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대공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솔직히 할 말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매번 가장 가까웠던 이들에게 배신을 당해 왔는데 어느 누굴 믿을 수 있겠나.
그래도 이 세계 사람들 중에서는 대공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퀘스트를 공유하고 있으니.
“스승님을 믿지 못했다면 제가 그 자리에서 피리를 불었겠어요?”
솔직히 황태자가 나를 데려가려 한 순간에 대공을 떠올리고는 당혹스럽긴 했었다.
그 정도로 대공을 의지하고 있었나 싶어서. 스스로도 몰랐던 속내에 꽤나 얼떨떨했었다.
“그 순간에 스승님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겸연쩍어서 볼을 긁적이자 대공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태양을 닮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네가 감옥에 가는 일은 없을 거다.”
“정말요?”
“그래, 황태자에게도 이야기해 두었으니 네게 손대지 못할 것이다.”
하긴 어제 황태자가 대공의 말 한 마디에 순순히 나를 보내주긴 했었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여 구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대공의 소맷자락을 놓았다.
“스승님, 어제 황태자 전하께서 그림자라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아세요?”
“황제의 직속 호위. 황가만 아는 비밀 조직이지.”
“그럼, 판타시아 궁이 황제 폐하와 관련이 있단 말씀이세요?”
“황제의 정부를 숨겨둔 곳이다.”
헉!
어제 본 그 은발의 여인이 황제의 정부였다고?
그 사람, 내가 매개체를 부수고 나서 갑자기 숨을 잘 못 쉰다고 했었는데.
‘와씨, 이거 완전 대형 지뢰를 밟은 거 아냐?’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내적 비명을 질러댔다.
‘왜 정부를 결계까지 둘러놓고 숨겨놓은 거냐고?’
후궁 처소들이 저렇게 다 비어 있는데.
황후가 악독한 성정도 아니고 황태자의 지위도 굳건한데 어째서.
단순히 애지중지 아끼기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여러 모로 수상쩍었다.
“그 정부가 혹시 중요한 인질이라도 되나요? 아니면 제국 차원에서 보호해야 할 중요한 인사라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까지 꽁꽁 숨겨놓을 필요가 있을까.
“그 정도로 중요한 존재인가 보지. 황제에게는.”
냉소 어린 말에 조금 놀라서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가 누군가를 비웃는 건 처음 본 탓이었다.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나 보네.’
황가와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더 골이 깊은 모양이었다.
“판타시아 궁에 머물고 있는 그 분,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았어요.”
원래 약한 것인지 나 때문인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니 멀쩡할 리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그래서 결계와 매개체로 보호하고 있었던 것인가?
“거기 매우 이상했어요. 악취도 심하고 결계며 이상한 돌멩이며 전부 폴루티아처럼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악취도 맡은 것인가?”
대공이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정말 지독하던데요? 혹시 폴루티아도 그렇게 악취가 심한가요?”
바디슈트의 보호막 때문에 폴루티아의 냄새를 직접 맡은 적이 없어서 궁금했다.
“……심하지.”
그랬구나. 보호막이 없었다면 마수 토벌하다 질식할 수도 있었겠네.
아주 잠깐 시스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혹시 악취에 관해 황태자에게 말했나?”
“아니요. 황태자 전하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잘했다.”
왠지 모르게 날이 서 있던 대공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악취에 대해 말하면 안 되는 건가요?”
“보통 사람들은 맡지 못하니까. 악취를 맡을 수 있다고 말하면 네가 어젯밤 사건의 범인이라 자백하는 꼴이 된다.”
어쩐지 시스템이 악취를 확인하라고 조언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일반적인 게 아니었잖아.
“네가 그 궁을 볼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문제지만.”
“그렇긴 하죠.”
나는 난감하게 웃었다.
내가 보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닌데 시스템은 왜 자꾸 숨겨져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인지.
대공저도 그렇고 판타시아 궁도 그렇고. 그저 한숨만 나왔다.
“황태자 전하께서 제가 판타시아에 다녀온 걸 아시는 눈치셨어요. 어떻게 해명하죠?”
“나와 함께 갔다고 하면 될 거다.”
“스승님과요?”
나를 구명해 줄 방도가 있지 않을까 기대는 했지만 직접 공범으로 나설 줄이야.
“그래, 나와 함께 갔다가 나는 대공저로, 너는 연회홀로 돌아가다 황태자를 만나게 된 거라고.”
“그 궁에서 뭘 했느냐고 물어보면요?”
“말할 수 없다고 하면 된다. 내가 그리 시켰다고 하면 더는 묻지 않을 게다.”
“정말 그렇게만 말하면 될까요?”
“어차피 네게 물을 일도 없을 거다. 내가 오늘 황태자를 만나러 갈 테니까.”
“황제 폐하께서 추궁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대공도 황족이니 황태자는 어떻게든 입막음이 가능하다고 해도 황제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나.
“황제는 나를 추궁하지 못할 거다.”
어째서? 면책 특권이라도 있는 건가?
“너는 그보다 다른 걸 걱정해야 할 것 같군.”
지금 내 안위가 걸려 있는데 이보다 중대한 일이 또 어디 있다고 다른 걸 걱정하라는 거야?
“절대 네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되는 이가 너에 대해 알게 되었을 지도 모르거든.”
대공이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게 누구인데요?”
“폴루티아를 만든 당사자, 판타시아 궁의 결계 주인.”
“아…….”
순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왠지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린 기분이 든 달까.
“서, 설마 그 분이 황제 폐하는 아니시겠죠?”
아닐 거란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어 물은 것이었다.
“황제는 아니다. 결계의 주인은 나와 같은 존재니까.”
