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꿀꺽.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클로디안의 저런 모습은 지난 회차들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별궁의 기다란 그림자 속에 서 있는 탓에 수려한 얼굴 위로 내려앉은 짙은 음영이 더욱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해머로 날려 버리고 도망갈까?’
손끝에 해머를 소환할 수 있는 팔찌가 만져졌지만 쉬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기서 황태자인 클로디안을 날려 버리면 황족 상해죄를 짓게 될 테니.
‘그땐 정말 수습이 불가능하겠지.’
하아, 그럼 어떡해야 하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번 회차는 정말 발걸음 하나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내디뎠건만.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이상한 퀘스트만 아니었어도.’
그냥 페널티를 받고 넘어갔어야 했나.
후회와 자책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러다 종국에는 시스템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애, 내궁 불법 침입이 얼마나 큰 죄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나를 향한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내가 입술만 깨물고 있자 클로디안이 몸을 낮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더구나 별궁 쪽에 사고가 터진 것 같던데.”
클로디안이 힐끗 시선을 던진 방향은 정확히 숨겨진 궁이 있는 방향이었다.
‘클로디안도 숨겨진 궁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나는 클로디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영애가 용의자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의 말대로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절망하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스승님이라면 방도가 있을 지도 몰라.’
지난번 호수에 빠졌을 때 황태자를 설득해서 돌려보낸 걸 보면 영향력이 상당한 것 같으니까.
무엇보다 퀘스트에 관한 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대공밖에 없지 않나.
나는 왼쪽 팔목을 매만졌다. 손끝에 가는 피리가 만져졌다.
드레스를 입을 때는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기 때문에 피리를 목에 걸 수 없다.
하여 손목에 둘둘 감고 다니던 참이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이 선택으로 대공의 호감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앞으로 관계를 진전시키는데 이 사건이 걸림돌이 될 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감옥에 갇혀 게임 오버가 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나는 손목에서 목걸이를 풀어 피리를 힘껏 불었다.
“영애, 지금 뭐……?”
나를 수상히 여긴 클로디안과 근위대장이 내게 손을 뻗었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 또한 멍하니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을 쳐다보았다.
“……스승님?”
물론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피리를 분 것이지만 대공이 바로 올 줄은 몰랐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군.”
대공이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스승님이세요?”
설마 환영은 아니겠지?
나는 손을 뻗어 더듬더듬 대공의 어깨를 매만졌다.
평소보다 굳은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보던 그가 내 손을 붙잡아 내리고는 몸을 돌렸다.
“황태자, 내 제자를 데려가겠다.”
“카이스님…….”
클로디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일은 내가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그러니 내 제자에겐 손대지 마라.”
마치 내가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것인지 아는 것처럼 대공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의문이 들었지만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지라 조용히 서 있었다.
“영애를 어디로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대공이 강경하게 나오니 하는 수 없다 여긴 것인지 클로디안도 한 발 물러섰다.
“대공저.”
“안 돼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내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대공이 왜 안 되는지 묻는 것처럼 눈썹을 까딱였다.
“저,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야 해요. 거기 파트너도 기다리고 있고 아버지께서도 걱정하실 거예요.”
“네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안다. 왜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면 오히려 더 의심받게 될 지도 모른다.
“무도회장에선 널 숨겨줄 수 없다.”
나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색 막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 결계로 나를 숨겨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이스님, 영애의 뜻대로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림자가 움직였거든요.”
클로디안이 그림자를 언급하자 대공의 매끈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대로 영애가 사라진다면 오히려 의심을 받게 될 겁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영애가 카이스님의 제자라는 걸 알고 계실 테니까요.”
대공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님, 그렇게 해주세요.”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나를 불러라.”
“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영애, 카밀라가 지금 테라스에 있을 텐데 거기로 가는 건 어떻겠나?”
클로디안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과연 카밀라를 믿어도 될까?
쉬이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클로디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만약 카밀라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면 나와 같이 들어가는 건 어떤가?”
“그게 더 주목 받을 것 같은데요?”
약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황태자가 약혼자는 테라스에 두고 나와 돌아다닌다?
이거야말로 입방아에 오르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클로디안과 엮이는 건 사양이었다.
“스승님, 그냥 제가 있던 테라스 근처로 데려다 주세요.”
애런이 찾고 있을 테지만 정원 산책을 했다고 둘러대는 게 최선이었다.
“아, 그리고 제 차림새도 좀 정돈해 주세요. 이래서야 어디 쫓기다 온 사람 같잖아요.”
대공이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딱 튕겼다.
뒷머리를 만져보니 헐거워졌던 머리장식이 다시 고정된 것 같긴 한데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안심이 되지 않았다.
“거울이 없으니 확인이 어렵네요. 스승님께서 보시기에는 어때요? 깔끔해 보이나요?”
대공의 무심한 눈길이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의심받진 않겠군.”
“다행이네요. 정말 감사해요.”
내 감사 인사에도 대공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황태자 전하, 저 그럼 가 봐도 될까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클로디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는 물론이고 근위대장도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대공이 내 팔을 붙잡았다.
“이만 가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풍경이 달라졌다.
화려한 불빛과 아름다운 선율의 춤곡,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곳.
바로 다이아몬드 홀이 있는 베이렌 궁 앞이었다.
“정말 괜찮겠나?”
