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오랜 훈련으로 거칠어진 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지 않으려 참아야 했다.
당장이라도 애런의 손을 걷어차고 싶은 걸 참느라 손을 꾹 쥐었더니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어느 정도 발마사지가 끝난 것 같아 슬그머니 다리를 빼려는데 애런이 바로 붙들었다.
“종아리도 풀어야지. 이대로 자면 내일 다리가 많이 부을 거야.”
“집에 가서 조이에게 해달라고 하면 돼.”
“조이의 손아귀 힘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조이도 마사지 잘 해.”
“이건 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니까.”
나는 어떻게든 애런에게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그는 내가 이유를 대는 족족 다 쳐내버렸다.
나는 결국 한숨을 삼키며 참아야만 했다.
종아리에 익숙한 온기가 닿아오자 기분이 묘해졌다.
마디가 불거진 손이 적당한 압력으로 부드럽게 누르자 불편한 마음과는 달리 다리는 시원했다.
나는 물끄러미 애런의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애런, 아파.”
“너 지금 뭉친 데 풀지 않으면 밤새 고생할 거야.”
“괜찮아. 안 풀어도 돼. 네 마사지를 받는 것보다 그냥 앓는 게 낫겠어.”
“받을 때 좀 아프긴 해도 다 받고 나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질 걸?”
“싫다고, 진짜 아프단 말이야.”
“손에 힘을 빼고 살살해볼게. 어때? 이 정도는 괜찮지?”
“아, 간지러워. 간지러워서 못 참겠어.”
“로나, 자꾸 움직이면 어떡해.”
난감해 하는 애런의 목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는 내 웃음소리가 귓가에 아련하게 울렸다.
그래, 그런 때도 있었지.
사냥대회 때 호기롭게 애런을 따라나섰다가 다리가 뭉쳐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날 애런이 정성들여 다리를 풀어준 덕분에 다음날 가뿐하게 일어났더랬다.
옛 추억을 떠올리니 절로 눈가가 허물어졌다.
나는 애런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우리도 그렇게 예쁜 시절이 있었는데.
너와 내가 엔딩으로 이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시스템이 내게 선택지를 주었다면 나는 이곳에 남는 걸 선택했을까?
선택할 겨를도 없이 내가 귀환하게 되었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을 털어냈다.
이제와 이러는 게 무슨 소용인가.
만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홀에 나가게 되면 놀랄 지도 모르겠다.”
애런이 여전히 마사지에 집중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왜?”
“너를 찾으러 홀에 돌아다녔었는데 다들 네가 만든 목걸이 이야기만 하는 거 있지.”
음, 성공했군.
명성이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거렸으나 애런이 있어서 참았다.
“내가 말했잖아. 내 홍보 전략이 통할 거라고.”
“맞아. 네 말대로 됐어.”
고개를 든 애런이 순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께서도 네 이야기를 하시더라.”
“공작님께서?”
애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네가 로벨라의 주인이냐고 물으시던 걸. 그래서 내가 그렇다고 말씀드렸지.”
“공작님 반응은 어땠어?”
“놀라시는 것 같았어. 유능한 세공사를 찾아낸 것도, 보석 디자인부터 가게 인테리어까지 모두 네 아이디어라고 말씀드렸거든.”
애런이 조심스럽게 내 다리를 내려놓으며 나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가문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야. 그러다 보니 주위를 잘 살피지 못하셔.”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가 네게 무례하게 말씀하실 때가 많았다는 거 알아. 백작님과 오랫동안 친분을 나눠오셔서 너도 편하게 대하신…….”
애런이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리고 쓰게 웃었다.
“이런 변명을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 너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알면서도 막지 못했어.”
강아지 같은 눈매가 힘없이 늘어졌다.
“네가 아버지께서 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안다고 말했을 때 정신이 번쩍 났었어.”
애런이 팔을 뻗어 내 손을 살포시 그러쥐었다.
“네가 상처받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어. 넌 씩씩하니까. 우리 아버지에 대해 잘 아니까. 이해해 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나 봐.”
나는 애런의 고백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1회차에서 애런과 사귈 때도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많이 힘겨워했었다.
그때마다 내가 위로하고 다독여주었어야 했다.
하루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 울면서 내게 사과했었지.
지난 2회차 때는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으니 그럴 일도 없었다.
‘너는 왜 또 내게 사과를 하고 있니.’
지금 우리는 친구 사이일 뿐인데.
명치끝이 무언가로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애런, 네가 왜 사과를 하고 그래. 네 잘못도 아닌데.”
훈련으로 단련된 손을 마주 잡자 그가 매달리듯 힘을 주었다.
“내가 아버지를 잘 설득했다면, 네게 함부로 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렸다면 네가 상처입지 않았을 테니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퍼 공작이 어디 애런의 말을 들을 사람인가? 아버지와 가주의 권위로 찍어 누를 사람이지.
“공작님은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내가 그것도 모르겠니? 한두 해 뵈온 것도 아닌데.”
나는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야 애런의 마음도 가벼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괜찮아. 상처 받지 않았어.”
1회차 때는 공작의 무례한 발언과 행동에 상처도 입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별 감흥이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정말 괜찮아?”