‘나와 같은 존재’라니. 설마 인간이 아니란 소리인가?
의문을 가지고 쳐다보자 대공이 잠시 할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신수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설마 스승님께서 신수라는 건 아니시겠죠?”
내 물음에 대공은 가만히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답이 되었다.
정말 신수라고요?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대마법사 수준의 주술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규격을 벗어났잖아.’
신력이 무한대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스승님, 혹시 필립 경도 신수인가요?”
아니지요?
그런데 왜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다른 사람들에겐 배타적인 스승님이 필립 경은 가까이 둔다 했어.’
“생각보다 많이 놀라진 않는군. 신력에 익숙해서 그런가?”
아니거든요. 저 정말 많이 놀랐거든요. 지금 제 입이 떡 벌어진 거 안 보이세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안 놀라기는요. 정말 많이 놀랐어요. 스승님께서 그냥 뛰어난 주술사이신 줄로만 알았단 말이에요.”
“미리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군. 황가에서도 알리지 않은 사실을 말해줘도 될지 고민이 되었다.”
“황가에서는 스승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예요?”
“신께서 그들만은 기억할 수 있도록 하셨으니까.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그들은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지.”
가만, 그렇다는 건 황태자도 대공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건데.
지난 회차에서는 왜 한 번도 언급을 하지 않았던 걸까? 대공이 계속 잠들어 있어서?
일단 그 문제는 차차 생각해보고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해결해야 했다.
“폴루티아를 만든 이가 스승님과 같은 존재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신수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신수라고 할 수는 없지. 죄를 짓고 추방당한 죄인이니까.”
대공은 그 존재를 타락한 신수, 요수라 부른다고 덧붙였다.
판타시아 궁의 결계를 통과할 때 대공저 결계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 그래서였구나.
타락하기는 했어도 태생이 신수라서.
가만, 폴루티아와 결계의 주인이 같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3회차를 시작하고 내가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폴루티아를 정화시킨 것도 모자라 판타시아의 매개체들을 다 깨뜨려 놓았으니 그 요수에겐 내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겠네.
‘망했다.’
일반적인 악당도 아니고 인외의 존재에게 지금 사망플래그가 꽂힌 거니?
몸이 바닥으로 훅 꺼지는 기분이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지난 회차들에선 이런 일이 없었잖아.
아니, 애초에 원작 게임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 거냐고.
그것도 내 마지막 남은 회차에!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가 판타시아 궁에 들어갔다는 걸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황태자가 의심하고는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든 입막음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 그 요수도 제가 왔다갔다는 걸 모르지 않을까요? 폴루티아에서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잖아요.”
“네가 해머를 사용하면 흔적이 남는다.”
“네에?”
흔적이 남는다니? 닿는 것마다 가루를 내버리기 때문에 잔해도 남지 않는데.
“해머가 힘을 발휘할 때마다 신력을 사용하면서 신력의 흔적이 남는다. 신수들은 느낄 수 있지. 그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동안은 내 신력으로 그 흔적들을 덮어왔지만 판티시아의 결계 안은 오로지 그 녀석의 영역이라 네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다.”
“스승님 신력으로 흔적을 덮어왔다니요?”
대공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설명해 주었다.
폴루티아에 동행한 이유가 마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함도 있지만 그 요수로부터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케루나에서 있었던 일도 알려주었다. 요수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그래서 저를 그렇게 말도 없이 대공저로 내팽개쳐 버리신 거군요.”
그날 어찌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던지.
퀘스트 지역으로 갈 수 있는 이동스크롤은 퀘스트당 한 개밖에 지급이 안 되기 때문에 되돌아가서 대공에게 따지지도 못했다.
“안전하게 대공저에 도착했을 텐데.”
내팽개친 건 아니라며 대공이 눈썹을 까딱였다.
“제가 그날 얼마나 황당했을 지는 생각도 안 하셨겠죠.”
“그놈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었다.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두려움만 생길 테니.”
만약 그날 요수에 대해 들었다면 외출도 잘 못하고 개업에도 차질이 생겼겠지.
대공이 나를 배려해줬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말도 없이 나를 보낸 건 조금 서운했다.
어쨌든 그 문제에 대한 오해는 풀렸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스승님께서 애써주셨는데 제가 다 망치고 말았네요.”
시스템이 그 요수의 아가리에 나를 고이 던져준 꼴인 셈이니.
‘망할 놈의 시스템.’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아.”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아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
“어디 아픈가?”
“속이 터질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엔딩을 향해 가는 길이 가시밭길인데 이제는 길목마다 지뢰가 투척되고 있었다.
가슴에 바윗덩이라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
그때 정수리에 따스한 손길이 닿아왔다.
이내 포근한 기운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가며 깨질 것 같은 두통이 사라졌다.
꽉 막힌 것 같던 속도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그러고 나니 머리가 좀 굴러가기 시작했다.
“스승님, 제게 보호술을 걸어두셨다고 하셨죠?”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그 요수의 공격도 막을 수 있는 건가요?”
“네가 그놈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바로 내가 알 수 있다. 내가 가기 전까지는 보호술이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다.”
이 순간 대공의 존재가 태산처럼 크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악패를 뽑은 줄 알았는데 조커였던 건가.
새삼 과거 랜덤박스에서 대공을 뽑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천공의 방패도 있으니 여차하면 도망칠 시간은 벌 수 있겠지.’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놈이 가까이 있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폴루탄의 기운과 악취를 맡을 수 있으니.”
“결계도 통하지 않죠.”
“그래, 그러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지체하지 말고 나를 불러라.”
“네, 알겠어요.”
시스템, 어디 한 번 해 보자고.
네가 아무리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고 해도 나는 반드시 살아남아 내 세상으로 돌아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