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벨라와 카밀라 모두 기대와 설렘으로 상기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가 어느 순간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차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저택을 응시하며 혀를 찼다.
“오늘 목적지가 저곳이었군요.”
“저기가 어딘데요?”
아무것도 모르는 카밀라가 창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요.”
“네에? 가면무도회요?”
카밀라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이렇게 단번에 맞추실 줄은 몰랐는데. 제가 깜짝 선물을 하면서 공개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벨라가 너무하다고 투덜대며 준비해 놓았던 상자를 꺼냈다.
“절 뭘로 보고. 한때는 무도회란 무도회는 다 휩쓸고 다녔던 사람이라고요.”
사실 저곳은 2회차 때 황태자를 공략하기 위해 드나들던 곳이라 알고 있는 것이었다.
달빛 저택.
달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푸른빛이 나는 저택이라 붙여진 이름.
이곳은 샤밀란 백작가의 별장 중 하나였다.
그곳에선 매달 정기적으로 가면무도회가 열렸는데 고위 귀족들이 많이 참석하는 꽤 수준 높은 무도회였다.
황태자도 간혹 드나들던 곳이라 그를 만날 기회를 얻기 위해 매번 참석했더랬다.
“자,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골라보세요.”
벨라가 가져온 상자에는 가면이 여러 개 있었다.
게임에서 로웨나는 항상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가면을 썼지만 나는 튀는 건 사양이었다.
가면들 중에서 가장 무난한 검정색 레이스로 장식된 가면을 골랐다.
“음, 여기 황금색을 고르실 줄 알았는데.”
벨라가 예상을 빗나갔다며 아쉬워했다.
“공녀님도 얼른 골라보세요.”
카밀라는 가면무도회가 처음인지 한참 고심했다.
“음, 저는 이 은색 가면으로 할게요.”
은색을 바탕으로 한 가면에는 반짝거리는 가루가 흩뿌려져 있어서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다채롭게 빛났다.
“저는 그럼, 이걸로.”
벨라가 고른 건 붉은색 깃털이 장식된 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