애런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이해하니까.”
사실 이해라기 보단 어차피 바뀌지 않을 사람이니 체념한 것이지만.
“그러니 자책하지 마. 네가 내 마음을 알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고마워.”
“로나.”
울 것처럼 눈꼬리를 늘어뜨린 애런이 내 손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하는 행동은 꼭 비 맞은 강아지 같았다.
손을 뻗어 결 좋은 금발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자 조금은 격해졌던 호흡이 안정을 되찾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 불행하기를, 내 앞에 처절하게 무릎 꿇고 빌기를 원했던 적도 있었는데.
회차를 거듭하며 내 감정도 마모된 것인지 이제는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를 정도로 감정의 경계가 모호해져 버렸다.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 * *
파란만장했던 수확제 무도회가 끝나고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대공은 약속대로 나를 찾아왔다.
그것도 침실로.
“스승님, 아무리 사전에 약속을 하셨다고 해도 이렇게 불쑥 레이디의 침실로 찾아오시면 어떡해요?”
나는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럽게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내가 일찍 일어나 단장을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먼 자다 깬 모습으로 마주할 뻔 했다.
“아침이라고 해도 정오가 다 된 시간이지 않나. 예의에 어긋나는 방문은 아니다.”
“레이디의 침실에는 가족과 연인 외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거 모르진 않으시겠죠?”
“네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것 같군.”
한숨을 내쉬는 대공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황가의 그림자들이 나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가슴이 답답해진 탓이었다.
“일단 대공저로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여기서 바로 이동하시게요?”
“지금 네 행적을 남겨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우리 백작가 사람들이 날 찾기라도 하면 어떡해.
“잠시만요. 조이에게만이라도 일러둘게요.”
나는 대공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조이에게 피곤해서 좀 더 자야겠으니 몇 시간동안 들어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불 안에 베개를 넣어 자는 것처럼 꾸며놓고 대공과 함께 대공저로 이동했다.
대공은 내가 응접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질문부터 던졌다.
“도대체 그곳엔 왜 간 것이지?”
“그곳이라니요?”
내가 대공을 부른 곳은 예전 후궁들이 사용하던 처소였다.
그곳은 숨겨진 궁과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곳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알고 묻는 것인가.
“판타시아.”
“판타시아가 뭔데요?”
“정말 모르는 것인가? 네가 어제 들쑤셔 놓은 궁이 바로 판타시아다.”
숨겨진 궁 이름이 판타시아였어?
어째서 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거지?
심지어 황태자의 약혼자였을 때조차 그 궁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 않았나.
“그 궁 이름이 판타시아인지는 몰랐어요.”
이미 대공이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더는 모른 척하지 않고 순순히 불었다.
갑자기 이름도 모르는 궁을 정화하라는 계시몽을 꿔서 궁에 잠입했던 것이라고.
그 밖에도 내가 무엇을 깨뜨렸는지,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내가 나올 때 무슨 사단이 일어났는지.
빠짐없이 설명했다.
“하아.”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대공이 한숨을 내쉬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팔을 기댄 그가 이마를 짚었다.
“네가 어제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고는 있느냐?”
“솔직히 모르겠어요. 계시몽 대로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우니 일단 저지르긴 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상체를 일으킨 대공이 사고 친 어린 아이를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걸 어쩌면 좋나.’라는 시선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퀘스트 때문이라 나도 무척이나 억울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한 짓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스승님, 도와주세요.”
나는 쭈뼛쭈뼛 손을 뻗어 대공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어제 황태자 전하도 저를 잡아가려 하시고 그림자인지 뭔지 암살자 같은 이들도 막 쫓아오고. 무서워요.”
울먹울먹한 표정으로 대공을 쳐다보자 그의 미간이 살포시 좁혀졌다.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침대에 엎어진 터라 아침까지도 위기감이 들진 않았었다.
그런데 대공에게 사정을 털어놓고 나니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잡혀 들어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되면 어떡하지?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미친 사람 취급이나 당할 때니 변명도 할 수 없고.
결국 고문만 받다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안 돼!’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려왔다.
“스승님, 저 정말 감옥에 갇히는 걸까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단 말이에요.”
대공이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더욱 손에 힘을 주며 매달렸다.
“저는 황궁이 위험하다고 해서 정화를 했을 뿐이라고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계시몽을 받았을 때 왜 내게 연락하지 않았지?”
“그건 ……폴루티아에 관한 게 아니라서.”
“계시몽에 대한 건 모두 내게 말해주기로 약조하지 않았었나.”
“그렇긴 한데, 마수에 관한 것도 아니고 황궁 안이라 위험하진 않을 것 같아서.”
내 변명이 이어질수록 대공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나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폴루티아와 관련 없는 계시몽을 받은 이유를 물어보면 변명할 말이 없기 때문에 숨겼다.
만약이라도 대공이 퀘스트를 하지 못하게 막아서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
“………아직까지 나에 대한 신뢰가 없는 모양이로군.”
어쩐지 조금은 서운한 어투라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살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서운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황금빛 눈동자에 왠지 모르게 노기가 서린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