“네, 괜찮아요.”
솔직히 불안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대지만 애써 괜찮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저, 오늘 일은…….”
“내일 아침에 데리러 가지. 방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네? 백작저에 오시겠다고요?”
그러나 대공은 내 물음에 대답해 주지도 않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대공이 떠난 자리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로나?”
그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은 뒤 몸을 돌렸다.
“애런.”
“로나!”
애런이 나라는 걸 확인하고는 다급하게 달려왔다.
반듯하게 올렸던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살짝 땀 냄새도 배어나왔다.
“로나, 대체 어디 있었어?”
그가 가쁘게 호흡을 내쉬며 내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조급하게 나를 살피는 눈동자에 걱정과 안도가 서려 있었다.
애런에 대해선 뭐라 딱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 많이 찾아다녔어?”
“동료들하고 이야기를 마치고 테라스로 갔었는데 네가 없어서 혹시 휴게실로 간 건 아닐까 찾았는데 거기도 없고.”
강아지처럼 처진 눈매가 더욱 축 늘어졌다.
“홀 안에도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정원까지 나왔는데 네가 계속 안 보여서. 혹시라도 네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예전에 내가 빠졌던 호수까지 다녀왔다며 애런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내가 아플까봐 세게 쥐지도 못하면서도 나를 붙들고 있는 손길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나는 팔을 들어 널따란 등을 조심스럽게 도닥였다.
“답답해서 바람 좀 쐴 겸 나왔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줄 몰랐어. 미안해. 걱정시켜서.”
“하아.”
애런이 토해낸 숨이 내 어깨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정말로 많이 놀랐던 것인지 애런은 한참만에야 고개를 들었다.
“정말 다른 일은 없었던 거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감싸며 물었다.
“많이 걸어서 그런가? 다리가 좀 아프긴 하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살짝 눈을 찡그렸다.
구두를 신고 달린 탓에 상처가 났던 발은 대공이 치료해 준 덕분에 말끔히 나았지만 일부러 아픈 척을 했다.
그래야 의심 받지 않을 테니까.
그냥 몇 마디 걱정을 듣고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애런이 갑자기 나를 안아들었다.
“애런?”
“다리 아프다며.”
“못 걸을 정도는 아니야.”
이런 걸 기대했던 건 아니라 내려달라 버둥거리자 애런이 더욱 단단히 나를 붙들었다.
“네가 지금 얼마나 오랫동안 다닌 건지 모르지?”
“그렇게 오래됐어?”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볼을 긁적였다. 그런 나를 보며 애런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이 주변을 다 찾아봤는데도 안 보이던데.”
“아, 미로 정원 쪽으로 갔었어.”
애런이 나를 찾기 위해 갔었다는 호수는 미로 정원과는 반대편이었기에 할 수 있는 변명이었다.
실제로 미로 정원을 지나며 몇몇 밀회 커플들을 봤으니 적당히 알리바이가 될 터였다.
“설마 너 미로에 들어갔던 건 아니지?”
“다 들어간 건 아니고 그냥 입구만 조금 둘러보고 나왔어. 거기 잘못 들어가면 못 나오잖아.”
“그걸 알면서 거길 들어갔던 거야?”
애런이 눈을 크게 뜨며 나무랐다.
“들어간 건 아니라니까. 그냥 입구만 살짝.”
내가 손가락으로 조금을 표시하며 혀를 쏙 내밀었다.
애런이 얘를 어쩌면 좋을까라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나가서 미안해. 잠깐만 바람 쐬고 올 작정이었는데.”
나는 이 상황을 빨리 무마하고자 애런의 목을 그러안으며 속삭였다.
그러자 애런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느껴졌다.
“다음에는 꼭 말하고 나갈게.”
애런과의 접촉에 뻣뻣하게 굳어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단단한 어깨에 이마를 살짝 비볐다.
한 번만 봐달라는 뜻을 알아들은 것인지 애런이 몸에 힘을 풀며 더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 약속 꼭 지켜줘.”
알겠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애런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가 한숨처럼 내뱉은 말이 밤바람을 타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안도가 깃든 음성에 왠지 마음이 이상했다.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어 애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바로 홀 안으로 들어갈 줄 알았던 애런은 1층에 있는 테라스로 나를 데려갔다.
난간을 넘어서 들어간 터라 다행히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했다.
“여기는 왜?”
“혹시 백작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아버지께서는 내가 나간 줄 모르셔?”
“응, 말씀 안 드렸거든.”
다행이다. 아버지께서 아셨다면 아마 꽤나 소란스러워졌을 것이다.
“그럼, 우리 둘이 산책 다녀왔다고 말씀드려도 되잖아.”
굳이 테라스로 와야 했나?
“너 다리 아프다며. 홀에 들어가면 또 사람들이 찾아올 거 아니야.”
“아…….”
“여기 다리 올려봐.”
“다리는 왜?”
“내가 풀어줄게. 뭉친 근육을 푸는 일은 기사들에겐 일상이니까 잘할 수 있어.”
애런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 내 표정이 굳었지만 애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다리를 부드럽게 쥐었다.
신발을 벗겨내고 발가락 사이사이를 꾹꾹 누르는데 많이 해봤다는 말이 맞는지 꽤나 능숙했다.
그러나 내겐 고역이었다.